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서멀면마음에서도멀어진다.’
우리들에게전해진속담들을읽어보면선조들의그절묘한표현에감탄이절로나온다.
‘속담틀린데없다’는말도사실이다.
그건지어낸문장이아니라오랜경험을통해축적된지혜의말씀들이기때문이다.
피를나눈혈연,가족이라해도서로멀리,오래동안떨어져있으면매일얼굴을마주
대하는이웃보다멀리느껴지는게인지상정이다.
접촉은그렇게중요한것이다.
접촉(接觸)은다가가서닿는것이며,상대적으로서로닿는것이다.
그만큼직접적이고질감이높은관계다.
접촉이분명하고빈번하면그관계는그만큼튼튼해진다.
반대로접촉이모호하고불확실하고일시적이면돈독한관계는이루지못한다.
눈에서머니마음에서도멀어지는것이다.
기독교인은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인은크리스챤이다.
크리스챤은,크리스티아누스-Xristianous라는헬라어에그뿌리를두고있는말인데
그뜻은’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자’이다.
박해때문에예루살렘과유다를떠난초기의신자들에게’안디옥’사람들이처음으로
붙여준이름이기도하다.
그때의의미는아주긍정적인것이었다.
그리스도를’따르는자’라는것은,
그를알고,그의가르치심을공부하고,그의미를잘소화해서자기것으로하고,
그가르치심대로일상을사는것을의미하는의미심장한말이다.
예수를’그리스도’로신앙고백한다는의미가그것이다.
따라서믿고따르는신앙의대상인’예수’와의접촉은필수적이고절대적이고
합목적적이고,정상적이고일상적이어야한다.
이궤도를일탈할때광신과사이비,기복신앙인미신화가진행되며그렇게변질된
기독교는인간을구원하는것이아니라파멸로떨어지게한다.
근자한국개신교교회들의가장큰특징은각종이벤트와행사로오랜시간교인들을
교회에붙들어두려는행태다.
거의매일,하루종일’교회에가있는’엄마들때문에’방치되어있는애들’이그증거다.
개신교의성장이멈추고하향곡선을긋기시작하자이기적이고,탐욕적인목회자들이
생각해낸게여러가지세속적인이벤트와행사들이다.
심지어는길거리에서자기교회이름이적힌어깨띠를두른여자들이지나가는행인
에게커피까지제공하는’길거리세일’에나서고있다.
현관문에갖자붙이던’쪽지-찌라시’에서한단계더진화한타락인것이다.
그리스도인의생활고구원은,
결단코그렇게해서얻어지는것은아니다.
일찌기주께서는그무서운공적주의에대해엄중한경고를하신바있다.
물량(物量)은보이는세계의것이다.
그러나믿음과구원은보이지않는세계의것임을깨달아야한다.
바울이시종강력하게주장한내용이바로그것이다.
건전한신앙생활은,
합리적이고정상적인신앙생활은,
그리고우리를구원하는신앙생활은,
예수와의’접촉’에서결정된다.
그분이그리스도이기때문이다.
그리스도는’메시야’이며구세주라는뜻이다.
그렇다면가장중요한접촉은어떤것일까.
가장우선적인것은’예수’를제대로아는일이다.
하루종일교회에가서살아도’예수’를만나지못하면아무소용이없다.
지금대다수가그렇게살고있다.
예수를아는길은,
‘성경’밖에없다.
절대로다른길은없다.있다면거짓이다.
그것이아무리정교하게짜여진교리라해도,그건인간의해석이며신학자들의자기
주장일뿐이다.
그래서스스로’마가복음’부터읽어야한다.
마태,마가,누가의공관복음에서그원형은마가복음이다.
다음에읽어야할책이’갈라디아서’다.
마가복음이예수에대한원(元)자료라면,갈라디아서는그자료를신앙적으로설명
하고정리한최초의책이다.
성경을읽되,
가장최근의,지금의한국인이쉽게읽을수있는’번역’을선택해야한다.
그것은성경이글자로읽는책이아니라의미,내용,뜻으로읽는책이기때문이다.
신,구교합동으로번역한’공동번역성경’과’표준새번역개정판’이그런성경들이다.
다음은성경을읽되,
원시인처럼읽으라고권하고싶다.
그동안가지고있던모든선입관,토막토막읽으면서알게된반(半)지식,
설교를통해알게된해석들,또는책을통해공부했던단편적인편견들을다쏟아
버리고발가벗은자연인,원시인같은마음으로읽어야그깊은심연에다가갈수있다.
천천히,되풀이해서,밑줄을그어가며집중해서읽어야한다.
그내용중도저히받아들일수없는부분이나타나면건너뛰면된다.
성경이담고있는내용은절대적인것이지만성경책은부족한인간들이온갖실수들을
저지르면서손으로필사한인간의책이다.
개인적인체험으로,
마가복음16장의’예수부활’내용은과학의시대인현대를사는내겐받아들이기가
어려운부분이었다.
그래서나는’선택’의방법으로이문제를해결했다.
‘그리스도께서는여러분의죄때문에죽으셨읍니다.
죄없으신분이죄인들을위해서죽으신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죄를용서해주시고하나님에게도인도해주셨읍니다.
그리스도께서는몸으로는죽으셨지만영적으로는다시사셨읍니다.
