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광장의 총성.
1948년이스라엘이독립했을때,
2차대전에서‘홀로코스트’를겪은이작은나라에대해서방의여러나라들은이를
승인하고외교관계를수립했다.
그런데,
모두의예상을깨고‘바티칸’은이스라엘에대한외교적승인을유보했다.
교황청의비서국안에는강력한반이스라엘파가존재했으며이곳신부들은웨스트뱅크
와가자지구를‘점령지역’으로,그리고골란고원을시리아로부터‘강제로병합한지역’
으로간주했다.
이들은저녁이면로마의부촌인비아콘도티지역에사는아랍부호들의아파트로차를
몰고가서칵테일을마시면서이스라엘을지구상에서없애야한다는아랍인들의주장을
듣곤했다.
요한바오로2세가교황으로선출된1978년도까지도바티칸의반이스라엘방침은
변함이없었다.
그때까지도교황에게제공되는이스라엘에대한정보는주로아랍국가와접촉하고있는
신부들로부터나온것이대부분이었다.

한편이스라엘로서는‘세계적인영향력’을가지고있는바티칸과의관계정상화가
절실했으며이는역대수상들의가장큰숙제이기도했다.
1948년이스라엘이독립했을때,
이스라엘과바티칸사이에는대단히‘기이한사건’이있었고,이것이빌미가되어
서로가등을돌리는일이일어났다.
추기경들에의해선출되는교황은종신직이며,
사법이나입법적통제는물론어떤책임도지지않는‘절대권력자’다.
교황청은피라미드식의견고한군주제권력구조로이루어져있으며,
교황은카톨릭신자들에대한지배력뿐아니라세계적으로정치,경제,그리고이념
적인사고방식형성에막강한영향력을미치고있다.
바티칸-교황청에는3000여명의직원이있으며이들은1000여명의신부,수녀들과
함께일하고있다.
교황청직원들은10단계직급으로나뉘어있으며월1100유로에서2200유로까지
받는다.
각부처최고책임자인추기경이나대주교는월3500유로를받는다.
2006년기준바티칸의년간총수입은약3.167억원이었으며지출은3.126억원이었다.
베네딕토16세교황취임2년만인2006년결산에서는약30억원의흑자를기록했다.

이스라엘과바티칸사이의관계변화가시작된것은1978년교황으로선출된요한
바오로2세와깊은관계가있다.
1981년5월13일금요일오후,
바티칸의성베드로광장은10만명의인파로가득찼으며사람들은교황이나타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오후4시교황은막다리미질한백색실크의옷으로갈아입었다.
그옷은미국의CIA의권유에따라옷안쪽에표나지않게방탄조끼를끼어입을수
있도록만들어진것이었다.
그러나교황은그것이교황의직분이대표하는상징성에위배된다는이유로이를
거부했다.
5시정각,
교황은흰색가죽시트와손잡이레일이설치된그의전용차캄파뇰라에올라정원을
떠나사람들이운집해있는광장을향했다.
5시15분,시속2마일의캄파뇰라는두번째광장선회를시작했으며교황은군중속에
있는한여자아이를안아올려그볼에키스했으며5시17분교황은다시흰옷을입은
여자아이의머리를쓰다듬었다.
다시몸을곧게세운교황은누구에게인사할까살피고있었다.
교황은그렇게자신의개인적친근감을드러내고있었다.

5시18분,
첫번째총성이베드로광장에울렸으며,
총탄은교황의복부를관통했다.
두번째총탄은상처부위를누르고있던교황의오른손을꿰뚫었으며,
세번째총탄은오른팔윗부분을관통했다.
캄파뇰라는바티칸현관가까이에주차해있는앰브런스로향했으며,
앰브런스는8분만에바티칸근처에있는로마게메리병원에도착했다.
교황은9층수술실로옮겨졌으며6시간에걸친수술로의식을회복했다.
한편교황저격범은오른손에권총을쥔채군중속으로뛰어들었고누군가가달려
가는그의다리를걸어넘어뜨렸다.
이때손에서권총이튕겨나갔으며로마경찰한명이그를덮쳤다.
범인은얼굴이가무잡잡한터키인이었으며이름은메흐메트알리아카였다.
아카는‘흑색늑대’라불리는터키소재테러그룹소속이었으며이후그곳을떠나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이다니는훈련갬프들을전전했다.
1981년7월,
교황의저격범아카는종신형을언도받았다.
그러나그때까지도범행동기나암살음모배후에대해서는아무것도밝혀지지않았다.

