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가살아나는것이부활이고그것은공포의대상인죽음을극복했다는
뜻이기도하다.
공관복음의하나인누가복음24장에는,
부활한예수가제자들에게나타나
‘내손과발을보라,
틀림없이나다.자,만져보아라유령은뼈와살이없지만보다시피나에게는있지
않느냐,하면서자기의손과발을보여줬다.‘는기사가있다.
예수는육체로부활했고,그부활한예수가제자들에게나타난이기사는
복음서들이채택한중요한전승이다.
제4복음서인요한복음20장에는‘의심많은도마’의유명한얘기도있다.
이런기사들의공통점은예수가육신으로부활했고자기를사람들에게드러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예수의부활에는‘증인들’이있다는강조인것이다.
초대공동체에서예수의부활사건과그증거는호교론적입장에서도절실한것이었다.
복음서가기록된시기는과학이전의‘신화’의시대다.
2000여년전의그기록들을글자그대로믿는현대인은없다고말할수있다.
과학과이성은죽은자가살아날수없다는사실을객관적,과학적논리로설명한다.
기독교신자라해도‘교리’가부활을말하기때문에‘믿는다’고하는것이지,
자기가체험한사실은아니다.
믿는다고생각하는것과정말믿는것은전혀다른문제다.
특히첨단과학의시대를살고있는현대인들에게‘부활’의문제는오직‘신화’일수도
있다.
종교의비신화화,신화를걷어낸인간예수에접근하려는모든신학적시도는그래서
현실적이다.
이미상당수의신학자들이복음서의서지학적비판을통해인간예수에게더가깝게
접근한많은결실도얻고있다.
현대인은,자기가살고있는지금의‘삶의자리’에서부활을해석하고새로운의미를
부여하는과제를가진다고말할수있다.
특히현대를사는크리스챤들에게더그렇다.
우선생각해야하는상황은,
복음서에기록된부활기사들은그복음서를기록한저자들이직접체험한사실이
아니라는점이다.
그것은십자가사건이후두세대가지난시점에서채택된전승부분들인것이다.
입에서입으로전해져내려온수많은부활이야기중채택된일부분일뿐이다.
성경의정경에대해외경과위경의숫자가더많은것은예수에대한‘이야기’가
수도없이많았다는반증이다.
성대적으로복음서에채택된전승들이더신빙성이있는것은사실이지만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아무도알수없다.
같은뼈대의이야기가복음서마다어순이나표현,환경에서분명한차이를가지는
것을보면전승이가지는진위의문제가간단한것이아님을알수있다.
무엇보다중요한것은복음서저자들이체험한부활이아니라이야기로들어서
아는부활에대해기록했다는점이다.
신앙에서체험은대단히중요한조건이된다.
특히영적체험이더그러하다.
한편,영적인희열과광신은사실상종이한장차이이기도하다.
어떤경우에도부활의문제는성경밖에서말해지면안된다.
그건전적으로성경이전하는사건이며성경안에설명이있는사건이기에그렇다.
사도바울이중요한것이그때문이다.
바울은복음서의저자들보다훨씬앞서서여러가지‘기록’들을남긴기독교의
창시자다.
특히그의기록들은전승이아니라모두가자기가겪었던,온몸과마음으로
체험한사건들이다.
그래서그의기록들은시기와내용,그질에서단연코복음서들에크게앞선다.
바울의극적인체험을이해하기위해서는먼저그가어떤인간이었는지를반드시
알아야한다.
그래야그의‘전향-회심-메타노이아’를이해할수있다.
바울이빌립보교회에보낸편지(3장)에서그는자기가누군지를소개한다.
‘나는이스라엘백성들가운데서도베냐민지파에서태어났으며
난지여드레만에할례를받았고,히브리사람중에히브리사람입니다.
나는율법으로말하면바리사이파사람이며열성으로말하면교회를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지킴으로서올바른사람으로인정받는다면나는조금도흠이없는사람
입니다.
바울의자기소개는,
그가당시로서는표준에가까운,완전한유대인이라는것이다.
사두개,엣세내와함께유대교3대종파의하나인바리새파는‘모세의율법’에
관한한최고의열정과독보적해석을통해그권위를가지고있었다.
그래서그들은‘랍비’인것이다.
그런데,
바울은이모든유리한유대인의조건들을‘그리스도’를위해‘배설물’처럼
버렸다고했다.
대신그가바라는것은그리스도를아는것이며,
그의부활의능력을깨닫고,
그리스도와고난을나누고함께죽는것이었다.
그리고마침내죽은자들가운데서살아나는-부활하는것이었다.
고린도교회에보낸편지(15장)에서바울은복음서기자들과는전혀다른얘기를한다.
예수의부활에대해바울은이렇게말한다.
‘성서에기록된대로(여기서는구약)예수는무덤에묻힌후사흘만에부활했으며
먼저베드로에게나타났으며,
뒤에열두사도에게도나타나셨다.
또한번은오백명이넘는교우들에게나타났는데그중에는이미세상을떠난
사람도있지만대다수는아직도살아있다.
