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소묘, 이스탄불.
터키의이스탄불-Istanbul은,
그지리적위치부터가대단히역사적이다.
흑해와지중해를연결하는,물쌀이빠르고좁은보스포루스해협을사이에두고
아시아와유럽에걸쳐있다.
천만이넘는인구중70%이상이유럽쪽에거주하고있으며지금도터키수입물량의
70%,수출물량의20%를취급하고있는주요항구도시이기도하다.
기원전667년,
그리스계의’메가다’왕국의식민지로도시가건설되었으며그들의왕인’비잔티누’
의이름을따비잔티움이라불렀다.
기원후330년,
콘스탄티누수대제는분열된제국을재통일,이곳을동로마제국의수도로삼았으며
자기의이름을따서콘스탄트노불이라불렀다.
비잔틴제국의수도가된것이다.
1453년,오스만제국에함락되기까지1100여년동안콘스탄티노불은동로마제국의
수도였다.

오스만제국의(투루크)의메메드2세는,
1453년난공불락의콘스탄티노불을새로운무기인대포로공략,함락했으며이후
콘스탄티노불과터키식명칭인이스탄불(도시라는뜻)을같이쓰다가1930년이후
이스탄불로공식결정했다.
1923년터키의수도가앙카라로결정된후이스탄불은전같은지위는누리지못했지만
그역사적인특이성때문에여전히세계적인도시로남아있다.
특히불루모스크,소피아사원,톱가피궁전,그랜드바자르는그어떤곳에서도볼수없는
역사의현장이며변함없이제1순위여행지로추천받을수있는곳이다.
지금도이스탄불의서쪽경계에는비잔틴제국시대의성벽이거의완벽한상태로남아
있다.
메메드2세가이성을공격할당시,그때기준으로이성벽은함락할수없는난공불락
이었으며세계가그사실을인정하는수준이었다.

일명’데오도시우스성벽’으로도불리는이성벽은,
기원후413년에축조된것으로서,
성벽앞에는유사시9미터깊이로물을채울수있는너비18미터의해자가있다.
이는최고속도로달리는말이라해도뛰어넘을수없는넓이로계산된것이다.
특히이성벽은육중(六重)의축조로중세시대최고의방어벽이기도했다.
해자뒤에는총안이설치된나즈막한흉벽이세워져있으며그안쪽에는9미터너비의
통로가가로놓여있다.
흉벽뒤에는다시두께2미터,높이9미터의외벽이세워져있으며그사이사이일정한
간격으로96개의사각탑이만들어져있다.
외벽안쪽에도넓찍한통로가있으며그뒤에는육지방어물인두께5미터,높이12미터의
내벽이있으며거기에도96개의탑이세워져있다.
글자그대로난공불락의성벽인것이다.
나는흉벽안쪽의넓은통로를오래동안거닐면서이거대한성벽이무너지고,
콘스탄티노불이함락된후사흘동안의피비린내나는약탈을생각해봤다.
수녀까지도강간당하고노예로팔린그약탈은지금우리로서는생각도할수없는
최악의수준이었다.
아랍에대한십자군의약탈도비슷한것이었다.
야만족에의해중세서양문명의근거지하나가소멸되고역사는전혀다른세계를기록
하기시작한것이다.

처음에,
메메드2세가콘스탄티노불을공격하려고했던1452년,
우르반이라는독일인기술자는먼저콘스탄티노불에대형대포를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아직대포의위력에대해이해가부족했던그들은우르반의제안을거절했다.
이에우르반은술탄을찾아가다시이를제안한다.
술탄은그때까지만들어진것보다두배나더큰대포를만들어달라고부탁했다.
1453년1월에완성된대포는,
포신이8.2미터,포둘레76센티미터로포신을둘러싼청동의두께는20센티미터에
이르렀다.
시험발사에서무게600킬로그램의포탄이엄청난소리를내며1.6킬로날아가땅속
으로1.8미터깊이에박혔다.
그해3월초,
60마리의황소가끌고군인200명이옆에서떠받치는가운데대포의이동이시작됐다.

키아라푸루고니의기록에의하면,
그때의대포는다루기가몹씨위험했으며재장전하는데도시간이많이걸렸다.
대형인경우한번발사한후두시간이지나야재발사할수있었으며열악한도로사정
때문에운반하기에도큰어려움을겪었다.
그것은또한파열하거나변형되어못쓰게되는경우가많았기때문에수명도길지
못했다.
그러나술탄메메드2세는이런무지막지한대포로8주동안계속콘스탄티노불의
성벽에공격을퍼붓고결국은난공불락의성을함락한것이다.
동시에로마제국의천년역사도끝나게됐다.

