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신 말씀.
옛날에현자(賢者)한분이계셨다.
그의놀라운가르침은사람들을감동시켰으며그소문은널리퍼져그의주변엔
수많은사람들이모여들었다.
시간이지나면서더많은사람들을수용하고가르치기위해건물이지어졌고,
강론(講論)도시간표에따라행해졌다.
그현자에게는오래동안기르고있는고양이한마리가있었는데강론시간이면
사람들사이를휘젓고다니기도하고현자의주변을돌아다니기도해서크게방해가
되었다.
사람들은궁리끝에현자의강론이있는동안그고양이를현자의가까이에있는
기둥에묶어두기로했다.
오랜시일이지난후,
그현자는교주가되었고그가르침은하나의종교를이루었다.
몇세대가지난후그의후계자들이대를이어지혜의말씀을가르쳤고강론시간은
형식을갖춘예배시간이되었다.
놀라운것은,
그현자의후계자들이강론하는그시간,
가까이에있는기둥에는고양이가묶여있는것이다.
처음,기둥에묶였던고양이는하나의전승이되어형식이된것이다.
종교와그내용,그리고형식의관계가그러하다.

무릇세상의모든일은형식이라는그릇이없으면내용을담을수가없다.
그렇게형식과내용은뗄수없는관계에있는것이며,
내용이승하면형식이위축되고,반대로형식이승하면내용이변질된다.
종교의경우이런현상이심한편이며세월이흐르면형식이내용을완전히잠식
하는경우가생긴다.
여러종교안에있는무서운근본주의가그것이다.
안식일이기때문에수도꼭지도잠그지못하고,전등의스위치도돌려끄지못하는
오늘의유대교가그러하며,
테러리즘으로수많은무고한인명을살상하는이슬람의잘못된근본주의가
그러하다.
축자영감설을고집하고,창조론에집착하는개신교의모습도별로다를게없는
근본주의다.
종교의극단적인형식화-근본주의는그래서아주무섭다.
주께서는이런형식화에대해대단히격열한어조로경고하신바있다.
‘사람이안식일을위해있는것이아니라안식일이사람을위해있는것이다.’

나는아테네에서희랍정교회의서서드리는예배에참석해봤으며,
모스크바에서러시아정교회의예배에참석해봤다.
빠리의로테르담성당과서울에있는성당에서여러번미사에도참석해봤다.
나는장로교집안에서태어난크리스챤이다.
서로다른예배형식.
서로다른건축양식과성직자들의복장,
서로다른번역성경과교회용어들,
그리고역사적으로서로반목했던모든일들은‘인간’때문에비롯된것이다.
한분예수,하나의성경에서이렇게서로다른‘기독교’가생긴것은전적으로
부족한인간들때문이다.
초대교회이후크게갈라지기전까지의기독교는
‘catholicchurch-보편적인하나의교회’였다.
희랍정교회,로마카톨릭,러시아정교회,성공회,프로테스탄트교회는인간들때문에
쪼개진‘보편적인하나의교회’가찢어진이름들이다.
점점더벌어지고있는각자의형식은기독교의신앙적인‘내용’을능가하는
변질을초래하고말았다.

성경말씀앞에서더정직해진다면,
지금의주일오전예배들,
찬양예배와수요예배,
금요금식기도회와철야기도회.
그리고새벽기도회는성경에는없는형식들이다.
대부분의직분과교리등도성경에는없다.
‘안식일’은,
금요일일몰부터토요일일몰까지임으로주일과는무관한샘족의종교일과일
뿐이다.
지금상당수의개신교교회들은보통날도주부들을예배당에붙들어두고있다.
때문에어린애들이집밖에서배회하고있다.
물리적으로예배당에오래있는것과구원은무관한것이다.
그건경계해야할공적주의일뿐이다.
시장어귀에서자기의선행을자랑하는사악한부자에대해주께서어떤말씀을
하셨는가.

우리가종교를가지고신앙생활을하는것은,
‘구원’받기위해서다.
그런데도그렇게중요한‘구원’에대해제대로,신학적으로맞는대답을할수있는
교인은거의없다.
하나님이주시는복,기복에는그렇게열심인교인들이‘은혜’와‘구원’에대해
올바른설명을못하는것은신앙교육이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내용이빈약한신앙을가지게된것이다.
교회는‘상식’과함께‘신앙’에대해서도교인들을성경내용대로교육해야한다.
주께서는자기에게나아와가르침받기를원하는사람들을위해복음서안에만
60개가넘는예화를남기셨다.
그하나하나가주옥같은가르침을담고있다.
그분은정말훌륭한교사이기도했다.
그래서예나지금이나,그리고앞으로도기독교의핵심은가르치심-말씀인것이다.
그말씀이성경책이다.

