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기독교.
기독교라는종교를이해하기위해서는,
기독교라는보이는조직의구성요소인‘기독교인-크리스챤-그리스도인’을먼저
설명하는방법이있다.
특히한국의기독교-개신교를제대로알기위해서는통칭인구의25%를점하고있는
‘명목교인’인그리스도인들을살펴보는것이순서일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명칭은‘크리스챤’에서왔으며,
크리스챤은‘크리스티아누스’에서유래했다.
스테판의순교후예루살렘에서의초대교회에대한박해가심해지자상당수의교인들
이북쪽으로500여킬로떨어진수리아안디옥으로피난했다.
지금터키의‘안타키아’가그곳이다.
이곳에는세계최대의모자이크박물관이있기도하다.
시내에서멀리보이는바위산에는베드로,바나바,바울이예배를인도하던동굴교회가
지금도남아있다.
의자에앉으면50명정도수용할수있는작은규모다.
강단뒤로는비상시탈출할수있는좁고긴동굴터널이만들어져있기도하다.
이동굴교회에들어서서흰돌로만든강대를바라보면바울과베드로의음성이
들리는것같다.

안디옥주민들은갑자가자기들고장에나타난이상한유대인들을처음으로
‘크리스티아누스’라고불렀다.
Xristianous-Christian-그리스도인이그것이다.
신약성경사도행전11장26절에보면,
‘이때부터안디옥에있는제자(신도)들이처음으로그리스도인이라불리게되었다.’
고기록돼있다.
원문에는mathetasxristianous라고기록돼있는데,제자또는신도로번역된
단어가바로mathetas다.
이단어는‘그리스도인’을설명해주는중요한의미를가지고있다.
그리스도인들이예수를주(主)라고부르는것은그에게속한다는의미다.
다음이그리스도예수를머리로하는사람들이라는의미가있다.
언제나그분이가장우선인것이다.
더중요한뜻은‘그리스도를따르는자’이다.
따른다는것은그의가르침을올바로이해하고그말씀에따라사는것이다.
기독교신앙생활에서‘성경’을읽고공부하는일이가장중요한것은그분,주님으로
신앙고백하는분을제대로알고,따르기위해서필수적인조건이되기때문이다.
따라서성경을제대로읽지않는다면엄격한의미에서그리스도인이될수는없다.

한편,종교로서의기독교에대해사전적으로설명할수도있다.
AD1세기에예수그리스도에의해창시된계시종교로서불교,이슬람교와함께
세계3대종교중하나다.
Christianity라는명칭은‘크리스티아누스’라는헬라어에서유래했으며그의미는
‘그리스도를따르는사람’이다.
따라서기독교의기점과근거는예수그리스도이며그를하나님의아들이며
이세상의구원자(메시아)로믿는것을신앙의근본교의로삼고있다.
기독교에는교파간의신앙,의식,조직,제도의차이가있으나전체적으로그
근본적인입장은하나님의아들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으로구원을얻는다는
데서일치를보이고있다.
이것은어떤기독교이든처음부터오늘에이르기까지변함이없다.
로마카톨릭교회,정교회,개신교,성공회등의교파는처음의교회인‘보편적교회
-CatholicChurch’에서분리된종파들이다.
그이유는대단히복잡하지만근본적으로는성경을‘해석’하는입장의차이가
컸기때문이다.
지금은이대표적인교파들이‘기독교의일치’를위해그어느때보다도열심히
노력하고있다.

우리나라는전통적으로‘밖에서들어온것’은그게무엇이든극단화하는경향이
심한편이다.
북한의사이비사회주의와스탈린주의가극단화한것도하나의사례다.
따라서외래종교역시예외일수없다.
종교의극단화는그종교가가지고있는신앙적본질이한국인의‘요구’에의해
토착화하는과정에서전혀딴것이되는특징이있다.
결국은껍데기만남고그속은전혀다른것이되는‘역세속화’가일어나는것이다.
천주교를기준할때,
기독교전래는200년이조금넘는외래종교이며,
개신교는100년이조금넘었다.
로마카톨릭교회-천주교의경우,‘미사’라는예배형식의‘엄격성’과성직자의
분명한‘위계’로변질을억제하는구조적측면이강하다.
이에비해개신교는‘개교회중심-개교회주의’가원칙이고예배형식보다는
‘말씀선포-설교’가중심이기때문에대단히가변적일수있다.
목회자의수준,질,개인적취향에따라같은개신교회라해도천차만별의차이가
나는게그이유다.
영적인희열과광신은정말종이한장차이라고한다.
자기것의‘무게’가가벼울수록딴것이될가능성은그만큼크게열려있는것이며
한국의개신교가특히그렇다.

