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와 신앙의 본질.
이글은지난10월30일,연세대학교‘루스채플’의한모임에서가졌던신앙강좌의내용을요약,정리한것임.

서론;
본질(本質)은사물과생각의바탕을이루는본래의성질을뜻한다.여기에대해변질(變質)은그본질이상하거나썩어서바탕이변한것이다.따라서본래의것이딴것이되는경우다.

본강의에서‘교회와신앙의본질’을논하는것은본래의것을되찾고,되돌아가서‘회복’을기하기위해서다.
먼저하나의성경적기준을설정한다면,고린도후서4장18절이적절할것이다.‘우리는보이는것에눈길을돌리지않고보이지않는것에눈길을돌립니다.보이는것은잠시뿐이지만보이지않는것은영원하기때문입니다.‘‘눈길을돌리다’는개역과표준성경번역에서는‘바라다,바라본다’로되어있다.
이말의본래뜻은,skopos로서‘표적’을보다,어떤것에대해‘심사숙고’한다는것이다.말하자면어떤것에대해‘집중,집착’한다는뜻이다.
보이지는않지만존재하는것이신앙의내용이다.하나님의말씀과진리가그것이다.예수는니고데모에게그것을‘바람’으로설명하신다.
근자우리앞에는,보이지않는것을추구하는본래의교회와,보이는것을추구하는변질된교회가있다.
개신교의원로이신숙대의이만열교수는,‘한국교회가왜이렇게혼란스럽고부패하고있는가.지금복음의샤머니즘(미신)화가광신적으로진전되고있어도이를분간할영성과지성을다잃어버렸다.‘고질타했으며,‘한국사회에서교회가아편중독에걸린것처럼만신창이가되어있어도이제는그것을자각조차하지못하고있다.‘고고발한다.
상대적으로보이는것을추구하는,변질된교회가더많은게사실이다.더심각한문제는‘악화가양화를구축하는법칙’에따라변질된교회가본래의교회를잠식하고있는현실이다. 따라서우리는위기의식을가져야하며그만큼본래의것에대한성찰이있어야한다.

1.교회와예배당.
신앙생활에서‘단어’는매우중요하다.진리라해도결국은인간의언어로표현되기때문에더그렇다. 한단어가가지는고유의뜻이왜곡되면내용도왜곡된다.대표적인단어가바로‘교회’다.사전적인의미는,기독교공동체와예배를위한건물이교회다.때문에이두가지서로다른개념은하나로섞여서쓰이고있으며그만큼큰왜곡이일어난것이다. 그러나신학적으로교회와예배당은전혀다른,함께쓸수없는개념이다. 교회는그본래의단어가ekklesia다.‘부르심을받은사람,무리’라는뜻이다.기독교의‘신앙공동체’가곧교회인것이다. 그리고그신앙공동체가예배를드리고기타조직적인행사를위해사용하는건물이예배당이다. 이제는이서로다른두개의단어를분명하게나누어쓸때가됐다.큰예배당이곧큰교회는아닌것이다.오히려그반대일수도있다.둘이섞일때,맘모니즘-물량주의가나타난다.대표적인현상이변질된교회들의‘기복신앙’이다. 예배당은없어도교회는있을수있는게기독교신앙내용이다.

2.교리-敎理-dogma.
기독교교리는기독교의원리와이치에대한성경적해석이다. 대표적인것의하나가지금도일부교파가주장하고있는‘축자영감설’이다.말하자면성경은그글자하나하나가하나님의영감에의해쓰여졌다는주장이다.물론거개의교파가주장하는영감설-감동설이더널리받아들여지고있다. 이로서알수있는것은,교리는‘성경에대한상대적인간의주장’이라는점이다.하나의교단,교파가그교단과교파의이름으로‘교리’를말한다해도그것역시인간의‘성경해석’인것이다. 어떤인간도절대적인입장에서성경을해석할수는없다.그래서성경은읽는사람에따라자기대로의해석이가능한것이기도하다. 우리들이일반적으로받아들이고있는‘예수의초상화’가있다. 그러나그초상화가아무리오래된것이고유명한것이라해도그건단지화가의‘상상화’일뿐이다.예수를직접본사람도없고,예수의사진은더더구나없다. 최근예루살렘의한토목공사장에서예수시대유대인의해골이발견된일이있다.전문가들이컴퓨터에의한최신공법과기법으로그얼굴을복원했다.그얼굴은우리가알고있는예수의초상화와는전혀다른,옛유대인의평범하고건강해보이는농부의얼굴이었다. 교리에얽매이고절대시하면기독교는계속갈라질수밖에없다.그러나어떤교리라해도그것이‘성경’을뛰어넘을수는없다. 그래서우리모두는건전한신앙생활을위해모든교리에대해마음을열고있어야한다.어떤교리에도종속될이유가없다.모든교리는그긍국적인목적이우리들의신앙생활을돕는데있기때문이다.