긴회복기의시간을보내면서교황은누가자기에대한암살지령을내렸는가하는
문제에대해점점몰입하게되었다.
그는CIA,BND,터키정보부와오스트리아정보부등다양한정보기관과경찰보고서에
나타난모든증거자료들을모두읽으려고노력했다.
그러나어떤보고서에도의문에대한속시원한답변은없었다.
그리고2년후인1983년12월23일,
교황은로마에있는‘레비비아’감옥을방문했으며독방에수감되어있는자기의
저격범아카를만났다.
교황은반지낀손을내밀었으며아카는주저하다앞으로나와교황의손을잡고
‘어부의반지’에입을맞췄다.
‘당신이아카인가’
교황은이태리어로물었다.
아카는‘씨’라는이태리어로대답했다.
교황은그가감옥에서이태리어를배우고있음을알고있었다.
교황이그를만난것은‘용서’를행위로보여준것이었으며21분간계속된그들의
대화는머리를맞대고나눈속삭임이었기때문에아무도듣지못했다.
교황은아카에게은과진주로만든묵주를선물했다.
교황이아카를만나러간것은암살의‘배후’를알게된이후였으며극비의내용을
알아낸것은이스라엘의정보기관‘모사드’였다.

처음,
소련의KGB가의심받은것은사실이었다.
그러나팔레스타인은배제되었다.
소련에대한단서가잡히지않자이중대한사건의배후는미궁에빠질수도있다는
불안감까지나타났다.
모사드는,
이사건이이스라엘과바티칸의관계를회복시킬수도있다고판단했으며그어느
정보기관보다도더강도높은첩보력으로음모의실체를캐려고노력했다.
모사드는베드로광장에서의‘아카’를역추적하기시작했다.
아랍첩보에관한한어떤정보기관도모사드를따르지는못한다.
겉으로봐서아랍사람이다된유대인은얼마든지있었기때문이다.
그리고2년이라는시간이흐른후이음모의끝이‘테헤란’에닿아있음을밝혀냈다.
실로교황에대한암살은‘호메이니’의승인하에시작되었으며아카에의해집행
되었던것이다.
‘교황의스파이’라는별명을가진포기대주교는1983년11월의몹시추운날밤,
모사드로부터건네받은구체적이고개관적인‘암삼음모’자료를가지고바티칸으로
돌아갔다.
비로소교황은누가자기를죽이려고했는지를알게된것이다.
그후,요한바오로2세는1986년4월13일교황으로서는처음으로로마시내에있는
유대교회당을방문했다.
그리고1993년3월12일,드디어교황청과이스라엘간정식외교관계가수립되었다.

이제우리는바티칸과이스라엘의외교관계를35년동안가로막았던그‘기이한
사건‘을얘기하기전에’예수재판‘에대한법적절차와하자에대해현행법체계로
이를재구성해봐야한다.
서기33년4월의어느날,
가룟유다의고발로겟세마네에서현행범으로체포된예수는,
체포영장의제시도,미란다원칙에대한고지도없이기소되었다.
공소장에기재된혐의는,
성전모독,조세거부,메시아참칭등이었고,
검찰석에는70여명의유대제사장들과서기관들이줄지어앉았다.
변호인석은비어있었으며국선변호인도선임하지않았다.
재판장빌라도는예수의범죄를입증할증거를찾지못해고민한다.
증인몇사람이법정에섰으며이들은예수가가이사에게세금을내지못하도록
했다고거짓증언한다.
제사장들과서기관들은‘사형’을구형했다.
그러나종교국가가아닌로마법으로는그기소내용이중죄에해당되지않았으며,
빌라도는채찍몇대의형을선고하려고했다.
제사장들은발끈해서공소장변경을요구했으며왕의이름을사칭한혐의를추가
하겠다고했다.
‘왕명’의사칭은로마에서도‘국가원수모독죄’로사형에처할수있는중죄가된다.

