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신앙적내용을담는‘그릇’을가지게된다.
그게전례(典禮)나예배의식등‘형식’이다.
초기의투박한형식들이세월이지나면서점점세련되고,거기에시대의요구에
부응하면서그그릇은더커지고화려해진반면그안에담겨있어야할내용은
상대적으로빈약해진게사실이다.
심한경우전혀다른것이될수도있다.
형식이라는이끼가두꺼워지면서본래의내용이보이지않게된것이다.
말하자면‘종교개혁’은그두꺼워진이끼를걷어내는역사적작업이다.
기독교회의대표적인그릇-형식-전례의한가지가‘성찬식’이다.
지금은교인들이많기때문에상징적으로약식(略式)이되었지만,
처음교회는글자그대로‘공동식사’를했다.
그때의교회규모는‘가정교회’로서기십명수준이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빵과포도주로이루어지는‘성찬식’은,
개신교의경우‘임재설-臨在說-성찬식동안주께서함께계신다’고주장하는
일부교파도있지만거개는‘기념설’을채택하고있다.
주께서‘나를기념하라’고하셨기때문이다.(고전11:23-26)
로마카톨릭의경우는‘화체설-化體說’을수용,‘영성체-領聖體’라고하는바
이는축성된빵과포도주가예수의살과피로변한다는교리때문이다.
피로변한포도주를흘리지않기위해빵을포도주에적셔사용하기도하고,잔은
신부혼자비우고빵만주는경우도있다.
예를들어,영성체를받은어떤환자가그것을토했을경우집례신부는그것을
전부핥아서남김없이먹어야한다.
성체로변한예수의살과피이기때문이다.
이는내가카톨릭교인에게서직접들은얘기다.
성경에대한서로다른해석이만들어낸이차이는너무나견고한주장들이어서
합의점은찾을수가없다.
성경본문에충실하자면‘기념설’이옳다.
그러나로마카톨릭교회는성경보다‘전통’이우선이기때문에기념설은배제된다.
eucharist라고부르는‘성찬식’은,
Lord’ssupper,‘주의만찬’이라고도부른다.
개신교든,로마카톨릭이든성찬예식의근거는공관복음에있는기록이다.
마가14장,마태26장,누가22장의내용이그것이다.
기본택스트인마가복음의기사를읽어보면,
유월절을지내기위해예루살렘에도착한예수일행은무교절첫날,즉유월절을
준비하는날저녁에마지막식사가되는‘최후의만찬’을하게된다.
말하자면유월절이시작되는저녁에빵과포도주를나누는특별한식사를한것이다.
식사후그들은겟세마네에기도하러갔으며가룟유다의배반으로예수는체포되고,
다음날아침빌라도앞에서재판받는다.
십자가사형을선고받은예수는같은날아침아홉시경에십자가에못박혔고(15:25)
숨을거두었다.
말하자면그는유월절날죽은것이다.
이제제4복음서인요한복음13장을검토해보자.
요한복음에서는제자들이유월절음식준비를위해질문하는기사도없고,
유월절음식을준비하라는예수의지시도없다.
빵과포도주에대한말씀도없다.
대신예수가제자들의발을씼어준다.
가룟유다의배반으로체포된후감옥에서밤을보내고빌라도앞에서재판받는다.
19:13절을보면,
빌라도의십자가형선고는유월절준비일이었고때는낮열두시쯤이었다.
요한복음의기사대로라면예수는유월절하루전인‘준비일’에죽은것이다.(31절)
마가복음의기사대로라면그날예수는분명살아있었고저녁에는제자들과
유월절식사까지했다.
마가에서예수는유월절날아침앙홉시경에처형되었고,요한복음에서는하루전인
유월절준비일정오조금지나운명한것이된다.
마태와누가의기록이마가와같은것은그들이마가를텍스트로썼기때문이다.
결국오리지날인마가와요한의차이가중요한문제로압축되는것이다.
