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컴퓨터’가떠오르고,우리는그를한국의‘빌게이츠’라고도부른다.
서울대의대를졸업한안철수는박사과정에있던1988년컴퓨터바이러스백신V3를
개발하면서세상에그이름이알려지게되었다.
그때의나이가약관26세,
지금49세인안철수는,
소프트웨어벤쳐협회회장,
카이스트석좌교수,
포스코이사회회장이며4월28일한국과학기술원석좌교수에서서울대융합과학
기술대학원원장으로임용되어다시세인의주목을받고있다.
-보장된미래보다는좋아하는일을택하라.
-자기에게정말맞는분야를찾기위해쓰는시간은값진시간이다.
-나는영리하고빠른조직과느리더라도건강한조직중하나를택하라면느리더라도
건강한조직을택할것이다.
-나는다른사람과비교하는것에큰의미를두지않는다.진정한비교의대상은외부에
있는것인아니라‘어제의나’와‘오늘의나’사이에있는것이라고생각한다.
안철수는이미유명한강사이기도하다.
지난5월2일부산의고신대에서의강연내용중한부분을발췌해보자.
‘최근10년사이페이스북,트위터,징가(zynga),그루폰(groupon)등새로운소셜IT기업이
생겨나고,위아래와좌우의경계가허물어지는탈권위주의와융합,세계와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런초고속시대에는‘나’를찾는것이중요하다.
전망을보고대세를따라가는현상을보지만그건우리스스로를모르고휘둘리고있다는
방증이며진심으로행복해지려면자신이뭘원하는지알아야하고고민을많이해야
한다.
고민을하다보면정리가되고깨닫게된다.
미래는아무도예측할수없기때문에자신에게의미가있고잘할수있는일을선택
하는게불확실한21세기를살아가는키워드다.‘
정보의바다에서익사하지않으려면‘자기만의배’를만들라는얘기다.
그는대세를따라가는사람들을‘휘둘리고있는사람’으로정의한다.
자기정체성에대한확고한신념이없다면그누구라도휘둘릴수밖에없는세상이다.
더빨리,더편하게가는길은어쩔수없이모두가땅에발을붙이지못하고붕떠가는
‘쏠림’의길이기때문이다.
작년3월,
세수79세로입적하신‘큰스님법정’은,
그본명이박재철이며,
1932년전남해남에서출생했다.
목포상고와전남대상과에진학했으나3학년때인1954년돌연출가했다.
법정은자기의출가에대해손수써낸책에서이렇게설명하고있다.
‘나자신은왜출가했는가.
무슨이유로세속을떠났는가,
부처님이지금이자리에서물으면나는이렇게분명히대답할것이다.
나답게살기위해,
내식대로살기위해집을떠났노라고.
솔직히말해나는세상이무상하다거나불교의진리에매혹되어집을떠난것이아니다.
출가전에나는불교에대해아는것이하나도없었다.
나의출가는나의존재의절실한요구였다.
때가되었기때문에거부할수없는어떤것이나를그길로이끌었다.‘
법정의출가는,
내식대로살기위한돌파구였다.
그래서자기존재의절실한요구였다고한다.
그분의치열한삶은그렇게시작된것이다.
법정은계속해서설명한다.
‘출가는소극적인도피가아니라적극적인추구다.
내의지로서내삶을재구성하려는시도인것이다.
집을떠나기전가장아쉬운것이책이었다.
출가는일회적인행위가아니다.
매번일어나는모든집착으로부터거듭거듭떠나야하기때문이다.
출가란끝이없는탈출이며수행이란일종의장애물경기와같다.
출가는떠남이아니라돌아옴이다.
진정한나에게로,
그동안잊었던본래의나로돌아오는것이다.
출가는안정된삶을뛰어넘어충만한삶에이르는길이다.
출가자는욕망에따라살지않고필요에따라살아간다.
그는안으로부유한사람이다.
큰고통을통해모든고통의끝에이르는것이출가다.‘
나는이글을읽을때마다깊은감명과함께새로운깨달음을얻는다.