신앙내용의변질을학문적으로설명한다는것은‘전문적’인작업이되지만
또하나의방법은중요한‘내용적핵심’을잡아본래의것과변질된것을비교하는
방법이있다.
후자의경우,
지금한국개신교의가장큰문제가‘기복신앙’인만큼시야를좁혀이문제에
집중하면‘차이’를볼수있고보다쉽게결론에접근할수있다.
구약성경의시편제1편첫부분은,
‘복-福’에대해가장구체적으로,현실적으로묘사한말씀이다.
‘복있는사람은(복을받은사람은)
악인의꾀를따르지아니하며,
죄인의길에서지아니하며,
오만한자리에앉지아니하며,
오로지주님의율법을즐거워하여며밤낮으로율법(말씀)을묵상하는사람이다.‘
한국인들이전통적으로가지고있는복-福에대한생각을기준한다면이기사에
따른사람은결코‘복받은사람’이아니다.
가장큰이유는‘소유’가하나도없기때문이다.
이말씀의중심은하나님앞에서의한인간의어떤상태이기때문이다.
3절에보면,
그사람이,
시냇가에심은나무가철에따라열매를맺으며그잎이시들지아니함같으니
하는일마다잘될것이다.
즉하나님이주시는복이지금이아니라어떤상태에대한‘보상적인약속’임을
알수있다.

신약에서‘복-福’에대한가장유명한기록이‘팔복’이다.
마태복음5장에기록된8복은예수가같은시간,한장소에서한말씀이아니라
여기저기에서가르치신말씀들을모아서편집한것이다.
‘마음이가난한사람,(원문은그냥가난한사람임)
슬퍼하는사람,
온유한사람,
옳은일에주리고목마른사람,
자비를베푸는사람,
마음이깨끗한사람들이하나님을볼것이며,
평화를위해일하는사람은하나님의아들이될것이며,
옳은일을하다박해를받는사람은하늘나라의주인이될것이다.‘
이부분에서도‘복’은소유가아니라어떤상태에대한‘보상’이다.
마태복음19장에보면부자청년이예수에게와서영생얻는방법을물었을때,
‘네재산을팔아가난한자들에게나누어주고그후에나를따르라’고한다.
예수를‘따르는자가’가되기위해서는‘부-재물-복’은거침돌이라는얘기다.
23절에보면더극단적인말씀이있다.
‘거듭말하지만부자가하나님나라에들어가는것보다낙타가바늘귀를빠져
나가는것이더쉬울것이다.‘
그리고이말씀을듣고근심하는제자들에게
‘사람의힘으로는할수없지만하나님은무엇이든지하실수있다’고답변한다.
신앙생활과‘청빈-淸貧’을생각하게하는말씀이다.

한국인의가장보편적인‘복’은어떤것일까.
수(壽)는이미평균연령이늘어나있고,
다남(多男)은저출산수준으로떨어져있다.
그래서남는게‘귀-貴’다.
귀에는언제나부-富가따른다는개념에유의할필요가있다.
보편적이며개방적인가치개념으로서의‘귀’는높은지위,높은벼슬,곧관작
(官爵)으로이해할수있다.
비록양반의자제로태어나이미신분적으로는귀하지만높은벼슬을해야
진정한귀가된다는강박성이있다.
그리고이귀는인격의내면적인차원이나정신적차원보다는외면적,사회적
차원에서의벼슬,지위의높고낮음이배타적기준이되어왔다.
따라서내면적이고인격적인귀가상실되고정신적황무지에서외면적,사회적
귀를상징하는,보이는관직만추구하는허무주의적‘출세주의’와부의축적을
추구하는‘물질주의’가나타날수밖에없었다.
뿐만아니라한국적인‘귀’는,
‘집안-가문’이라는껍질을깨지못했다.
개인,또는한가문의고귀한신분은사회에대해도덕적의무가따르는
‘노블레스오블리즈’의정신을가지지못한것이다.
자기집-가문을넘어서는공공-公共의세계가처음부터없었다.
‘족보’의세계가대표적인‘틀’이다.
때문에한국의그리스도인들은사회공동체를위한‘자기희생’이라는세계에대해
거의태생적무지를가지고있다고봐도무방할것이다.
실천없는신앙생활의뿌리가거기에있다.