이리하여그리스도께서는갇혀있는영혼들에게도가셔서기쁜소식을선포하셨읍니다.’
베드로전서3:18-19공동번역.
육체로는죽었지만그영으로는부활하셨다는이기사는시대적으로초기의열정적인
기록들을정화,정리한것이다.
마가가채집한”예수부활’의자료들은수많은신,우상들과경쟁해야하는새로운신,
예수에대한초대교회의열심이얼마나뜨거웠던것인가를이해해야넘어갈수있는
고개의하나다.
건너뛰면그다음에반드시그것을이해하고받아들일수있는순간이오는게성경읽기
이며성경공부다.
그묘미를깨달아알수있는수준까지가야비로서나라렛예수와접촉할수있다.
그리고그것이어떤기쁨인지를체험해야한다.
다음이명상이다.
시편의말씀처럼’주야로묵상’하는것이다.
복음서를통해알게된그분의가르치심,그말씀들을오래동안,깊이있게생각하고
또생각해야한다.
교회의각종이벤트와행사가무서운것은신앙생활에서가장중요한’명상의기회와
시간’을신앙적이라는이름으로빼았기때문이다.
성경은의미로읽는책이다.
그래서생각,명상,묵상은절대적이다.
명상은,주변이물리적으로조용해야가능한정신작업이다.
자기가자기를볼수있는절대의시간이그것이다.
모든비본질적인것들을털어낸조건이아니면’말씀에대한묵상’은불가능하다.
우리들현대인들은,
온갖소음속에서살고있다.
온갖현란하고,자극적인영상속에서산다.
크리스챤이텔리비젼을멀리해야하는가장중요한이유가그것이신앙생활을방해
하기때문이다.
스스로노력해서,일상안에서’조용한시간’을만드는것이우선이다.
그리고나사렛예수의말씀을자기입으로소리를내어읽고자기귀로들어보라.
전혀딴세상이거기에있다.
깊은명상을통해나사렛예수의말씀을이해하고,그깊은내용을깨달았다면
그다음은그가르치심에동의해야한다.
말하자면그말씀을자기것으로소화,수용하는것이다.
이단계가내면화-內面化다.
신앙의심지가박히는것이다.
한국개신교교인들에게가장,결정적으로부족한게이단계다.
그것은개인의철학이나신념이상의것이다.
비로서’종교인’이되는것이다.
그리고이어지는접촉이’기도’다.
기도는그분과의대화다.
신앙생활에서기도는그것을지탱하고발전시키는기둥이다.
무슬림들이하루다섯번메카를향해엎드려기도하는것은형식이상의깊은뜻이있다.
신앙고백없이기도는없다.
기도없이는신앙의성장도없다.
찬양,감사,회개,간구의큰틀이기도의대표적인형식이다.
그러나개인의은밀한기도에는틀이필요없다.
그분과나누는그은밀한대화에형식이무슨필요가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사렛예수와의가장큰접촉은무엇일까.
가장극적이고확실한접촉은어떤것일까.
내가그분을만져볼수있는접촉은어떤것일까.
‘너희는내가굶주렸을때에먹을것을주었고,
목말라할때마실것을주었으며,
헐벗었을때입을것을주었고,병들었을때돌보아주었고,
감옥에갇혔을때찾아주었다.’
그때의인들이물어봤다.
‘언제우리가주님에게그렇게해드렸읍니까.’
‘나는분명히말한다.
너희가여기있는형제중에가장보잘것없는사람하나에게해준것이바로내게
해준것이다.’
마태25:35-40.공동번역.
주께서우리에게주신가장큰계명이무엇인가.
‘네하나님을정성을다해사랑하고,
네이웃을네몸과같이사랑하라’는것이다.
더직접적으로,쉽게말하자면,
‘신앙의실천’이그것이다.
한국의개신교가죽은것은,
한국의크리스챤이죽은교인이된것은.
실천하는신앙이없기때문이다.
일찌기고김옥길총장이한말이있다.
‘그게무엇이든일상에없는것은거짓이다.’
행함이없는신앙은그래서거짓신앙이다.
축복과은사를쫓아다니는것은가장미신적이고이기적인샤마니즘이다.
거기에서어떻게아가페-agape의행하는믿음이나올수있겠는가.
샤머니즘은그원천에서’사랑’이없다.
바닷물에는단지2.3%의소금이포함돼있을뿐이다.
그러나그적은양이그큰바다를짠물이되게한다.
국민의20%가넘는다는,5만교회천만신자가’맹물’이된것은그안에예수와접촉
하는내용이없기때문이다.
제몸불리기에급급해하는동안예수와는아무런관계도없는’이기적인인간집단’이
된것이다.
2.3%만이라도소금의짠맛을가지고있다면지금의우리사회가이렇게황폐해지지는
않았을것이다.
가장필요한시기에종교의기능이완전히죽어버린게오늘의우리사회다.
우리들은아씨시의프란시스코를성자라고부른다.
우리들은테레사수녀를성녀라고부른다.
세속의세상에서도’노벨상’으로그녀를기리고있다.
아주작은,쪼그라든이할머니의어디에서그렇게위대한힘이나온것일까.
그녀는평생을통해매일자기앞에계신예수를직접자기손으로만지면서살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