재판장인빌라도가선고를망설이자,
유대인방청객들이난폭해지기시작했다.
민란을크게두려워한빌라도는예수에게사형을선고했고예수는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에서처형되었다.
결국예수의처형은법적으로잘못된재판에서비롯된일이었다.
억지혐의적용,법절차를무시한진행,마녀사냥을요구하는군중에밀린무리한
판결등이그것이다.
1948년,이스라엘이독립했을때,
교황청-바티칸의외무장관은이스라엘법무장관인하밈콘에게특사를보내
‘예수에대한재판’을다시열어2000여년전에내렸던유죄판결을번복하도록요청
했다.
그렇게조치한다면교황청은이스라엘을공식승인하고외교관계도수립하겠다고
제안했다.
정말기상천외의놀라운제안이었다.
바티칸과의외교관계수립이아무리중요하다고해도이는너무나작위적이고아무
의미도없다고판단한이스라엘은이제안을거부했다.
그이후,1993년까지이스라엘과바티칸은서로등을돌리고있었던것이다.

한스큉신부는카톨릭최고의신학자이자20세기의지성으로통하는분이다.
튀빙겐대학의교수이기도했던그는,
‘교황청은아직도중세시대의패러다임에갇혀있다고생각된다’는말을했다.
그리고1972년교황청을방문했던이스라엘의메이어수상은교황과의회담을
끝낸후그곳을떠나면서,
‘교황의시간개념은속세의시간개념과는다른것같다’는말을남겼다.
서기1948년에,
서기33년의‘재판’을다시해달라는요청은우선상식적이지못하다.
마가15장1절에나타나는‘의회-온교회’는,
sunedrion-council-sanhedrin-산헤드린으로서그리스,로마시대기간중에
있었던유대인의최고종교재판소를의미한다.
물론지금은존재하지않는‘조직’이다.
그리고피고에대한사형은산헤드린의유대율법이아니라지배자인로마법에
의해총독의승인을받아야했다.
1948년의이스라엘에는예수를다시‘재판’할수있는법적주체가존해하지
않았으며존재할수도없었다.
바티칸의요구가‘시간적’으로실행될수없는것이라면문제는그렇게할수있다고
생각하는교황청에있는것이다.
사실황당하고놀라운발상이아닐수없다.

2005년4월교황으로즉위한베네딕토16세는해마다민감한발언으로구설수에
오르고있다.
-그리스도는지구상에오직하나의교회를세웠고이는카톨릭교회로존재한다.
-그리스정교회는교황의권위를인정하지않아결함이있다.
-개신교등은교황의존재시인을거부하고성찬식에대한견해를달리하는등
올바른의미에서교회라고볼수없다.
-무하마드가새롭게제시한것은‘신념을칼로서전파하라’는명령처럼사악하고
무자비한것들이라는14세기비잔틴황제의말을인용했으며,
-남미의원주민들은500년전부터기독교인이되기를갈구했기때문에유럽
선교사들을환영했다.
기독교정파간의불화와함께,
전세계무슬림들의공분을자아낸것을물론남미의‘식민지화’를미화한다는거센
비판을받은것은말할것도없다.
교황은왜이런실언들을계속하고있는것일까.
미국,조지타운대우드스탁신학센터의톰리스수석연구원은,
‘교황은자신의견해와성향에도전하는전문가들과는협의하지않으며교황은
자신처럼현명하지도않고자신의견해에의문을제기하지도않는인물들에게
둘러싸여있다‘고진단했다.
뉴욕타임스는‘베네딕토16세는교회내부의교리문제에너무집중해자신의발언이
외부세계에어떤파급효과를미칠지에대해모른다‘고했다.

21세기인지금바티칸의교황은,
전세계에영향을끼치는다섯사람안에들어가있다.
뿐만아니라전세계로마카톨릭교회교인들에대한영향력까지생각할때,
시대와동떨어진교회의생각과발언은사실심각한문제가아닐수없다.
화합을깨고,불란과분노를야기하는그의행보는그원인이어디에있을까.
세속은21세기인데바티칸은‘중세’에머물러있다면이건정말보통일이아니다.
교회가세상을선도(先導)하려면시간에서도앞서있어야한다.
그반대라면존재할이유가없다.
예언자적기능을가질수없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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