유월절을지키는전통적인유대인들의‘관습’을기준할때마가의기록이사실에
충실하다.
그만큼신빙성이있는내용인것이다.
예수는제자들과함께유월절을‘준비’했고,다음날인유월절아침에처형된
것이다.
남는문제는,
요한복음은무엇때문에예수의죽음을하루앞당겼는가하는점이다.
거기에는반드시그렇게해야할이유가있었을것이다.
해답은요한복음본문안에있다.
요한복음1장29절에는,
세례요한이자기에게나아오는예수를보고,
‘보라,세상죄를지고가는하나님의어린양이로다.’라는기록이있다.
공관복음에는없는요한복음만의특수한기록이다.
요한공동체의신앙은예수가유월절을위해그준비일에도살되는‘제물-희생양’
이었던것이다.
때문에예수가다음날인유월절당일에처형되면안되는것이다.
요한신학은‘희생되는하나님의어린양-예수’였던것이다.
마가에비해한세대이후에쓰여진요한복음은‘예수’를자기들신학노선으로
‘해석’한것이다.
사실예수는,2000년동안수도없이수식되고해석돼왔다.
수많은교파,교단의존재가‘해석전쟁’이얼마나치열했는지를그대로보여주고
있다.
십자가사건이후채100년도되기전에‘하루전에죽은사람’이된게예수다.
해석된예수가아닌,본래의예수를만나는일은대단히어려운일이다.
왜냐하면예수는지금도끊임없이이기적으로‘해석’되고있기때문이다.
성경을글자-문자로만읽는한‘나사렛예수’는만나지못한다.
그러나글자를넘어‘의미’로읽으면그의가르치심에접근할수있고그단계를
지나면그의손길을느낄수있다.
‘하루의차이’는그렇게극복되는것이다.
이탈리아토리노성당의‘수의위원회’는2010년4월10일부터5월23일까지
44일간‘토리노성의-聖衣’를일반에공개하기로했다고밝히면서이미100만명
이상이관람을신청했고총200만명정도가수의를보기위해토리노를방문
할것이라고전망했다.
1578년부터토리노성당에보관된이수의는1580년이후400여년간11차례
공개된바있다.
20세기에는31,33.78,98년네차례공개됐고21세기들어서는2000년에이어
이번이두번째다.
‘토리노성의’로불리는이수의는시신을감싸는‘세마포-細麻布-고운베’다.
세로약131센티,가로약442센티,두께0.33미리,무게2.45키로그램의손으로
짠능직(綾織)의긴천이다.
전설에따르면그세마포는십자군전쟁당시터키에서발견돼프랑스로옮겨졌다.
화재를피해이탈리아의토리노성당으로옮겨와보관하기시작한것이1572년
(또는1578년),
수의는1898년일반에처음으로공개됐다.
당시한아마추어사진작가가사진을찍었는데육안으로보이지않던예수의얼굴이
사진에나타났다.
반신반의하던상황에서1931년전문작가가다시찍은사진에도예수의얼굴이
드러나면서토리노수의는‘불가사의한기적’의반열에올랐다.
이수의에대한진,위문제는오래동안큰논쟁으로이어졌다.
우선그게예수의얼굴이라고단정할수있는근거가없다는점이다.
예수의얼굴을본사람이없는데그게예수의얼굴이라고단정해서말할수는없다는
것이다.
사실일리가있는얘기이기도하다.
수많은예수의초상화도모두가화가들의상상화가아닌가.
다른하나는그세마포가언제만들어진것인가하는의문이다.
현대과학이이문제에개입한것이1988년.
수의에서채취한3개의샘풀을각기다른세곳의연구소에보내방사성탄소연대로
측정한결과이세마포가만들어진것이1260년에서1390년사이었음이밝혀졌다.
조사의신뢰도를높이기위해이미그제조연대가알려진초대와중세의천조각으로
다시측정한결과95%의신뢰도가인정되었다.
