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素描.
베트남이배출한피아니스트‘당타이손’은,
철학이있는뮤지션이다.
‘쇼팽의피아노음악에서는오른손이아무리자유롭고아름답게노래하더라도
왼손은엄격하게박자를지켜야한다.
마치나뭇잎이바람에춤을추더라도뿌리는굳건하게땅에박혀있어야하는것과
같은이치다.‘
하나의사회공동체-국가도마찬가지다.
그정체성에서든든한뿌리를갖고있다면비록겉으로는혼란스러워보여도그
근본은흔들림이없다.
반대로혼란스러운사회가든든한바탕을가지고있지못하면무너질수밖에없고
이는역사에나타난수많은나라들의부침(浮沈)이증명하고있다.
아직까지‘로마’보다더긴역사를가졌던나라는없다.
광대한제국의넓이,탁월한식민정책,강력한군대,풍부한재정,지금까지남아있는
토목공사와건축물들에서그영화를읽을수있다.
정말‘모든길은로마로통했다.’

그로마도결국은1453년오스만터키에비잔틴제국의수도콘스탄티노풀이함락
되면서막을내렸다.
서로마가먼저망하고동로마가손바닥만한도시로좁혀진후쇄망한것은먼저
‘로마의정신’이죽었었기때문이다.
뿌리가썪을때온전할수있는잎사귀는있을수없다.
근자의우리사회는글자그대로‘막가는세상’같다.
근본과원칙이훼손되고그자리에온갖잡다한‘주장들’이이기적으로창궐하고
있다.
편협한주관이객관적인것을매도하고자기생각과다르면모두가서로에게적이되는
살벌한세상이됐다.
정체성이흔들리고있는것이다.
이것은대단히우려할만한사태가아닐수없다.
대한민국이라는‘틀’이견고해야하며그자체는훼손되면안된다.
나라가있기때문에우리모두는국적국민(國籍國民-市民)인것이며그틀이깨지면
난민(難民)이된다.
지금전세계적으로무국적인구는1200만을헤아리고있다.
지금과같은이념적갈등과대립,정체성이위협받는혼란이계속되면그끝은정말
무서운결과로다가올수있다.
어떤경우에도‘뿌리-근간’은견고해야하는이유도거기에있다.
일단배가깨지면살아남는목숨은하나도없다.

서울대명예교수인김광웅씨는사람을뽑아쓰는일로전정권에잠시몸담았던
사람이다.
평소그의글을읽어보면대단히합리적이고논리적인생각을가지고있음을
알수있다.
얼마전세종시문제가원안대로확정된데대해자기의소회를글로쓴일이있다.
‘세종시원안은수도권분산이나국방상이유로타당성이없지는않지만,말하는
순간자가당착에빠지는역설과도같았다.
지배계급(강남,서울대,삼성등)을없애겠다는당시대통령의의중이마음에걸리고
행정부를쪼개는비능율의안이바로원안이기때문이다.‘
그래서자기는심정적으로개선안을지지한다고했다.
강남이라는특정지역,서울대라는특정학교,삼성이라는특정대기업을없애야할
지배계급으로분류하는기준은사회주의적발상이다.
그들에게지배를당했다는피해의식자체가깊은정신병인것이다.
한나라의대통령이이런생각을가지고있었다면친북좌파집권10년간우리사회는
마른솜에스며드는물처럼좌파가모세혈관까지퍼졌을것은명약관화한사실이다.
더가진자,더똑똑한자,돈잘버는자들이없애야하는대상이라면대한민국은
모두가똑같이가난하게살아야평등한사회가된다.
사회주의의평등원칙이바로그것이며이는열등감의보상이기도하다.

