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예수.
BY yorowon ON 12. 19, 2011
소설‘개미’로잘알려진프랑스의작가베르나르베르베르가이런말을했다.
‘나는부처를빙그레웃는모습으로형상화하는동양전통을좋아한다.
서양의유일신교에서는신격을가진존재가아주근엄한모습으로나타난다.
내가보기에예수그리스도는유머를무척좋아했던분이다.
그런분을설교자와심판자로만간주하는것은유감스러운일이다.
나는고통을요구하는종교,
스스로에게채찍질을가하라고요구하는종교를믿지않는다.
나는십자가에못박힌예수형상을볼때마다조금불편한기분을느낀다.
내가좋아하는예수는‘너희가운데죄없는자가먼저돌을던져라’라고말하는예수,
심판하지않는예수,
참된인간의면모를지닌예수다.‘
전통적인카톨릭국가에서태어나고성장한사람으로서는대단히파격적인얘기다.
그가상상력이풍부한작가이기에가능한일이기도하다.
움베르토에코의‘장미의이름’에는,
평소웃지않는수사가이런말을한다.
‘성경에보면주께서웃으셨다는기록이없다.’
그래서자기도웃지않고근엄한얼굴로일관한다고주장한다.
근본주의신앙은이렇게무섭다.
우리가예수에대해알수있는기록은공관복음서라고부르는마태,마가,누가복음과제4복음서인요한복음뿐이다.
요한복음은희랍철학으로예수를해석한책이기도하다.
물론신약성경27권이모두예수에대한내용이긴하지만인간예수에대해집중적으로기록한책은네개의복음서들이다.
왜복음서에는웃고있는예수가없을까.
정말예수는웃지않는분이셨을까.
바리세인들은예수에대해
‘죄인들과먹고마시기를즐기는사람’이라고했다.
그러한회식자리,즐거운식탁에어떻게웃음이없었겠는가.
그분은울기도했고,웃기도했으며분노하고고통스러워했으며하나님을향해탄식도하신분이다.
인간의희노애락은예수에게도있었던일반적인정서인것이다.
그것이기록되지않았을뿐이다.
분명한것은,복음서들은‘예수평전’이아니라는사실이다.
복음서가기록된목적은처음부터제한적이고분명했다.
그하나는,예수는구약에서예언된‘오실분-메시야’이며,
그분의탄생과삶은모두구약의말씀이이루어진것이라는주장이다.
다른하나는,그분은하나님의아들이자이스라엘의다윗왕가를잇는존엄한존재라는점이다.
여기에는대단히배타적인내용이포함되는데그건당시의다른신들-우상들과의경쟁이었다.(대개는바알신이우세했다.)
유대교의한분파에서기독교로그정체성을다져나가는과정에서초대교회는예수의신성과다른신들과의차별성을강조하지않을수없었던것은충분히이해할수있는일이다.
최초의복음서인마가는예수의어록과전승을편집,핵심적인내용들을기록했으며,마태와누가는마가의내용을텍스트로하여자기들이수집한구전전승을첨가하는방법으로겹치는부분과전혀다른내용으로복음서를기록했다.
공통점은예수의신격은크게강조되었지만예수의‘인간성’은배제된점이다.
그래서복음서안에는근엄한하나님의아들은있어도살아숨쉬는‘나사렛청년’은존재하지않게되었다.
우리들이어렸을때,
크기스마스가다가오면모두가‘싼타할아버지’를목이빠지게기다렸다.
선물때문이었다.
지금생각해도그건그지없이아름다운추억이다.
그러나그어린아이가장성한후결혼해서자녀를낳게되면이번엔자기가싼타할아버지가돼야한다.
한인간의성장도이와마찬가지이며물론신앙생활도다르지않다.
히브리서5장13절에있는말씀이그뜻이다.
‘젖을먹어야할사람은아직어린아이이니옳고그른것을분별할능력이없습니다.
그러나성숙해지면단단한음식을먹게됩니다.‘
주일학교에열심히다니던어린이가장성한후교회를떠나는일이그래서생긴다.
교리로포장되고,교조적으로화석화된예수로는그들을붙잡지못한다.
말하자면조직화된교회가만든교리들은견고한‘이끼’가되어‘인간예수’를가리고있기때문이다.
‘접촉’이차단되는것이다.
‘죄없는자가먼저돌로치라’고말하는이탁월하고놀라운인간예수를만날수없다는것은그래서큰비극이며손실이아닐수없다.
나는모태신앙의장로교인이다.
선대로부터장로교가정이었기에나도장로교인이된것이다.
주일학교에열심히다녔고,중,고등부를거쳐대학생부와청년회에있었지만장성했다고해서교회를떠나는일은없었다.
그렇게70평생을그리스도라하는예수를믿고있다.
내가가졌던‘신앙적의문들’에대해승복할만한답변을들었던일은별로없다.
대답역시다시교리였고,전통적으로내려오는근본주의적해석뿐이었다.
그렇다면‘교리’란무엇인가.
교단,교파마다같은사안에대해서로다르게주장하는이유는무엇일까.
그모든것이성경에대한인간의‘상대적해석’때문이다.
말하자면생각과의견의차이인것이다.
엄격히말하면인간에의한성경의절대적해석은존재할수없다.
인간이상대적존재이기때문이다.