그리고이글을읽을때마다내나름대로의‘내식대로살기’가바른길로가는것
이라는확신을가지게된다.
한위대한정신의가르침이얼마나강력한것인지를체험하는것이다.
안철수는세상안에서,
법정은세상밖에서똑같은얘기를하고있다.
‘휘둘리지말고너자신을살아라’가그것이다.
지금처럼기존의온갖경계가허물어지고,정보가바다가되어우리들을덮치고,
더빨리,더편해지는세상에서모든인간은제정신을차리기가어렵다.
‘제정신차리기’가무엇인지도모르는사람들이대부분이다.
새것을따라가기도바쁜데무엇을생각하고고민하란말인가.
그래서모두가비슷한토끼장안에서,비슷한가구에싸여똑같은‘막장프로’를
보면서비슷하게살아가고있다.
비슷하게살면편하고,안전하고,모두가함께가고있기때문에안정적이다.
이렇게살아가는것을나쁘다고할수는없다.
그것도분명한하나의선택이기때문이다.
가장큰문제는그렇게살면남들과는태생적으로다른본래의‘나’가설자리가
없다는점이다.
‘자기’를잃어버리고남을따라가는인생을살게된다.
내식대로살려면그커다란흐름을역류할수있어야한다.
역류해서라도‘내식대로살겠다’는사람과큰흐름에따라‘흘러가기’를원하는
사람으로갈리는게인생이다.
전자가내적으로풍요로운인생을살아갈수있다면후자는단순하고건조한삶으로
마감할수밖에없다.
안철수는논리(論理)로서역류하라고외치고있으며,
법정은‘실천’으로역류를보여주고있다.
방법은다르지만,그래서그들은오늘의‘선구자들’이다.
2011년인지금은,
개인이함몰되는‘거대한융합의세계’다.
르네상스이후찬란하게피어났던‘개인’에대한정의와사상이아날로그를해체하는
디지털앞에서산산조각이나고있다.
법정은,그래서‘광고에저항하라’고외쳤다.
지금과같은세상에서한인간이‘내식대로살기’를결심한다는것은용기이상의
자기철학과정체성이있어야가능하다.
거기에는상당한‘내공-안으로쌓인실력’이있어야한다.
다른사람들과다르게생각한다는것,
모두가받아들인생활방법을비판적으로거부한다는것,
나만의방법을고집하고그길로간다는것은그안에견고한철학적뿌리가없이는
불가능하다.
대세에역류하는인간은,
어떤면에선태생적인‘성격’도있어야한다.
똑같기를거부하는‘자기이유’가있어야하는것이다.
그래서‘내식대로사는사람’이그숫자에서적은것이다.
국내의은행들이부동산PF(프로젝트파이낸싱)대출은,
2010년말기준38조7000억원규모다.
이중회수가안되는부실채권은6조4000억원으로16.4%에이르고있다.
이금액은부동산경기침체로계속늘어나고있기때문에금융권전체의큰문제로
떠오르고있기도하다.
그동안은행들은,
높은대출이자와함께,높은아파트분양율,주택에대한국민들의집착,가파르게
상승하는부동산가격때문에거의무제한으로PF대출을늘려왔다.
현재PF부실채권은금융권전체의부실채권에서26.2%의비중을차지하고
있으며급기야금융당국이나서서부실채권만떼내어처리하는‘부실PF처리용
배드뱅크‘를만들기에이르렀다.
그런데,
단한곳,씨티뱅크는PF대출이전혀없다.
따라서부실채권도전혀없다.
2004년한미은행을미국의씨티그룹이인수할때실사팀은PF대출에대해면밀한
검토를했다.
그리고실사팀이내린결론은,
‘자기돈한푼안들이고토지매입부터건물완공까지빚으로만해결하는부동산
PF는이해할수없다‘며그대출을전면중단했다.
남의돈으로아파트를짓는한국의건설업체에대해‘배제’의결정을내린것이다.
신혼시절,아이가태어났을때,
그리고아이가둘이되고,그아이들이커졌을때,
아이들이나이가차서집을떠나고다시부부만남게되었을때,
우리는18평형,32평형,58평형,그리고다시32평형으로아파트를옮겨가며살았다.