권위와권위주의를혼동하고,
자기주장만있고남의얘기를듣지않으며자기가듣고싶은말만골라서듣고,
사실무근한소문을사이버공간에유포시키고,그책임을느끼지못하는것은물론,
명명백백한객관적사실까지믿지않는태생적‘반골’들로세상은혼란스럽다.
8.15광복이후1948년독립할때까지의혼란도지금의수준은아니었다.
지금의혼란이가지는특징은그‘천박성’이다.
淺薄性은지식이나그생각이얕은것이다.
도무지깊이가없고,생각이넓지못하다.
순간적이고,찰라적이고,표피적이다.
세상만사를휴대폰의자판을두드리듯단순화시키는게대표적인행태다.
어떤경우에도내생각을다른사람들에게전하기위해서는‘내용적설득력’이
있어야한다.
가공되지않은날것정보들로세상이춤을추고있다.
그일차적인온갖정보들,쓰레기처럼쏟아져나오는정보들을선별하고,판단해서
쓸모있는것이되게하는건인간의몫이다.
‘천박한골빈당’들은그기능이없다.
가공능력이처음부터없는것이다.
천방지축이어디에서왔겠는가.

‘스님들이많고,사람들이많이드나들고,또돈이많고건물이즐비한절이과연
큰절인가.
스님들수가적고신도들의발길이드물고,가난하고건물이초라하고보잘것
없다고해서과연그곳이작은절인가.
스님들이많고적거나신도수가많고적음으로크고작은절을따지는것은불교가
아니다.
그러면이곳길상사는큰절인가,작은절인가.좋은절인가,시시한절인가.
한번헤아려보자.
이절과인연을맺은스림들과신도들이하루하루,순간순간,어떤일을하고어떻게
정진하고,어떤신앙생활을하는가에따라좋은절이될수도있고시시한절이
될수도있다.‘
법정-法頂이떠난자리는생각보다크고깊다.
왜그럴까.
그가‘참’을말했기때문이다.
위의글에서절을교회로바꿔도전혀생소하지않다.
보편적인진리를얘기하고있기때문이다.
하나의사회공동체를떠받치고있는‘가치’의하나가종교다.
일상안에서의믿음이실천되지못하고있는현실은불교나기독교나하나도다를게
없다.
법정의한탄이그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은2500여년전돌아가셨기때문에만날기약이없습니다.
여기서부처님은석가모니부처님한분이아닙니다.
이것이불교가다른종교와다른점입니다.
석가모니부처외에도많은부처가있습니다.
단지등록이안되었고이름이알려지지않았을뿐,수많은부처가지금도계시고
과거에도계셨습니다.
한사람의부처에만집착하지마십시오.
이것이불교가다른종교와다른점입니다.‘
그래서법정은‘부처’다.
부처가본래무슨말인가.
산스크리트어인붓다-Buddha는,
‘깨달은자’라는뜻이다.
따라서모든불교신도의목표는성불-成佛-하는것,깨닫는자가되는것이다.
절은이름만걸어놓고때를따라발복-發福-을위해찾아가는무당집이아니다.
교회라고무엇이다르겠는가.
종교가그순기능-긍정적인기능을못할때사회공동체는혼란스러워진다.
종교는모든시대에서그사회의뿌리다.
법정이떠난자리가크고깊은것은그자리를메울수있는지도자가없기때문이다.
우리가입고있는‘손실’이바로그것이다.

최근들어우리사회에서자주회자되고있는단어가‘공짜’와‘부자’다.
사실이세상에공짜는없다.
다른곳에서다른방법으로지불되고있을뿐인데그건무서운상업주의의깊은
함정이다.
‘부자되세요’라는말도유행이다.
결국은모두가‘돈’과관계되는말들이다.
富는부자부자다.
富는많은재화(財貨)나재(財)의총체다.
단지‘돈’만많아서는富가아니다.
DavidBogan의정의를소개해보자.
‘富는,
모든자산(資産)의합이다.
그리고자산에넣을수있는것은다음과같다.
정신적건강,육체적건강,대인관계,지혜,지식,경험,
그리고동산과부동산이다.‘
진정한부는이모든것의합인것이다.
돈만많이가지고있고다른것이부족한경우를졸부(卒富)라고부르는게그이유다.
큰밭을가지고있던농부가,
그땅이개발지구가되면서땅값이크게올랐다.
따라서평생흙을파먹던농부도갑자기큰부자가됐다.
어느날,세금고지서를받아본농부는고민끝에우물에투신자살했다.
땅한귀퉁이를팔아세금을낼수있는지식이없었기때문이다.