시험결과가이미알고있는제조연대와일치했던것이다.
과학적으로는1260-1390연도에직조된천이예수의수의가될수없다는객관적
결론이내려진것이며물리적으로그수의는가짜인것이다.
진,위에대한양측의논쟁은지금도계속되고있지만현대과학은그것이가짜라는
것을과학적측정방법으로밝혀낸것이다.
지구상에살아있는유기체는탄소-14라는방사성탄소를가지고있다.
탄소-14는유기체가죽자마자붕괴되어사라지기시작하는희귀한형태의탄소다.
한편어떤표본의탄소-14라해도5,730년이지나면그절반이붕괴되어다시질소가
된다.
말하자면탄소-14의반감기는5.730년인것이다.
식물과동물이함께가지고있는일반적인탄소원자인탄소12와특이한탄소-14는
그비율이일정하며식물이나동물이죽을경우탄소-14는줄어들기시작하지만
탄소12는그대로남아있게된다.
과학자들은유기체가죽은후어느정도의시간이지났는지를알아내기위해그물체에
남아있는탄소-14와탄소12의비율을그와똑같이살아있는물체의비율과비교해
본다.
죽은물체의비율이살아있는물체에비해그비율이절반이라면죽은물체의나이는
정확히5,730년이다.
그비율이4분의1이라면11.460년이며,8분의1이라면17.190년이된다.
그러나대상물체가6만년보다오래되었을경우에는과학적으로이용할만큼의
충분한탄소-14가남아있지않아실험해볼수없다.
또1940년이후에죽은유기체는탄소연대측정법으로측정하기어렵다.
핵실험과핵사용이지구상에일정하게유지되어오던방사성물질의농도를변화
시켰기때문이다.
과학은이렇게모든게분명하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은1950년대시카고대학의윌라드레비가개발했으며,
1960년그는노벨화학상을수상했다.
‘토리노성의’는1260-1390년사이에직조된천이다.
현대과학이객관적으로그사실을입증한이상그게가짜라는것은이제더
얘기할것도없다.
그런데왜사람들은계속그것을‘기적의천’으로생각하고보기를원하는것일까.
이것은과학이대답할수없는,전혀다른영역의질문이다.
한두명도아닌수백만명이그걸보기위해운집한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는것일까.
사람은너,나할것없이
‘자기가믿고싶은것을믿는다.’
기적이필요한것도기적을믿고싶은마음이있기때문이다.
종교의가장깊은영역은‘초월’의세계다.
철학도,과학도설명하지못하는영적인세계인것이다.
물리적으로‘토리노수의’는14세기에직조된천이다.
그리고사람들은그걸알면서도그천이예수의시신을쌌던천이기를원하고있다.
예수의체취를더가까이에서맡아보고손으로만져보고싶기때문이다.
요한공동체는,
예수가유월절날처형된것을알고있었을것이다.
그러나‘세상죄를지고가는하나님의어린양’을위해서는그전날처형된것으로,
그래서그분이‘유월절희생양’이되기를원했던것이다.
하루가앞당겨진것도,
토리노성의도,
모두가‘해석’의산물이다.
해석이본질을왜곡해도그렇게해석하고싶은것이우리가빠질수있는함정이다.
아무리‘믿음은바라는것들의실상이요보지못하는것들의증거’라해도
사실-진실을왜곡할수는없다.
2000여년동안우리들은가장이기적인‘해석’을통해예수에게서점점멀어져
왔다.
지금우리들은수도없이수식되고해석된예수만알지,처음의‘나사렛예수’를
모른다.
그러나예수는믿음의대상이지수식과해석의대상은아니다.
그래서‘예수’를알아야한다.
변해야하는것은오직‘나’일뿐이다.
내가그분에게로나아가야한다.
그리고그분이‘나’를해석해야된다.
그게우리가구원받는유일한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