두번은회사사택에서살았기때문에내가직접아파트를매입한것은네번이다.
모델하우스를보기위해장사진을이루고,
청약이별따기였으며,분양받은후그자리에서되팔아도엄청난차액을챙기던
‘아파트의계절’에나는한번도아파트를분양받은일이없다.
네번모두,우리가입주하려고했던아파트단지가일차입주를끝냈을때당시의
‘복덕방’을활용,매물로나온아파트중내가원하는위치를선택해매입했다.
나는언제나맨꼭대기층을선호했는데그건‘층간소음’이어떤것인지를알았기
때문이다.
층간소음은수명을단축할수도있다.
지금살고있는아파트도맨꼭대기층이며일차입주가끝난후매물로나온것을
복덕방을통해매입한집니다.
지금나는조용한꼭대기층에서절간같은고요함을즐기며풍요로운노후생활을
보내고있다.
일차입주가끝났을때매물이나오는이유는,
거개가‘잔금지불능력’이없거나,
은행대출로아프트를분양받았지만원금과이자부담이너무커서입주를포기하는
경우가대표적인것이었으며그건내가예측했던대로였다.
이렇게나온매물은위치를고를수있을뿐아니라분양가에서2에서3%까지싸게
살수있었다.
집값이크기때문에그건큰돈이기도했다.
말하자면아프트분양에관한한나는당시의큰흐름을완전히역행한것이다.
거기에는실물경제에대한나스스로의지식과기준과확신이있었기때문이다.
‘모든상품은완전한상품이된상태에서구매자가눈으로직접보고손으로만져
보면서골라살수있어야한다.‘는게그것이다.
그런데아파트건설업계는달랐다.
완제품인실물도없이계약금,중도금을받아땅사고,집짓는,땅집고헤엄치기로
돈버는것이었으며수요와공급의불균형때문에분양가는업자마음대로정하고
있었다.
어느모로보나그건‘불공정상거래’였다.
우후죽순처럼생겨난건설업체가5000여개,
지금아파트건설업체들이줄초상을당하고있는건그업보로보면된다.
전혀동정의여지가없는결과다.
모두가청약통장을들고뛰어다닐때,
일차입주후나오는매물을목표로한다는것은말처럼쉬운일은아니다.
그러나네번모두내예측은들어맞았고,분양가보다싸게,그것도동,호수를골라가며
아파트를매입했던것도사실이다.
거기에는분명용기도필요했겠지만그보다는‘불공정거래’에대한분노가실물경제에
대한지식과함께신념으로진화했었기때문이다.
한편,나는충분히그렇게할수있는경제지식과실력이있었지만아직까지단한번도
‘아파트투기’를한적이없다.
대부분의경우,아파트투기로챙기는차액은돈이없어막차를탈수밖에없는가난한
자들의피나는돈이다.
그걸갈취한다는것은실정법보다더무서운도덕적인범죄다.
종교를가진사람들이특히그러하다.
‘저희가신한켤레를받고궁핍한자를팔며가난한자의머리에있는티끌을탐낸다.’
아모스서(3)에있는경고의말씀이다.
한인간이‘내식대로살기’위해서는분명한‘가치관’이있어야한다.
내가평생법정을존경하는것은,
그분은자기의삶-생활로서그길을보여줬기때문이다.
그래서나는그분을‘큰스님’이라고부른다.
우리모두는함께,조화롭게섞여살아야한다.그러나모두가똑같이살이유는없다.
그것이남을해치는것이아니라면모두가다르게살아야한다.
그게정상이고그래야발전이있다.
휘둘리고쏠리는것은‘자기’가없기때문이다.
붕떠있는허깨비인생을걷어내고내가내인생의주인이되는삶을살아야한다.
스마트시대는더가파르게우리들을몰아갈것이다.
그흐름에서비켜서고,역류할수있는사람만이풍요로운자기인생을살아갈수있다.
우리모두에게는‘내식대로살권리’가이미주어져있지않은가.
그래서남은것은‘선택’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