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넓고커서그끝이없다는뜻이다.
광대무변한우주공간이그런예다.
우리가살고있는이은하계(銀河界)는약1000억개의별들로이루어져있다.
태양은그중한개의별에지나지않으며지구는태양이거느린행성의하나일
뿐이다.
우주에는우리와같은은하계,별무리가수십억개있다.
정말‘광대무변’이라고표현할수밖에없다.
오늘을살고있는‘현대인’인우리들은매일수많은‘모니터’들을들여다보면서
생활하고있다.
보통그모니터들의크기를일컬어‘손바닥만하다’고말한다.
광대무변과는완전히반대의개념이다.
그쥐구멍같은,손바닥만한모니터들을들여다보면서생활하는동안현대인인
우리들은스스로깨닫지도못하는사이에왜소(矮小)해지고있다.
시야도좁아지고,그래서보는게한정돼있으니생각의크기도작아진다.
사고방식도단순해지고복잡하고어려운문제는회피하려는소극적인인간이된다.
인터넷네트워크에서인간은어쩔수없이주체의자리를자꾸내주고있으며
부품화(部品化)되고있다.
진화된컴퓨터시스템이오히려인간을조정하는것은결코SF영화속의얘기만은
아닐것이다.
시나이반도의사막,
밤하늘에보이는달과별들은전혀다른것들이다.
그달은,금방물에서건져널어놓은것처럼밝고,투명하고,크게보인다.
별들은눈앞에서쏟아져내릴것처럼가깝게보인다.
공기가더없이맑기때문이다.
그우주는,도시에서는볼수없는광대무변한장관이다.
모래에드러누워올려다보는밤하늘은왜소해진인간을다시늘려놓는다.
본래의모습이되게해주는것이다.
건축가한분이이런얘기를했다.
자기는아파트를설계할때지하주차장에서바로집으로갈수없도록한다는
것이다.
차를세우고밖으로나와마당을질러가며밤하늘을볼수있도록배려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사람은밤하늘을봐야하는존재라는게그의주장이다.
우리는본래가자연에서온존재들이다.
자연에서너무멀리,오래떨어져있으면별질될수밖에없다.
그래서밤하늘의달과별들을봐야한다.
그렇게치유하지않으면부품(部品)이되고만다.
근본주의-根本主義.
17세기.
북아일랜드의아마주(州)대주교이며아일랜드전국수석대주교인
제임스어셔(JamesUsher)는,
참으로놀라운계산을내놨다.
그는,세계가창조된날이기원전4004년10월3일일요일이라고계산했다.
어셔주교의이런단정은1701년에발행된흠정역성경에포함되어성서적
진리로간주되었다.
더나아가어셔는아담과이브는기원전4004년11월11일월요일에낙원에서
쫓겨났다고단정했으며노아의방주는기원전1491년5월5일아라랏드산에
도착했는데그날은수요일이었다고했다.
창조론과진화론이부딪치는것은종교와과학을구분하고분리하지못하기
때문이다.
종교가얘기하는것은과학이아니며과학역시종교를설명하지못한다.
사실찰스다윈은있는그대로의자연에접근한최초의인간이라고할수있다.
종교가배제됨으로서종(種)의진화가과학적으로설명된것이다.
과학이인간의동물적조건을얘기한다면종교는영(靈)의영역이다.
그둘은,너무나다른차원의문제이기에하나의‘틀’속에함께있을수가없다.
종교에서,신앙에서근본주의가무서운것은제임스어셔가잘보여주고있다.
성경은인간의‘의미’에대해기록된책이기때문에과학적인시간을도출해
낼수있는자료는될수없다.
성경에서물리적시간을도출해낼수있다고믿는것이바로근본주의신앙이다.
이슬람의테러리즘도근본주의신앙에그뿌리는두고있는게그런것이다.
종교적신앙에서근본주의가무서운것은인간의영적세계를도그마로제한
하기때문이다.
이상한것은언제나,어디서나근본주의자들이존재하나다는사실이다.
그리고그들은태생적이기때문에교정되지않는다.
그래서더두려운존재들이다.
아날로그의세계.
프랑스인‘베르나르올리비에’는,
직장에서은퇴한후60의나이에터키의이스탄불에서중국의시안(西安)까지의
옛‘실크로드’를3년에걸쳐걸어서주파한사람이다.
그리고그가쓴책이‘나는걷는다’다.
그책은3권으로서정말방대한분량이다.
‘자크리옹’이라는평범한프랑스인은,
이방대한책을녹음했다.
리발의도서관‘자원봉사자’인그는시각장애인들을위해이힘든작업을해낸
것이다.
앞을보지못하는어떤부인은,
자크리옹이읽어녹음한‘나는걷는다’를다들은후,
손으로만져보고,몸으로느끼기위해읽을수도없는그책을샀다.
이얘기를전해들은‘베르나르올리비에’는너무나감격해서눈물을흘렸다고
한다.
귀로만들은이야기를,
손으로만지고,몸으로느끼는것은아날로그의세계다.
디지털의기계적기능에서는찾을수없는인간의따뜻함이그안에있는것이다.
