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함께예술의전당에부속된한가람전시관에간일이있다.
전시된그림들을감상하고나오다보니한쪽에서광복50주년,조선일보창간75주년
특별기획전이열리고있었다.
그타이틀이‘이승만과나라세우기’였다.
나는별로마음이내키지않았지만경무대에서가까웠던숙명여,중고를다닌아내는
가까이에서이승만박사를자주뵈었다고하면서그기획전을보고가자고했다.
한코너에서,
나는발걸음을멈추고아주오래동안전시된문건들을살펴봤다.
그건한글,한문,영문으로된육필문서들이었다.
나는아직까지한사람이한글,한문,영어를그렇게잘쓴글씨를본일이없었다.
달필의경지를넘어‘명필’이었다.
그건내게하나의충격이었다.
16여년이지난지금까지도그때의깊은인상은그대로남아있을정도다.
그게이승만의필적이었다.
나는그때처음으로그가보통사람이아니라는것을깨달았다.
나는1957년5월에재학중징집되어사병으로전방부대에서군복무를마치고
1960년4월학교에복교,3학년이되었으며그해4월19일에절정을이루었던
학생데모에직접참가한‘토종4.19세대’다.
12년장기집권한자유당이이기붕을부통령으로당선시키기위해개표를조작했고
이에학생들이부정선거의무효와재선거를주장하며시작한반정부항쟁이
‘4.19혁명’이된것이다.
따라서내가가지고있던이승만에대한이미지는‘독재자’와‘분단국가의원흉’
정도였다.
그리고1995년2월,우연히보게된‘이승만의육필문서’는내가가지고있던
이미지의인간과는너무나다른,한위대한인간의‘힘’을느끼게했다.
그이후틈이나는대로자료들을모으고출판된책들을읽으면서이승만에대한
내생각이하나의작은조각보다못하다는것을깨달았다.
이승만에대한자료들을읽으면서가장강열하게받은인상은그의인간적인
‘탁월함’이었다.
지금의시점에서,
이승만이없었다면‘민주공화국대한민국’도없었다는게내결론이다.
이승만의‘세기적인안목과선택’이지금의민주국가이자경제대국대한민국을
탄생시킨것이다.
우남(雩南)이승만은,
1875년(고종12년)3월26일황해도평산에서가난한선비의외아들로태어났으며
3살때부모를따라서울로이사했다.
1894년배제학당에입학,선교사들에게영어를배웠으며,탁월한실력으로미국인들
에게한국어를가르치며가계도돕고,학교도졸업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이후개화사상에심취했으며기독교인이되었다.
그후서재필박사의지도하에협성회,독립협회등의간부로활약했으며,
1898년정부전복을획책했다는혐의로독립협회간부들과함께투옥되었으며
동지한명과탈옥을시도했으나체포되어사형선고를받았고,다시종신형으로
감형되어복역하던중1904년민영환의주선으로7년만에석방되었다.
이승만은감옥에있는동안영한사전을만들고있었다.
1904년겨울에미국으로건너갔으며,
조지워싱턴대학과하버드대학에서공부했으며1910년프린스턴대학에서박사
학위를받았다.
이대목에서우리가이해해야할중요한내용은,
이승만이세계최고의대학에서받은고등교육이그후세계를읽어내는분별력과
안목을가지게했다는점이다.
이점우리의‘건국’과깊은관계가있다.
애국애족하는‘방법’에서백범과차이나는이유가실로여기에있었던것이다.
백범의뜨거운애국심을의심할사람은아무도없다.
백범은해방된조국이분단이아닌통일정부로세워지기를열망했으며1948년
남한만의단독총선거를실시한다는유엔의결의에도반대했다.
백범은남북협상을위해북한에들어갔으나정치회담은실패로끝나고말았다.
백범은통일정부수립이현실적으로불가능하다는사실을인정할수없었던것이다.
우물안에만있었기때문이었다.
이승만은달랐다.
독립을위해국제무대를뛰어다녔던그는다가오고있는동서냉전시대를읽었으며
스탈린이결단코북쪽을포기하지않을것이라는사실도알았다.
무엇보다이승만은‘사회주의’의무서운독소에대한정치적이해가있었다.
선견지명과국제무대를읽어내는안목에서백범을앞서있었던것이다.
그는우물밖에있었던것이다.
1934년오스트리아출신의프란체스카와결혼했으며1945년광복이되자10월에
귀국,우익민주진영의최고지도자로독립촉성중앙협의회총재,민주의원의장등을
지내며좌익세력과투쟁,1946년6월남한단독정부수립계획을발표했다.
