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三位一體)교리와함께기독교신앙의핵심적인내용이다.
처음부터기독교는‘부활’에그뿌리를두고있는고등종교다.
부활에대한텍스트는‘공관복음’이포함된27권의신약성서자체이며그내용들을
신학적으로체계있게정리한교리들이철옹성처럼‘부활신앙’을담고있다.
그리스-로마시대가끝날무렵인5세기로부터,르네상스가시작된15세기경까지를
중세시대로정의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354-430)는플라톤철학과기독교신앙을접목시키려는
시도에서,
토마스아퀴나스(ThomasAquinas1224-1274)는아리스토텔레스의철학과
기독교신학을종합하는작업으로기독교신앙의핵심직인내용들을견고한교리로
만드는데큰역할을한인물들이다.
신앙내용이교리가되는것은‘학습’을위해서는필요한것이지만내용의재해석을
제한하는벽이될수도있다.
로마카톨릭의한계가거기에있다.
원문인anastasis는resurrection이다.
이단어의뜻은‘죽은자의부활,소생’이며,
부활(復活)은,죽었다가다시살아나는것이다.
21세기를살고있는,과학의시대를살고있는현대인인우리들에게이단어는대단히
생소한것이다.
왜냐하면과학적으로는한번죽어묻힌인간은되살아날수가없기때문이다.
그래서‘예수부활’기사는,
과학으로는설명할수없는신앙의문제가된다.
다른한가지는,공관복음에기록된예수부활의기사는과학이없던,신화(神話)의
시대에쓰여졌다는점이다.
이점을간과하면안된다.
누가복음은바울의증언에의해사도행전의상당부분과함께‘누가’가쓴것이거의
확실하지만마태와마가는누가기록한것인지전혀알길이없다.
한가지공통점은공관복음의세기자는생전의예수와는무관한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팔레스타인밖에서복음서를기록했으며누가를제외하면복음서를기록한
헬라어가모국어가아닌사람들이다.
헬라의문장의수준과거친표현들이그증거다.
나아가서공관복음의기자들은,
‘예수부활’을직접체험한사람들도아니다.
두세대가지나는동안구전(口傳)된예수에대한설화(說話)를채집,편집한사람
들이그들이다.
거기에어떤절박한필요가있었던것도사실이다.
말하자면공관복음에기록된‘예수부활’사건은그일을현장에서겪었던사람들이
남긴이야기와체험담을근간으로해서엮어낸‘스토리’인것이다.
분석적으로부활사건기사를정독해보면‘예수부활’기사들은서로아귀가맞지않는
내용들을기술하고있다.
서로다른구전을기초로했기때문이다.
사실그건당연한일이기도하다.
체험한사람들도달랐고,그들이남긴이야기도차이가났으며이를채집,편집한
복음서기자들도그입장이서로달랐기때문이다.
때문에우리들은책으로서의공관복음서자체를절대시하면안된다.
그안에담겨져있는‘뜻-의미’가중요한것이지종이에쓰인글자는단지글자일
뿐이다.
‘예수부활’사건은그래서교리에갇히면안된다.
초대교회최고의지성인은사도바울이다.
그러나그바울도지금으로부터2천여년전의‘고대인’임을알아야한다.
과학이없던,신화로가득찬시대를살았던사람임을이해해야한다.
그는고린도에보낸편지에서이렇게주장한다.
‘만일죽은자들이다시살아나는일이없다면그리스도께서도다시살아날수없었을
것입니다.‘(고전15:16)
바울은,
사람이죽었다가다시살아나는일이있을수있다는일반적인전제를얘기하고있는
것이다.
이것이바울의개인적인생각인지아니면그시대사람들의일반적으로가지고있는
생각인지는알길이없다.
분명한것은‘죽은자가살아날수있다’는그의주장이다.
말하자면‘예수부활’은하나도이상할게없는하나님의역사라는증언이다.
한가지개연성을생각한다면,
바울의이편지를받는고린도교회교인들이바울의이런주장을받아들일수있다는
전제가있었기에성립되는얘기가아니겠는가하는점이다.
그당시‘에수부활’은지금과는전혀다른‘현실’로수용될수있었다는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먼저베드로에게나타나신뒤에다시열두사도에게나타나셨습니다.
또한번에오백명이넘는교우들에게도나타나셨는데그중에는이미세상을떠난
사람도있지만대다수는아직도살아있습니다.
그뒤에야고보에게나타나시고또모든사람들에게도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마지막으로팔삭동이같은나에게도나타나셨습니다.‘(고전15:5-8)
‘예수부활’사건에서바울의이기록은중차대한의미를가진다.
그가거짓말을할리가없기때문이다.
opthe-seen은,
본다는의미와함께이해하고,체험한다는의미는물론,만난다는뜻도있다.
예를들어부활하신예수가바울앞에나타난다면바울은그분을알아볼수가있을까.
놀라운일이지만,
바울은예수를알아보지못한다.
생전에서로만난일이없었으며예수의사진은물론초상화도없었기때문이다.
바울은생전의예수를본일이없었기때문에그분을알아볼수가없는것이다.
그렇다면예수는바울에게어떤모습으로나타나셨는가.
바울은분명히자기에게도부활하신예수가나타났다고증언하고있다.
누가가기록한사도행전9장에그답이있다.l
이기록은바울이누가에게구술(口述)시킨부분이기도하다.
다메섹으로가는길에서,
예수는‘빛과음성’으로바울에게나타났다.
바울은말에서떨어졌고,실명까지하는큰충격을받았으며이후그목숨을바쳐
그리스도를증거하는일에매진하게된다.