그렇다면사람에게있어富란과연어떤것인가.
아무리과학이발달해도음식의맛을측정하는기준은만들수없다.
음식맛에대한평가는사람마다천차만별이기때문이다.
아무리잘삭힌홍어도그걸먹어내지못하는사람에겐조기한마리만도못한
음식이다.
음식에대한선호와차별,그리고그맛에대한평가는정말사람마다아주다르다.
세상이끝나는날까지‘합의’는도출되지못할것이고그게당연하다.
‘행복’도마찬가지다.
오직富만이행복의절대적인조건은아니다.
부는,편리한것이지그자체가행복은아니다.
행복을‘물질적규범’으로획일화하는것은위험하기까지하다.
평균적으로볼때,돈이아주많은사람들보다는적당히(약간모자랄정도)가지고
있는사람들이더행복하게살고있다.
재벌가의속내를보면,
돈이인간적인일상을파괴하기때문에비인간화되는경향이크다.
감옥에들어앉아서까지돈때문에혈육간에소송을하는게그들이다.
결국돈은중성일뿐,그걸가진사람에따라전혀다른결과들이생기는것이다.

본래우리부부는매주한번정도는외식을했다.
주메뉴는냉면이었고,다음이설넝탕,그리고가끔은중국집에서장궤가만들어
주는‘육머짜장’을먹기도했다.
그런데지금은거의외식을하지않는다.
이유는한가지.
대중음식점의음식이맛이변했기때문이다.
가장큰이유는맛을내기위해,즉더많이팔아돈을벌기위해조미료의사용이
크게늘었고,심한경우인체에해로운감미료도서슴치않고쓰기때문이다.
위와장은물론,간과심장같은주요부분이해를입을수있는경우를생각해야
하기때문이다.
칫솔과치약이없던조선시대사람들은미이라(mummy)의연구결과충치가거의
없었다.
사람의충치는세계가무역이늘어나면서설탕이퍼져나간시기와맥을같이한다.
우리의소박한옛밥상이건강식인것은조미료를쓰지않았기때문이다.
지금우리들은음식의내용보다는때깔을보고선호한다.
그속에무엇이들었는지생각해볼때가됐다.
음식에의한피해는직접적이고치명적이지만책임은물을수없는불모지와같다.
‘입에쓴음식이몸에는좋다’는옛어른들의말씀에귀를기울여야한다.

하루끼의‘IQ84(1984년)’에정말아름다운대목이있다.
간호사가환자의보호자에게하는말이다.
‘간호사교육을받을때한가지배운게있어요.
명랑한말로사람의고막을밝게흔들라는거에요.
명랑한말에는밝은진동이있어요.
그내용이상대에게이해되든안되든고막이물리적으로밝게떨린다는점은
달라지지않아요.
그래서우리는환자분께들리건들리지않건아주큰소리로명랑한말을건네라고
배웠어요.
경험적으로도그렇게생각해요.‘
우리사회는크게부풀린풍선과송곳끝이닿을것같은살벌함과긴장감이있다.
싸울것같은무서운표정과독이묻어나는큰목소리들은모두를지치게하고
절망케한다.
그래서‘너’가아니라‘나’부터노력하고고쳐나가야한다.
그리고그것은가능한일이다.
공교육이이중요한인간관계를교육시키지못하고있는것은우리의큰불행이다.
친절과배려는전혀돈이들지않는다.
그러나그결과는쓰나미보다크고넓다.
서로가소닭보듯하고산다면경제적으로발전했다는게무슨의미가있는가.
사람은‘사람답게살아야하는존재’가아닌가.
‘명랑한사람은장애인이되어도명랑하고,꼬여있는사람은부자가되어도
꼬여있다.‘
맞는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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