1934년소련의울리야노프스크에서태어났다.
1957년모스크바대학역사학과를졸업한후크라스노야르스크지방의콤소몰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서근무했다.
1961년소련공산당중앙위원으로발탁됐고
1968년모스크바의사회과학아카데미에서프랑스대혁명사를편찬했다.
1983-86년잡지’커뮤니스트’의편집위원,’진보’지의국제관계사편집위원및
문화재단의위원을역임했다.
이후모스크바역사고문서연구소의소장을역임,고르바초프개방정책이후
스탈린시대의상황등소련의역사를알리는데전념했다.
말하자면그는체계적인학문과관료의과정을거친엘리트공산주의자인것이다.
기소르망(GuySorman)은,
파리행정대학원-ENA-출신으로세계적언론의유명칼럼니스트이자저술가이며
세계적인석학이자21세기의지성으로불리는문명비평가이기도하다.
우리나라에도자주오고있는지한파로서그의저서중여러권이번역,출판되었다.
기소르망이모스크바에서유리아파나시에프를만난것은1988년9월이었다.
고르바초프집권후3년이지난시점이었다.
소르망은모스크바의붉은광장바로옆에있는’역사문서연구소’로그를찾아갔으며,
그를인터뷰대상으로정한것은그가그체제안에서는가장변두리에있었기때문
이었다.
소르망이입수한정보로는,
아파나시에프는반체제인사는아니지만반체제에가까운인물이었다.
시기적으로소련의붕괴가감지되는시기에그를통해소련의내막을짚어볼수있다고
판단했기때문이기도했다.
아파나시에프는소르망에게사무실을벗어나붉은광장을걸으면서얘기하자고제안
했다.
도청과감시가일상화된체제에서잠시일탈하고싶었는지도모른다.
곧그들은사람들이길게줄서있는’레닌묘’앞에다다랐다.
이때아파나시에프는결코쉽게들을수없는말을한다.
‘이것을영원히땅밑에묻어버리고나면소련인민들은드디어스스로자유롭게생각
할수있게될것이다.’
그때까지도레닌은비난의대상이될수없는무오류(無誤謬)의존재처럼보일때다.
‘우리체제의기본은레닌이아니라혁명,그자체다.
인민은레닌이어쨌든압제의시작에대해책임이있는것이아닌가하는의문은
가지고있지만그는스탈린과는달리아직도신성한존재다.’
골수공산당고위간부입에서이런말을듣는다는것은확실히생소한것이다.
그러나아파나시에프는소르망에게분명그렇게말했다.
어떻게해서소련이거대한감옥으로변하게되었는지를이해하려면역사를얼마나
거슬려올라가야하는가.
이것은마르크스의죄일까,아니면레닌이나스탈린에게그책임이있는것인가.
아파나시에프의대답은,
그셋모두와함께차르(Czars)들-러시아황제들까지도책임이있다는것이다.
소련은대대로내려오고있는억압적모델을계승했는데그상승효과가현실화된
것이다.
제정(帝政)시대부터소련은민주주의를비웃고지식인을압제하고복종을거부하는
사람들을추방하는것을배워왔다.
게다가마르크스주의는개인이역사의피할수없는행진앞에서무가치한것으로전락
해버리고만다는기계적인사회관을강요했다.
마르크스는사유재산의철폐를주장함으로서개인을국가권력앞에발가벗긴채
팽개쳐두었으며레닌은모든반체제사상을반역으로낙인찍었다.
이어아파나시에프는,
마르크스주의를전체주의의길에올려놓은것은결정적으로레닌이었다고말한다.
스탈린주의에대한평가에서,
메드베데프같은역사학자나리바코프,솔제니친같은소설가들의글은흥미는있지만
분석적이지는못하다.
아파나시에프에의하면,
마르크스주의에입각한비평만이스탈린주의의깊숙한구조를파헤칠수있다는것이다.
스탈린은매우독창적인압제의차원을한가지더추가했는데개인재산에대한
완전한국가에의귀속이그것이다.
개인의소유권을철폐한것이야말로스탈린주의의실질적핵심인것이다.
아파나시에프는,
스탈린주의를계급투쟁의한형태로본다.
생산수단을장악하기위해계급과계급이싸우는투쟁인것이다.
한편에는보통사람들이있고,다른쪽에는당관료가있다.
보통사람들의사유재산을폭력으로탈취해간것이당관료다.
강제노동수용소와부농(富農)에대한무자비한학살,그리고대중에대한억압은
사유재산제도의전면적철폐를이룩하기위한목적때문이었다.
따라서공산당과관료들의권력은탈취된재산권독점에기초를두고있는것이다.
기소르망은,
아파나시에프가유고의’질라스’와어떤접촉도없으면서스탈린주의에대한분석
에서두사람이일치된견해를가지는데주목한다.
지식에대한직접적인압제는드물지만지식인을고립시키는일은계속되고있으며
소련사회에대한과학적분석은공산당의끈질긴검열과정보의독점때문에사실상
불가능하다고그는말한다.