예수의제자들,일반신도들,그리고야고보와바울에게나타난예수는바울의표현
그대로‘빛과음성’같은방법으로그들과접촉하신것으로이해할수있다.
오순절다락방에서제자들은‘바람소리같은’‘불의혀가갈라지는것같이’나타나신
그분을체험했다.
성경은‘거룩한경전’이기때문에신성시되고,그만큼‘절대적인것’이되어질문을
허용하지않는다.
의심과믿음은동전의양면같은것이다.
의심은지극히자연스러운것이며그과정을솔직하고정직하게거치지않으면
‘자기신앙’은가지기가어렵다.
과학의시대를사는현대인크리스챤들이‘예수부활’에대해회의를느끼는것은
너무나자연스러운일임을알아야한다.
처음의한세대가지나가기전,
로마에서는대단히독특한책이기록되었다.
그것이‘베드로전서’다.
물론누가이책을썼는지는정확히알길이없다.
공관복음서의‘예수부활’기사는육신으로부활하신주께서여러사람들에게나타나는
내용으로기록되어있다.
그런데베드로전서의부활기사는전혀다르게기록되어있다.
3장18절에는,
‘그리스도께서는몸으로는죽으셨지만영적으로는다시사셨습니다.’가그것이다.
죽은것은sarki-flesh-몸,육신이고,
살아난것은pneumati-spirit-영(靈),영혼이라는얘기다.
가히‘부활론’의놀라운진화라고할수있을정도의내용이다.
전통적으로교회에서는베드로전서의이부분을기피해오고있다.
교리에어긋나기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같은부활사건에대해이렇게다른기록이나타나게된동기나내용에
대해알길이없다.
베드로전서를‘정경’에포함시킨주후397년의‘카르타고교회회의’가이사실을
몰랐을리가없다.
그러나그들은이렇게다르게기록된내용도있는그대로수용한것이다.
바울도이와비슷한입장을밝힌부분이있다.
우리가부활장이라고부르는고전15장에보면,
‘죽은자의부활도이와같습니다.
썪을몸으로묻히지만썪지않는몸으로다시살아납니다.
천한것으로묻히지만영광스러운것으로다시살아납니다.
약한자로묻히지만강한자로다시살아납니다.
육체적인몸으로묻히지만영적인몸으로다시살아납니다.
육체적인몸이있으면영적인몸도있습니다.‘(42-44)
‘그리스도께서는몸-육신으로는죽으셨지만,
영적-영으로는다시사셨습니다.‘와
‘육체의몸으로묻히지만영적인몸으로다시살아난다’는바울의생각은일치하고
있다.
베드로전서와고린도전서의전혀무관함을생각한다면실로놀라운일치가아닐수
없다.
그리고이러한기록들은오늘의우리들에게‘예수부활’을알고,이해하고,믿을수
있게하는중요한단서를제공하고있다.
교리라는벽을허물고성경안을자유스럽게거닐어보면모든의문은성경안에이미
그답을가지고있음을발견하게된다.
오묘한섭리란바로이런것이아니겠는가.
우리는성경을‘살아계신말씀’이라고말한다.
‘하나님의말씀은살아있고힘이있으며
어떤쌍날칼보다더날카롭습니다.
그래서사람의마음을꿰뚫어영혼과정신을갈라놓고관절과골수를쪼개어
그마음속에품은생각과속셈을드러냅니다.
피조물치고하나님앞에드러나지않는것은없습니다.
하나님의눈앞에는모든것이다벌거숭이로드러나게마련입니다.‘
(히브리서4:12-13)
말씀의살아있는‘기능’을설명한구절이다.
성경말씀이살아있는기능을가지기위해서는그기록된말씀이오늘우리의
‘삶의자리’에서재해석될수있어야한다.
기독교2천년역사에서굴곡도많았지만세계최대의고등종교로서그자리를깊고
넓게잡은것은‘살아있는기능’이있었었기때문이다.
그래서오늘의기독교도‘교리’를뛰어넘는살아있는기능을위해새롭게해석될수
있어야한다.
예수의부활이없었다면기독교는또하나의‘로제타비석’이될수밖에없었을
것이다.
오늘도기독교는‘죽은돌비’가아니라살아있는말씀이다.
그말씀의기능이살아있는종교가되어야하는이유가그것이다.
오늘날이스라엘에는‘엠마오’로알려진곳이두군데있다.
두곳모도평범한지형이다.
공관복음의오리지날텍스트인마가16장12-13절에는
‘그뒤제자들가운데두사람이시골로가고있을때예수께서다른모습으로
그들에게나타나셨다.‘라고간단히기록하고있다.
그런데이야기꾼인누가는아주긴구전전승을채집,이부분을확대했다.
‘예수께서는그들과함께묵으려고집으로들어가셨다.
예수께서함께식탁에앉아빵을들어감사의기도를드리신다음그것을떼어
나누어주셨다.
그제서야그들은눈이열려예수를알아보았는데예수의모습은이미사라져서
보이지않았다.‘(누가24:29-30)
이기사가우리들에게보여주려고하는것은무엇일까.
누가의의도는명백하다고볼수있다.
부활하신예수의‘존재방식’의변화가그것이다.
보이는육신에서보이지않는영으로의변환(變換-바뀌어달라지는것)인것이다.
기독교2천년의역사는그분이‘존재’하기때문에의미를가진다.
이점은앞으로도마찬가지다.
그래서육신으로는죽었지만영으로살아나신분이함께계시는삶이모든크리스챤의
일상이된다.
그것은교리를뛰어넘는높고도깊은,넓은신앙의세계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