1948년제헌국회의원에무투표당선되었으며이어국회의장에피선되어대통령
중심제헌법을제정,공포하고국회에서대한민국초대대통령에당선,그해7월
24일에취임했다.
철저한반공주의자로서국내의공산주의운동을분쇄했으며철저한배일정책으로
일본에대해강경자세를견지했다.
유명한‘이승만라인’이그산물이다.
6.25전쟁이발발하자미국과유엔의도움을이끌어내어공산군을격퇴했으며,
1952년임시수도부산에서제2대대통령선거를앞두고야당세력이우세한국회에서
재선이어렵게되자자유당을창당,게엄령선포,반대파국회의원의감금등변칙적
방법으로직선제대통령에재당선되었다.
1954년유명한사사오입으로3선대통령이되었으며
1960년3월,부정선거로4선에성공했으나4.19를만나대통령직을사임,
하와이로망명했다.
1965년7월19일망명지하와이에서쓸쓸하게운명했으며시신은조국으로운구,
전국민의애도속에국립묘지에안장되었다.
독립운동으로파란만장했던우남이승만의일생이그렇게끝난것이다.
1945년8월15일의광복으로부터1948년8월15일의‘대한민국건국’까지의
혼란스럽고위험했던시기에대한학문적인정리는아직다끝났다고볼수없다.
학계에서는8.15광복으로부터이승만이귀국한10월16일까지를‘좌익의
득세기‘로정의한다.
실제로이기간동안가장활발하게움직인조직은여운형이주도한‘조선건국준비
위원회‘와박헌영의등장과함께’건준‘을계승발전시킨’조선인민공화국‘등
좌익성향의기구들이었다.
그들의목표는‘사회주의국가건설’이었다.
그들이성공했다면지금우리들은북한처럼살고있을것이다.
9월7일맥아더는,
‘북위38도이남의조선영토와존선인민에대한통치의모든권한은당분간본인의
권한아래시행된다‘는포고령을발표했으며,
8일에는미군7만2천명이인천에도착,총독부로부터남한에대한통치권을접수
하고12일부터아놀드소장이군정장관으로취임,미군정이시작되었다.
한편미국무부는프린스턴과하버드출신인똑똑하고고집이센이승만의귀국을
탐탁치않게생각했으며여권발급이취소되는우여곡절을겪은후10월5일에야
뉴욕을출발했다.
그들은미군정과이승만의마찰을예견했던것이다.
이승만은동경에서맥아더를두차례만났으며그는당시의군정장관이었던하지를
동경으로불러이승만에게소개했다.
하지와이승만의불화는유명한이야기다.
이승만은맥아더가내준그의전용기로10월16일김포공항에도착했다.
맥아더의이우정은6.25를통해서도이어진다.
1945년12월28일,
미,영,소3국외상이모스크바3상회의에서한국을5년간신탁통치하기로결정했으며
AP통신이전한이내용에접한이승만은
‘경악을느끼지않을수없다.
이제안이미국의대조선정책에있어한가지중대한과오가될것을지적하고자한다‘
며크게비판했다.
이승만은신탁통치를거부하고우선남조선만이라도임시과도정부를세우고장기적
으로통일정권을향해나아가야한다는입장을가지고있었다.
1948년7월17일,
국호를‘대한민국’으로하고대통령제를골자로하는헌법이공포되었으며사흘후인
7월20일에국회에서정,부통령선거가실시되었다.
이승만108표,김구13표,안재홍2표,무효1표였다.
1948년7월24일74세의이승만은중앙청광장에서초대대통령으로취임했다.
이승만의공과(功過)는역사가기록할것이다.
그러나한가지움직일수없는사실은구한말에태어난조선사람인이승만이
하버드와프린스턴이라는세계최고학부를통해19세기의드넓은세계를분별하는
높은식견과안목을가질수있었기에대한민국이자유민주주의정치체제와자본
주의시장경제를선택할수있었으며이것이바탕이되어지금의경제대국을이루
었다는사실이다.
2차대전이후100개가넘는나라들이생겨났다.
그러나유일하게등장한‘성공국가’는바로우리뿐이다.
한중견언론인이이런얘기를했다.
‘이승만과박정희두사람은세기적인지도자다.
근자에는이승만이라는인물이점점더크게보인다.
우리가눈으로볼수있는것대부분은박정희가만든것이고보이지않는기초,바탕은
이승만이만든것이다.
교육개혁,농지개혁,한미동맹,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기반등보이지않는대부분은
이승만의업적이다.그래서과소평가받고있다.