지금우리모두는디지털의시스템없이는일상을살수가없다.
그러난그디지털의세계에는온기(溫氣)가없다.
그래서우리가정서적인인간으로남기위해서는아날로그를버리면안된다.
인간관계의‘인간적근본’은아날로그속에존재하기때문이다.
어머니의사랑을,디지털은계수화하지못한다.
그러나아날로그의세계는그위대한사랑을손에잡히듯느끼게해준다.
디지털의놀라운기능을유용하게쓰면서도아날로그의세계를향유하는게
인간의지혜가아니겠는가.
1970년대초,
디지털손목시계가등장했고,곧모두가그손목시계를찼었다.
그런데지금,거의모든사람들은아날로그손목시계를차고있다.
시간이점(點)이아니라선(線)으로서연속성을가진다는것을깨달았기때문
이다.
결국디지털과아날로그는‘균형’의문제다.
두가지는모두우리들에게필요한방편들이다.
너무디지털에치우치고있는‘현실’을보면서걱정이앞서는것도사실이다.
자칫인간적으로매마르게되어각박한일상을살수도있기때문이다.
업보-業報.
업보는불교용어로서,
전세(前世)의악한짓에대한죄값이란뜻이다.
학승이신법정스님의법문집2권에이런대목이있다.
‘한국사람들은앞으로물질적으로가난하게살것입니다.
이점은제가확신합니다.
왜냐하면음식을너무많이버리기때문입니다.
제가일본에서느낀것인데일본이잘사는데는여러가지요인이있었겠지만
음식을전혀버리지않습니다.
음식에대한고마움을절실히느끼고있습니다.
음식뿐아니라자원을아끼는것이생활화되어있습니다.
불교의영향일것입니다.
똑같은불교를믿으면서도한국의불교도들은절과가정할것없이너무많이
버립니다.‘
통계에의하면한해에버려지는음식이적게잡아도8조원정도가된다고한다.
무서운일이아닐수없다.
오래전,
이스라엘의최남단항구도시인‘에일랏’에서겪었던일이다.
마침점심시간이되어어떤식당에서식사를하게되었는데,
바로옆자리에는10대의미국인소년들이식사하고있었다.
나보다먼저식사를끝내고떠난그들의식탁을봤을때마음속깊은곳에서끌어
오르는‘분노’를느꼈었다.
너무나많은음식이남아있었으며모두가포크와나이프로헤집어놓은,버려진
음식이었다.
그때,나는머지않아미국인들은배가고플때가올것이라는확신을가졌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이후,
지금미국서민6명중1명은국가가주는식품권으로생활하고있으며,
주택답보대출을제때상환하지못해280만가구가압류통보를받았다.
이는45가구중1가구꼴로경매처분이나소유권이채권은행으로이전된다는
뜻이다.
지금미국은국채(國債)를계속외국에매각해나라살림을꾸려가고있는처지다.
미국은지난해9월부터1년동안1조4000억달러의재정적자를기록했고,누적
적자는미국GDP의80%에육박하고있다.
2009년9월현재,중국은미국의국채7989억달러를보유하고있다.
우리음식점의경우,
손님들이일어선밥상을보면,더이상난잡할수없는동물적수준이다.
정말엄청난음식이버려지고있는것이다.
스님의지적이아니더라도상식적인사람이라면두려움을느낄것이다.
절약과검소는,
가정교육이가장중요하다.
‘좋은집안’은가정교육이살아있는집안이다.
그런집안에서출중한인물이배출되는법이다.
공포의힘.
공포(恐怖)는무서움이며장차고통이나재앙을받을것이라고생각할때
일어나는정서적인반응이기도하다.
공포는인간을죽음에까지이르게하는힘을가지고있다.
기병(騎兵)은.
말에서떨어지면즉시다시올라타야하는엄격한규칙이있다.
그렇지않으면어느새공포가자리잡기때문이라고한다.
일단공포에사로잡히면다시말을탈수가없게된다.
공포는인간을옥조이는악의힘이기도하다.
실제로암환자의20%는암이아니라영양실조때문에죽는다고한다.
죽음에대한공포가식욕까지앗아가기때문이다.
진수성찬도소태맛이되면먹을수가없다.
그러니영양실조에걸리는것은당연한일이고이는암과싸워야할체력을얻지
못하는결과로이어져죽음에이르는것이다.
공포를느끼지않는사람은없다.
그러나그반응은서로다르다.
인간에게는공포를극복하는길이있기때문이다.
인간은그영적(靈的)인능력으로동물적조건을극복하는존재다.
철학의세계가그러하며,종교와신앙의세계가그렇다.
우리모두는분명히‘첨단과학의시대’를살고있다.
그러나그어떤과학도공포를이기지는못한다.
그건과학의분야가아니기때문이다.
광대무변한우주의아름다운밤하늘을볼수있는건인간뿐이다.
그것을의미있게보는사람과그렇지못한사람이있을뿐이다.
손바닥만한모니터에서고개를들고,
광대무변한밤하늘의달과별들을보자.
그리고마음을열고하늘처럼넓고큰생각을해보자.
그게본래의우리들이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