술탄-Sultan의어원은,
통치자,권위를의미하는아랍어이며본래는종교적의미에서도덕적책임과종교적
권위를수행하는통치자의역할을의미하는비인격적용어였다.
그러다칼리프로부터권한을위임받아특정지역을지배하는무슬림지도자를지칭
하는칭호로사용되었다.
술탄이본격적으로이슬람제국최고통치자를의미하게된것은오스만투루크술탄중
비잔틴제국의영토를잠식,이슬람세력의확장을시작한무라드1세(1360-1389)
때부터였다.
이후여러오스만술탄들이칼리프의칭호를직,간접으로사용하면서술탄이이슬람
세계의최고통치권자로쓰여지게되었다.
오늘날에도오만,부르나이는정부형태로술탄제를유지하고있으며말레이시아,인도
네시아,필리핀의일부부족지도자들이술탄칭호를사용하고있다.
이스탄불의톱카피궁전(박물관)에가보면터키의역대술탄들이누렸던호화로움의
극치를볼수있다.
술탄의식탁에같은요리가두번오르면가차없이요리사를처형했다고한다.

1520년9월,
쉴레이만1세가술탄이된뒤,
그는하이드렛딘바르바로사를해군제독에임명하고북아프리카의지도자로천명했다.
그리스의레스보스섬태생인바르바로사(붉은수염이라는뜻)는본래규모가큰해적의
두목이었다.
그는술탄의환심을사기위해당시뒤떨어져있던오스만제국의해군체제를일신
했으며지중해의섬들을차례로공략,술탄에게충성을바쳤다.
원정에서돌아온바르바로사는,
금화40만닢,처녀1000명,미소년1500명을콘스탄티노불에풀었으며,
특별히술탄에게는별도로,
금은용기와값비싼비단,
터질듯금화를가득넣은,자수를놓은돈주머니를손에주렁주렁든,
주홍색옷차림의미소년400명을진상했다.
반대로말하면바르바로사의무자비한약탈이어느정도였는지를알게해주는기록
이기도하다.
중세지중해가그런시대였다.

모든왕조가비슷하지만,
왕좌를차지하기위한피비린내나는살육은오스만제국도마찬가지였다.
1512년메메드2세의장자인바예드2세의아들인셀림이반란을일으켜아버지를
권좌에서몰아내고오스만제국의제9대술탄이되었다.
(이점은김일성의심장발작때의료진의접근을차단,아버지를죽게한후권좌를
차지한김정일도마찬가지다.-JasperBecker의RogueRegime중.)
셀림1세(1470-1520)가된그는야부즈-Yavuz라는별명을가진냉열한으로서,
장차자기의자리를노릴수있는그의두형제와조카다섯을(그중에는5살밖에
안된어린조카도있었다.)한곳에몰아넣고활시위로목졸라살해하는것으로
치세를시작했다.
전해지는바에따르면그는그현장의옆방에서혈육이죽어가면서지르는비명
소리를들으면서매우흡족해했다고한다.
1520년9월,
그가죽은후왕위계승을위해샬려둔유일한아들쉴레이만이26세의나이로
오스만제국제10대술탄이된다.
지금그는이스탄불의쉴레이만사원에안장돼있다.

절대군주의잔인함은동서고금에큰차이가없다.
AD37-41년사이.
로마제3대황제였던칼리굴라-Caligula가그예일것이다.
그이본명은GaiusCaesarGermanicus.
즉위초에는민심수습책으로원로원,군대,민중의환영을받았다.
그러나점차자기가인간세상에온신(神)이라는망상에사로잡혔으며낭비와증여로
재정을파탄냈다.
게다가잔혹한독재정치를폈으며광포한행동을자행하기까지했다.
결국근위병의한장교에의해암살되었다.
그는황궁에공창(公娼)을차렸으며,
미소년들로하여금두명의누이를계속적으로능욕하게한것은물론,
무고한사람을톱으로자르는처참한광경을보면서점심식사를즐겼다고한다.
같은권력이라도누가그것을잡느냐에따라전혀다른세상이만들어지는것이다.
역사에는잔인하고무서운독재자들이수없이등장하는게그때문이다.

카톨릭교회의제111대교황인포르모수스-Formorsus는891-896년간재위했다.
로마출신인그는정치적영향력이큰주교로서교황요한8세로부터질시를받고
파문까지당한다.
교황이참혹하게죽은후마리노1세가교황이되었으며포르모수스는그를자기편으로
만들어파문당한기록과재판기록을없애고사면을받았다.
그리고891년스테파노5세에이어제111대교황으로선출된것이다.
그러나그가죽은후9개월만에,
제113대교황인스테파노6세(896-897)는로마교회회의를소집했으며포르모수스의
정적들은그의시체를파내어교황의옷을입힌후교황의자리에앉히고재판을
열었으며이재판으로그의교황즉위는무효화되었으며그가선포한법령들도
폐지되었다.
이것이그유명한’시체종교회의’인것이다.
한편,그가축성할때사용한3개의손가락은절단되었으며시체는버려진후테베강에
던져졌다.
제115대교황데오도르2세때그는다시복권되고시체역시제대로수습되었다.
이일로민심이동요되어폭동이일어났으며그를단죄한스테파노6세는교황직을
빼았기고감옥에갇힌후교살되었다.
인간의잔인성에는성(聖)과속(俗)이따로없다는생각을안할수없는사례이기도
하다.
그방법만바뀌었을뿐,
지금세상이라고크게달라진것도없을것이다.
나치즘과스탈린니즘이저지른죄악은그규모에서나죄질에서하나도다를게없다.
북쪽의김씨왕조도그참혹한죄상이낱낱이드러날날이다가오고있다.
같은민족이기에역사앞에서더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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