3.은혜.
모든기독교인들이가장많이듣고말해지는단어가‘은혜’다.그리고이은혜라는단어만큼크게왜곡된표현도달리없을것이다. 우리에게있어은혜는‘도움을베푼다’는사전적의미로쓰이고있는게사실이다.일상에서흔히쓰고있는말-언어는언제나시대정신의반영이다.은혜가우리일상에서쓰이는내용그대로기독교신앙용어로전이된것도사실이다. 놀라운얘기이긴하지만, 기독교인중이은혜라는단어에대해정확한,신앙적답변을할수있는교인은거의없다.우선제대로배워주지않았고,감동,감격,카타르시스를은혜인줄로오해하고있기때문이다.여기에는한때교회를휩쓸었던‘심령대부흥회’가한몫을한바있다. 은혜라는신앙용어에대해이를제대로아는길은올바른신앙생활을할수있는첫걸음이된다. 성경에서사용하고있는단어는지금우리들이사용하고있는사전적의미와는그근본에서아주다르다.성서번역의한계를보여주는사례의하나이기도하다. 은혜는그원문이xarisma다.이단어의어근은xara,곧‘기쁨’을뜻한다.더적극적으로표현하자면‘깨달음에대한기쁨’이xarisma다.성경말씀을읽으면서깨닫는기쁨,설교를들으면서깨닫는기쁨,기도하면서깨닫는기쁨,그것이성경이말씀하는‘은혜’다.그리고이은혜는거저받는것이기에‘은총’이라고도한다.

4.구원.
은혜와똑같이교인들이제대로설명못하는단어가바로구원이다. 구원은soteria라고한다.그환경이완전히바뀐상태를의미한다.물에빠졌을때의환경은곧죽을수있는것이다.그런데그사람이뭍으로옮겨졌다면그건살았다는의미다. 그만큼전적으로,질적으로그사람의환경이바뀐것이곧구원이다.그래서성경은이를‘거듭난다’로표현했다. 사울이바울이된게그대표적인사례다. ‘겉사람은후폐하나속사람은날로새롭다.’고후4장16절의말씀이그뜻이다.그래서구원은전향-轉向,그방향을바꾸는것이다. 왼쪽으로가던사람이오른쪽으로,북쪽으로가던사람이남쪽으로그방향을완전히바꾸는것이구원이다. 입으로는신앙생활을하는데그일상에서전향이없다면그건거짓이다. 쉽게말해,구원-전향은가치관의변화다.돈이목적이었는데그게수단이된케이스가구원이다.내것이아니라면뭉치돈도돌처럼보여야되는수준이다. 구원은일순간에일어날수도있고,점진적으로변화되어갈수도있다.전자는쉽게식을수있지만후자는그렇지않다.날로새로위지기때문이다. 진정한구원은‘성장하는신앙’이다.그신앙이크게자라면비로서그때,기독교인으로서의‘진리안에서의자유’가무엇인지깨닫게된다.기독교2천년역사를지탱한인간적조건이바로그‘자유’였다.

5.주후49년에서57년사이.

이기간은바울의제2차전도여행기간이다.시기적으로‘기독교’가탄생된중요한기간이기도하다. 비로서이기간을거치면서유대교의한종파로인식되었던원시교회가그신앙적정체성을확립한게바로이기간이다.그중심에사도바울이있다.당시최고의교육을받은엘리트였던바울은사실상의기독교창시자이기도하다. 예수를향한그의사랑과열정은그무엇으로도막을수없었다. 안디옥에서있었던베드로와의충돌이기록으로남있는‘율법과믿음’의진검승부라고할수있다. 바울은스스로를율법을지키는데흠이없는사람이라고했었다.그는히브리인중히브리인으로율법에정통한철저한유대교신자였었다. 율법에대한바울의수준높은이해는기독교신앙이율법과결별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게사실이다.바울이아니었다면원시기독교공동체가유대교종파에서독립하기는어려웠을수도있었다. 6.갈라디아서. 신약성경27권가운데가장먼저쓰여진책이갈라디아서와데살로니가전서다. 나는개인적으로갈라디아서가더먼저쓰여졌다고믿는사람이며평생을통해갈라디아서를연구해왔다. 아마도갈라디아서는주후50년경,에베소에서쓰여졌을것이다. 최초의복음서인마가복음이60년대에쓰여진것을생각하면10년의차이가있다. 갈라디아서의내용적핵심은,율법과믿음의문제다. 예루살렘에있는유대인중심의기독교공동체는이방인기독교인에대해율법의준수와할례를요구한다.일부지역에서성인이할례를시행하다위생적인이류로죽는경우까지있었다. 바울의강력한주장은,유대인이아닌이방인교인들에게율법은적용될수없으며더더구나할례의요구는있을수없다는것이었다. 바울의신념적주장은,율법은그리스도가오시기까지‘몽학선생’이었다.어린아이를가르치는선생이라는뜻이다.무엇보다인간이율법의준수를전제로는구원받을수없다는게그의주장이기도하다. 인간의구원은‘오직믿음’이며,하나님께서그믿음을보시고‘의롭다고인정하시는’역사를통해서만이루저질수있다는설명이다.우리는이것을칭의(稱義)라고부르며,이신득의(以信得義)라고도부른다. 모든기독교인들은,갈라디아서2장16-21절을암기할정도로읽어야한다. 인간과하나님사이의올바른관계가어떤것인지가장정확하게설명하는대목이다. 마틴루터는종교개혁당시의구호,solafide-오직믿음으로,를여기에근거해서강력히주장했다.우리는갈라디아서와함께복음서의오리지날인마가복음을생명의양식으로알고읽어야한다. 성경은자기가스스로읽어야한다.특히갈라디아서는6장밖에안되는짧은글이기때문에단번에다읽어야한다.마가복음에정통하면마태와누가에얼마나많은구전적군더더기들이붙어있는지를저절로알게된다.공관복음서에서예수의말씀은,그20%정도만이주께서직접하신말씀임은이미신약학계가당연하게인정하고있는사실이기도하다.