말씀이우리들을구원하시는방편이라면,
우리와그말씀은어떤관계에있는것인가.
이제하나의경우를살펴보자.
‘하나님의말씀은살아있고,
힘이있으며어떤쌍날칼보다도더날카롭습니다.
그래서사람의마음을꿰뚫어영혼과정신을갈라놓고관절과골수를쪼개어
그마음속에품은생각과속셈을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하나님앞에드러나지않는것은없습니다.
하나님의눈앞에는모든것이다벌거숭이로드러나게마련입니다.
언젠가는우리도그분앞에서심판을받아야합니다.‘
히브리서4:12-13.
살아있는것은기능(機能)이있다.
거기에힘까지실리면그기능은참으로막강한것이된다.
‘마케도니아의긴창이로마의단검에졌다’는서양속담이있다.
회전반경이큰긴창사이로파고든로마병사의쌍날칼은그렇게무서웠다.
그칼,말씀의기능,힘이우리를산산조각낸다는뜻이다.
그게살아있는말씀이기때문이다.

구원받기위한참신앙생활이라면우리는그날카로운,살아계신말씀앞에매일
서야한다.
살아있는것은곧‘일상적-日常的’이라는뜻이다.
예배당의문이경계가되어그안과밖의생활이서로다르다면,
그사람은말씀앞에서있는것이아니다.
한국개신교의핵심적인문제가그것이다.
‘살아계신말씀’은없고,
인간의인간적인욕심과허영심,탐욕으로만든껍데기-왜곡된형식에매달려
그게신앙생활인줄알고있다.
60-70년대의압축성장이몰고온물량주의가질적으로변환되지못한채지금까지
교회를잠식하고있다.
그리고시간이흐르면서교회를딴것이되게했다.
살아계신말씀도,인간이그말씀앞에서지않으면아무의미도없다.
이는,종교자체는변할수없지만인간에의해그껍데기가못쓰게되는것과같은
이치다.
기독교2천년역사가그걸증명하고있다.

우리모두는생존하기위해매일음식을먹는다.
똑같이정신적존재이기도한인간은‘정신의양식’도필수적이다.
특히신앙생활을영위하는인간에게는‘철학’이상의양식이필요하다.
그래서그것을‘영의양식’이라고부른다.
비록성경책자체는오래동안의필사과정을거치면서수많은오류를가지고있다
해도근본,그의미-뜻에서는완전하고절대적인‘살아있는말씀’이다.
우리는그것을‘하나님의말씀’이라고부른다.
영의양식을먹지않는것,
성경을읽지않는생활에서어떻게구원이기대될수있겠는가.
지금은성경을읽지않는크리스챤들로넘쳐나는세상이다.
모두가사이비들인것이다.
그래서그들은가짜다.
사실은자기들이가짜인줄도모르는가짜들이다.

살아계신말씀앞에서,
산산조각이나지않고는크리스챤이될수없다.
중생-重生,거듭난다는게그뜻이다.
회개는그방향을180도바꾸는것이다.
이게쉬운일인가.
거개가걸려넘어져일어나지도못한다.
교회는출석을부르지않는다.
교회,에클레시아는본래‘부르심을받은사람들’이기때문이다.
전혀강제가없는곳이다.
처음부터끝까지자발적이지않으면안된다.
자발적이무엇인가.
스스로결단했다는뜻이다.
스스로살아있는기능-그힘앞에나아가산산조각으로부서진사람들이,그래서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자들이된것이다.
지금은모두가너무나쉽게자기를크리스챤이라부른다.
전혀크리스챤이아닌사람들이자기를크리스챤이라고부르는기만의시대에
우리가살고있다.
교회가변질되고타락했기때문이다.

갈릴리나사렛은,
너무나변방에위치한가난한시골이었기에나사렛예수는인간적으로도
유대인들의멸시를받았다.
그런데,
그나사렛청년의가르침은2천여년동안이어져내려왔으며지금은지구인구의
33%,22억여명이그분을‘주님’이라고고백하고있다.
어떻게이런일이가능했던것일까.
대답은하나밖에없다.
그가르치심-말씀이‘살아있었기’때문이다.
장구한시간과드넓은공간을뛰어넘는‘진리’가그안에있었기때문이다.
어리석고무지한인간들에의해교회는수도없이갈라졌지만‘살아계신말씀’은
오직하나였기에가능한일이었다.
우리가진정구원받기를염원한다면그말씀앞에서야한다.
성경을읽는게그일이다.
신앙생활에서‘살아계신말씀’을읽는일보다더중요한것은단연코없다.
나머지는모두가내용을위한형식일뿐이다.
그래서형식은언제나최소한이어야한다.
우리를구원하는것은‘살아계신말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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