예나지금이나자기자신과가족,그리고가문의복을빌며살아온한국인들의
기복사상은한국문화의기층을이루고있는무속-巫俗-샤머니즘신앙과서로
원인과결과가되어유지돼왔다고할수있다.
그뿐아니라이뿌리깊고끈질긴기복사상은우리나라에들어온외래의고등종교
까지도습합해모든종교를글자그대로‘기복종교’로바꿔놓고있는것이다.
‘기복신앙’의가장큰특징은,
그것이오늘-현실주의적이고현세적이며자기중심주의인것은물론,양-量을추구
하는점이다.
하나님이약속하는내일의보상적인복이아니라오늘내가요구하는복을달라는
것이다.
이는결과적으로‘나’를넘어서는‘남’과의관계가열리지못하며오늘을뛰어넘는
‘초월’의세계와무관하게된다.
타자의부재,초월의부재가그것이다.
그것은다른말로‘이웃’과‘하나님’없는세계다.
그래서전통적인한국의‘기복사상-기복신앙’은그근본에서반기독교적이고,비
기독교적이다.
성경이요구하는‘어떤상태’는배제되고인간이탐욕적으로요구하는‘귀-복’만이
살아있는것이다.
안타까운것은이러한근본적인내용차이에대한교계의심층적연구가미흡한점이다.
고등종교는반드시그학문적인기반에서도튼튼해야하는소이가그것이다.

얼마전우리지역에있는‘순복음교회’의전도지-찌라시가문에붙어있었다.
신년축복성회에의초대장에는,
‘희망과회복,부의이동,
바다의풍부가네게로돌아오며열방의재물이네게로옴이라.
기적의바람이불어온다‘는글귀로가득차있었다.
여기서‘부의이동’은교회가부를실어나르는통로라는뜻이다.
스스로교회의정체성을버린문장들이다.
영합(迎合)은,
비위를맞추기위해자기의생각을상대편이나세상풍조에맞추는것이다.
교회가‘기복신앙’의잘못을지적,고쳐나가는것이아니라기복신앙적행태에
영합하고있는것이다.
교회의대형화,기업화,세계화,
목회성공과물량주의,출세주의.
성직자의질적저하와세속화가함께만들어낸‘변질’이바로그것이다.
기독교가이땅에들어오기오래전한국인들이복을받는통로는무속-샤머니즘
하나였다.
지금교인들은복을받기위해그전통적인통로를요구하고있는것이다.
‘심령대부흥회’라는‘굿’이질풍노도와같은반응을일으킨게그때문이다.

이제한국의기독교인들-개신교도들은,
충분히‘기복’에길들여져있고중독돼있다.
5분에한번씩‘주님의이름으로축원’하고‘아멘’으로화답해야직성이풀리게
돼있다.
그렇다면,
제대로된교회,제대로목회하는교역자는없는것일까.
그렇지않다.그숫자가너무적은것이문제다.
‘악화가양화를구축하는법칙’은교회에대해서도예외가아니다.
불법,무인가신학교가배출하는사이비가더많기때문이다.
한국의기독교-개신교를딴것이되게한게바로그들이다.
가짜는결국다시가짜를만드는것이다.
‘복-돈-물질’에중독된명목교인들은어떤‘신앙적상태’에있기를거부하는
것이며,있어본적도없다.
그래서오늘의‘변질된교회’가본래의기독교인줄로알고있다.
이보다더한비극이어디에또있겠는가.
가장중요한문제는‘변질된교회’에는‘구원’이없다는사실이다.
예수그리스도를따르는‘크리스티아누스’가없는교회이기때문이다.
한국적기독교의현주소가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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