이승만없이는박정희도없다.‘
6.25전쟁의막바지,
북진통일을외치던이승만은휴전회담장에서한국측대표들을철수시켰으며,
휴전성립이기정사실화되자‘반공포로석방’이라는정치적승부수를던졌다.
미국은휴전성립직전이승만의요구대로‘한,미상호방위조약’을성사시켰다.
휴전거부와북진통일에대한이승만의의지를단념시키는길은그것밖에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이후,
‘한.미동맹’은가장튼튼한안보의큰울타리가되어우리가경제발전에만몰두할수
있는결정적인안전핀이되었다.
이승만이깔아놓은한,미동맹이라는바탕위에서박정희의’경제전쟁‘은승리를
걷을수있었던것이다.
이승만없이박정희도없다는얘기가그뜻이다.
우리들에게있어실로두사람은‘세기의지도자’인것이다.
그누가이사실을부인할수있겠는가.
중정부장김재규의총탄을맞은박대통령을검시(檢屍)했던군의관들은,
처음엔그게누군지를몰랐다.
그의가죽벨트가너무낡아해져있었기때문이었다.
이발사가그의구멍난티셔츠를보고눈물을흘린일도있다.
‘박정희대통령은오늘의한국을있게한분이자기초를닦은분이다.
그것은아무도부인하지못한다.
장기집권이문제였지만그는굉장히소탈하고청렴했다.
부정부패에대해철두철미했으며가족과측근들에대해서도굉장히엄격했다.‘
전국회의장이만섭의회고다.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2월1일에착공하여1970년7월7일완공된고속도로로서부산광역시
금정구구서동에서서울특별시서초구양재동에이르는길이416킬로,너비22미터,
왕복4-8차선도로다.
1971년8월31일노선이름이서울부산간고속도로(고속국도)로지정되었다.
2년5개월만에완공된건국이래가장컸던이공사는,
연인원892만여명이동원되었으며165만대의각종장비가투입되었고,
77명이공사중사망했다.
공사비는당시기준으로429억원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한국의‘대동맥’이되어‘물류’를해결했으며수출입국의핵심적인
기능을담당했다.
이도로의건설을맨앞에서반대한게김대중이었다.
1945년12월6일의미군정법령제33호(귀속재산처리법)에의해한국내의모든
일본인재산은미군정청에귀속되었으며1951년조인된센프란시스코대일강화조약
에서일본은이조치의합법성을추인했다.
대한민국정부의수립과함께1948년9월한미간의재정및재산에관한최종협정으로
일본인재산은다시한국정부로이양되고,일본의추인으로일본이한국정부에요구해
오던대한청구권은무효화됐다.
이로서,한국정부의대일청구권문제만남게된것이다.
정부는이문제의타결을위해7차례의회담을계속했으나한국이요구하는8억달러
와일본이제시한7000만달러의큰차이때문에좀처럼의견이좁혀지지않았다.
마침내1962년11월12일김종필특사와오히라외상간의비밀회담에서합의를도출,
‘재산과청구권에관한문제해결과경제협력에관한협정’이정식으로조인되었다.
재산청구권에대해서는일본이무상으로3억달러를10년간지불하고,경제협력으로
정부간의차관2억달러를연리3.5%,7년거치20년상환조건으로10년간제공하며
민간상업차관으로1억달러이상을제공하기로했다.
합계6억불,
박정희에게이‘종자돈’은가뭄의단비였으며경부고속도로와포항제철로상징되는
산업화의바탕이된것이다.
포항제철은고로(高爐)를갖춘일관제철소로,
세계적인규모와기술,품질을인정받고있는한국의대표적인장치산업이다.
박정희가박태준에게말했다.
‘임자,철은산업의쌀이야,
쌀이있어야밥을지어먹지않겠나.
자네가제철소하나지어줘야하겠어.‘
박정희의구상은처음부터중화학공업이었으며여기에는방산부분이포함된다.
정말이지철-쇠는산업의기본이다.
경부고속도로와포항제철은지금의대한민국이경제대국이될수있었던절대조건
이었다.
그걸구상하고실현한게박정희다.
그래서가난의대물림을끊은,세기의지도자인것이다.
그는정기적으로열린‘수출진흥확대회의’에한번도빠진일이없다.
부존자원이없는우리의살길이수출에있음을알았기때문이었다.
이승만과박정희,
그들의공과(功過)는역사가기록할것이다.
또그래야한다.
부풀릴것도감출것도없이있는그대로평가받아야한다.
그러나그들이이룩한업적은또그대로인정받아야하고그게공평한것이다.
이제건국대통령이승만의동상이광화문에세워질때도되었다.
그것은우리들의‘정체성’의상징이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