그뒤에야고보에게나타났고,
마지막으로팔삭둥이같은내게도나타나셨다.‘
바울의이이야기는오래전부터전해내려온전승이아니라자기가겪고,체험한
사실을말하고있는것이다.
분명히바울은자기에게부활한예수가‘나타나셨다’고말한다.
따라서바울이겪은‘예수와의만남,-조우’를알면나타난다는것이어떤것인지를
알수있게된다.
바울의기록이중대한의미를가지는이유가그것이다.
우리가이미아는대로복음서의하나인누가복음을기록한누가는바울의가장
가까운제자다.
그는해방노예이며의사였다.
(당시의사는천한직업으로여겨노예들이담당했다.)
디모데후서4장에보면모두가바울을떠났지만누가만은바울곁을지키고있었다.
사도행전은그누가가대신쓴바울의‘기록’인셈이다.
사도행전9장에는부활하신예수가‘나타나는’주목할만한내용이기록돼있다.
말하자면예수가바울에게나타나는‘방법’이기록된것이다.
그것은두세대가지난다음의전승이아니라바울본인이겪은,체험의기록이다.
사울(바울이회개하기전이름)은,
대제사장에게가서공문을받아쥐고그리스도를믿는사람들을체포,예루살렘
으로압송하기위해다마스커스로가게된다.
그일행이다마스커스에가까이이르렀을때,
갑자기하늘에서빛이번쩍이며사울의둘레를환히비추었다.
사울이땅에엎드리자‘사울아,사울아네가왜나를핍박하느냐’하는음성이들려
왔다.
사울이‘당신은누구십니까’하고물으니
‘나는네가박해하는예수다.’
사울과동행하던사람들에게도그음성은들렸지만아무것도보이지않았다.
이기록은누가의창작도아니고누가가채집한전승도아니다.
바울의생생한자기고백-자기체험의기록인것이다.
부활하신예수의‘나타나심’은빛과음성이었다.
못자욱이있는손과발을보여주는복음서의예수가아닌것이다.
‘전승’은선택적일수있지만바울본인이체험한얘기는절대적이다.
그가정말빛과음성으로나타난예수를만났기때문이다.
바울의그체험은너무나직접적이고강열한것이어서사울이가졌던유대인
으로서의최고의조건들을‘배설물’처럼버리는계기가된것이다.
이후사울(큰사람)은바울(작은자)이되어‘그리스도’를전하는일에
전념했으며그의복음을위해온갖고난을겪은후그생명까지도예수에게
바쳤다.
결과적으로그는기독교의창시자가된것이다.
그나타나심-조우-만남은바울이라는한인간을전혀다른인간이되게하는
능력의만남이었다.
지금예수는그누구에게도자기의부활한모습을드러내지않는다.
복음서의기록대로승천했기때문이다.
그러나예수는지금도빛과음성으로사람들에게나타나신다.
기독교역사에서빛과음성으로예수를만난사람들은많다.
놀라운영적체험을한사람들이다.
그리고그런사람들은지금도,앞으로도계속해서나타날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지금도그영으로서우리들과함께계시기때문이다.
베드로전서3장18절에는,
그가지금도우리와함께계시는존재임을설명하고있다.
‘그리스도께서는몸으로는죽으셨지만영적으로는다시사셨습니다.’
그래서다마크커스에서사울에게나타난예수가그예수인것이다.
빛과음성으로나타난분이바로그분이시다.
신앙과구원은철저히개인적인문제다.
신,구교도,교단도,교리도어쩌지못하는
‘하나님앞에서의개인의문제’다.
부활에대한신,불신도개인의문제다.
이미언급한대로,
부활은성경안에서만말해져야한다.
그래서그안에서선택적일수있다.
복음서기자들이채집한‘전승’보다는바울의체험적증언을선택할수있는
이유가그것이다.
영으로부활하신분이라면영으로우리에게다가오실것이다.
어찌빛과음성뿐이겠는가.
우리들로서는상상도할수없는방법으로우리에게다가오시는분이다.
이성이끝나는곳에서종교가시작되는것은그세계의불가사의함때문이다.
과학적으로설명할수없는세계는얼마든지있다.
그중하나가신앙의세계다.
교단도,교회라는조직도,교리도그세계를다설명하지는못한다.
그세계는예수를만나야하는신비한세계다.
바울에게나타나셨던그분은오늘우리에게도나타나실수있는분이다.
부활은악-죽음이선-생명을이길수없다는사실을극적으로보여준사건이다.
바울은말한다.
‘만일죽은자들이살아나는일이없다면그리스도께서도다시살아나실수
없었을것입니다.‘(고전15:16)
‘우리들도육체적인몸으로묻히지만영적인몸으로다시살아납니다.육체적인
몸이있다면영적인몸도있습니다.‘(44)
somapneumatikon-spiritualbody가그것이다.
입을다물고,예수의말씀을실천하면서사는진정한크리스챤이라면그게누구든
영적인몸을입고그분을만날것이다.
마라나타-maranatha.
주께서임하신다.
우리의주여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