따라서공산당의권력이사유재산의철폐에기초하고있음을밝히는것은금지되어
있는것이다.
1917년에나타난소련체제의성격은어떤것인가.
이괴물의이름을무엇이라고지어야하는가.
인텔리겐챠중대부분이가진생각은다소녹이슬기는했지만이체제가사회주의임은
틀림없다고느끼는것이다.
이것이공식노선이기도하다.
그러나아파나시에프는이견해에동조하지않는다.
무엇보다도그질문자체가불합리하다는것이다.
우선은’사회주의’를무엇이라고정의하는가가중요하다.
만약소련이진정한의미의사회주의국가라면소련만을사회주의적이라고불러야한다.
달리말해소련은신봉건주의국가로분류돼야하기때문이다.
봉건주의체제아래에서는권력자와인민사이의관계는개인적이고자의적이다.
그들사이에는법에의한매개가없다.
소련의법정은다만공산당의권력을보강하기위해존재하는것이지정의를위한것은
아니라고아파나시에프는말한다.
인민을수동적으로만든것은,그래서소련의체제다.
그들은말한다.
‘우리는그래도먹고살고있고,살집도있으며,아프면치료도받는다.
무엇때문에더위험할지도모르는새길로들어서는모험을할것인가.’
아파나시에프는,
인민들의이런태도는수년에걸친선전이집단적심리속에단단히주입되었기때문
이라고말한다.
소련인민들에게자본주의란실업및비참한빈곤과같은것이라고선전해온기만이
그것이다.
고르바초프의때늦은페레스트로이카가부딪친벽도그것이었다.
개혁파의핵심인물들은물론,아파나시에프를포함한소련지식인들은자본주의를
좋아하지않는다.
그들은자본주의가가능하지도않을뿐더러바람직하지도않다고생각한다.
자본주의의어떤점을부정하는지를모르면서도그렇다.
그들은고정관념의포로들인것이다.
아파나시에프는말한다.
‘우리도자본주의가마르크스이후상당히발달했다는것은알고있다.
그렇지만우리가고립되어지냈기때문에거기에대해별로아는것이없다.’
그렇다면왜자본주의를반대하는가.
대답은간단했다.
‘자본주의는비도덕적이기때문이다.’
1988년여름이후로,
콜호즈(Klokhoz-집단농장)에서임금을받고일하는사람들은정부로부터농토와
장비를임대해주겠다는제의를받았다.
기소르망의생각은,
50년동안이나토지를못가져본소련의영세농들은이제의를받고기뻐서껑충껑충
뛸줄알았다.
그러나아파나시에프의얘기는전혀달랐다.
1930년대이후이미영세농은없어졌다.
그들은단지농업노동자에지나지않으며곡물수확량에관계없이트렉터를운전한
시간에따라급여를받을뿐이다.
그들은책임을져야하는농업경영자가되려고하지않았다.
또그들은스탈린에의해부농-Kulak-이숙청당한사실을잊지않고있는것이다.
아파나시에프는소련경제의대부분이전시경제그대로남아있다고말한다.
‘우리는우리들이가지고있는수단을집중화함으로서단순목표를달성하는방법을
알고있다.
우리는우주공간에사람을보내는일은해내지만인민들에게소시지를주는일은
하지못하고있다.’
인터뷰를마치면서기소르망은그에게물었다.
‘정치적인위험을무릅쓰고그렇게자기의생각을털어놓는것은무엇때문인가.
강제수용소로갈수도있지않은가.’
아파나시에프의대답은짧았다.
‘절망때문이다.’
고르바초프가집권한것이1985년,
베를린장벽이무너진것이1989년.
그리고1991년소련보수파의쿠데타가발생,이를무력화시킨엘친은급진개혁을
단행했으며공산주의포기와공산당해체를계기로악의제국소련은붕괴됐다.
1917년10월의’볼세비키혁명’으로시작된’사회주의’실험은74년만에막을내리고
그이념은역사앞에서용도폐기된것이다.
그동안이사악한이데올로기는2억이넘는사람들에게사유재산의몰수,가난,고통,
질병,공포와비밀경찰에의한체포,고문,유형,처형이라는지옥을겪게했다.
‘루비앙카’는그상징이다.
지금전세계적으로잔혹한스탈린주의가유일하게살아있는곳이우리의한반도다.
참으로불행하고한탄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북쪽은그현장이며,남쪽은그망령이배회하는혼돈의땅이다.
한국의좌파는,특히친북좌파는자기들의이념적근거가빈약한것과무지를인정해야
한다.
그들에게는자기이념에대한학문적토대가없다.
그래서그들은아파나시에프의’절망의증언’에귀를기울여야한다.
자기들이쫓고있는,이미용도폐기된,반인간적인허상의실체를깨달아야한다.
19세기에매달린채21세기를살수는없다.
지나간것은지나간것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