7.신앙생활이란무엇인가.

다알것같은데대답하기어려운게이질문이다. 사실,이질문에대해답변할수있다면그건이미상당한신앙적수준에가있는사람임에틀림이없을것이다.그래서언제나이질문은우리모두에게어려운질문임에틀림이없다. 그러나모든질문에는답이있어야한다. 신앙생활이란,물리적으로는주변에아무도없지만,자기가혼자가아니라는것을아는것이다.말하자면‘불꽃같은하나님의눈’이나를지켜보기있음을아는것이다.보통사람과신자의근본적인차이의하나가바로이점이다. 다음은그하나님앞에서예수의정신,예수의마음,예수의가르침에따라사는것이신앙생활이다.그래서하나님을알고,예수의가르침을알고있어야된다. 예수에대해아는것과,예수를아는것이얼마나다른것인지를모르면불가능한생활이기도하다. 예수를알기위해서는직접,적극적으로접촉하지않으면안된다.성경66권을다읽고,심지어는노트북에옮겨썼다해도인간예수를만나지못했다면그건도로에불과할뿐이다. 예수를만나는길은성경밖에없음도인정해야한다.굿같은부흥회에서감격적으로만난건카타르시스의‘자기’임을알아야한다. 예수는그런곳에는계시지않는분이다.예수는예나지금이나우리의일상안에계시는분이다.그래서일상에없는것은그게무엇이든거짓이다.

8.바로메타-barometer.

사물의수준이나상태를아는데기준이되는것,그게바로메타다. 나스스로가내신앙상태를객관적으로평가할수는없다.아무도거울이없으면자기얼굴을보지못한다. 이때는그거울이나를아는수단이되는것이다. 내가내신앙수준에대해알려면다른사람을통하는방법이있다.타인,즉남이어떤모습으로보이는가를점검해보는것이다. 무관심하게보는경우가대부분이며,어떤때는경쟁자로,또어떤때는적으로볼수있는게타인들이다. 진정한의미의기독교인은,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자들은타인이‘이웃’으로보여야한다. 가장큰계명이,하나님과이웃을네최선을다해사랑하는것이기때문이다. 사랑하는방법은사람마다선물로받은탈란트에따르면된다.모두가똑같을수도,똑같을필요도없다.서로다른것이그다양성때문에더효율적이다. 공통점은,이웃을사랑하는방법은모두가서로다르지만,함께‘선한사마리아사람’이되는것이다.다른사람이어떻게보이는가,그안에내신앙상태에대한정직한대답이있다.왜주께서선한사마리안사람에대한예화를말씀하셨는지늘명상해야한다.그게누구든먼저예수를사랑하지않으면이웃도사랑할수없다.사람이‘예수를믿는다’는사실은그렇게중요하다.

9.의무-義務.

사람으로서당연히해야하는일이의무다. 따라서신앙적의무는모든그리스도인의책무이기도하다.지금의교회가본래의것과비교할때전혀딴것이된것은,인간이부족하기때문이다.우리모두는먼저이사실을인정해야한다. 교회라는보이는조직을움직이는인간의대부분은우리사회에서삼류들이다. 무인가불법신학교가쏟아내는불량인력이교회를어느정도로훼손했는지는그정도를알수가없을정도다. 이만열교수의지적대로자기의깊은병에대해그것을진단할수있는자정능력이상실된것이다.지금의한국교회와같은혼란과타락,부패가어제오늘의일은아니다.기독교의긴역사를통해교리때문에벌어진전쟁만도부지기수다.그때마다교회를지키고신앙을물려준신앙의선배들은모두가보통사람들이다. 그들은자기들이해야할일을알았던것이다.그게신앙적의무다.그신성한의무는오늘우리에게도요구되고있다.그래서보이는것과보이지않는것을구분하는신앙적안목이있어야한다. 오늘,서문에서부터의무까지10가지키워드로설명을시도한것은,우리앞에주어진문제들을단순화하고,쉽게풀어감으로서이해를증진시키고,무엇보다명료하게기억하게하려는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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