그래서나는성경을열심히읽어봤고,특히신앙생활에서중심이되는마가복음과갈라디아서는그것이기록된언어인헬라어로읽는다.
나는나나름대로대표적인질문들을만들어봤고나나름대로해석을시도해봤다.
가장큰이유는‘인간예수’에게다가서기위해서다.
진심으로‘나사렛청년’을만나보고싶었기때문이다.
예수는‘나사렛’에서요셉과마리아사이에태어난아들이다.
그분은베들레헴에서태어나지않았다는게내생각이다.
예수가베들레헴에서태어났다고말해야하는이유는,미가서의예언때문이다.
‘유대땅베들레헴아,
너는결코유대의땅에서가장작은고을이아니다.
내백성이스라엘의목자가될영도자가너에게서나리라.‘(미가서5:1)
예수가유대인의왕,메시아가되기위해서는반드시베들레헴에서태어나야했던것이다.
그러나마태13장53절이하를읽어보면,
예수가고향마을의회당에서가르치실때,고향사람들의반응은그가나사렛사람임을반증한다.
‘저사람은그목수(요셉)의아들이아닌가.
그모친은마리아요그형제들은야고보,요셉,시몬,유다가아닌가.
그리고그누이들도모두가우리동네사람들이아닌가.‘
이기록대로라면예수는최소한7남매의맏이가된다.
한편,성령의잉태로요셉과의관계를차단한복음서기자들이‘요셉의긴족보’를인용,
예수가다윗왕가의대를잇는인물임을강조하는것은큰모순이아닐수없다.
나는시나이반도에서차에서내려그열사의땅을오래동안걸어봤다.
나귀하나에산모와갓난애기를태우고갈수있는길이아니었다.
카이로에있는‘예수피난교회’역시불확실한전승,전설이만들어낸흔적인것이다.
의도가나쁜것이아니라해도마찬가지다.
마태복음1장에있는‘성령잉태’와누가복음2장의‘예수탄생’기사는복음서의오리지날인마가에는없는기사들이다.
구전전승이채택된대표적인케이스라고할수있다.
신약성경27권중그기록자의수준을기준한다면단연바울이으뜸이다.
그는당시로서는최고의교육을받은엘리트였으며유대교와율법에정통한바리세인이었다.
복음서에비해한세대이상먼저기록된갈라디아4장에서바울은예수탄생에대해아주일반적이고간단한기록만남기고있다.
‘그러나때가찼을때
하나님께서당신의아들을보내시어
여자의몸에서나게하시고율법의지배를받게하셨다.‘
여기서여자-awoman-gounaikos는보통가정의평범한주부이며,한남편의아내인것은물론,누가4장에서는‘과부’라는뜻으로도쓰이는보통명사다.
신비한잉태,탄생과성모마리아에대한개념은바울의신앙-교회에는없었던것이며시간이지나면서어떤필요에의해만들어진것임을알수있다.
나사렛예수는시간의흐름과함께수많은사람들의입을통해전승되면서‘인간예수’는사라지고웃지않는‘근엄한신’으로변했다.
그래서전통과조직,견고한교리안에갇히고말았다.
누가복음4장에보면,
예수가고향나사렛에서안식일에회당에들어가이사야서의두루마리를읽는대목이있으며,요한복음8장에는땅바닥에무엇인가를썼다는기록이있다.
2000여년전,팔레스틴에는약70만명의인구가거주했다고한다.
당시에는종교지도자,귀족등극소수를제외한대부분의사람들은문맹이었다.
이러한형편은중세까지도마찬가지였다.
나는개인적으로예수도문맹이었다고생각한다.
나사렛이라고하는변방의시골목수가문맹인것은당연한일이기도하다.
당시의형편을기준할때그게상식적이기때문이다.
이슬람의창시자인무하마드도문맹이었다.
한편,
예수와그주변에는늘바리세인들과의대치장면이계속이어진다.
그들은예수를공격하고,예수는그들을공격한다.
개인적인생각으로는예수의가까운인척중상당수가바리세인이었기때문에이런기록들이많은게아닌가한다.
예수는그들을통해그들의위선을잘알고있었을것이다.
세례요한과의관계를생각하면예수는유대교에서도‘에세네파’에가까웠던것같으며
전도자가지팡이이외에는몸에아무것도지니지말라는가르침을읽으면예수당시크게활동했던희랍의‘견유학파’로부터많은영향을받았을것이라는생각도하게된다.
당시가그레꼬-로망의시대임을감안하면더그렇다.
가장역설적인사실의하나는,
기독교의창시자로불리는예수가사실은‘교회’에대해아무것도몰랐다는점이다.
종교로서의기독교는예수사후바울이만든것이다.
그는유대교의한종파가될수있었던예수의종교를독립된기독교로만든사람이다.
마가8장37절이하에보면,
‘너희는나를누구라고생각하느냐’고예수가묻자베드로가
‘선생님은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라고간단하게대답한다.
그러자예수께서는자기이야기를아무에게도하지말라고단단히당부한다.
그런데병행구인마태16장에보면이간단한대답뒤에
‘잘들어라,
너는베드로라내가이반석위에내교회를세울터인즉죽음의힘도감히그것을두루지못할것이다.또나는너에게하늘나라의열쇠를주겠다.네가무엇이든지땅에서매면하늘에서도매여있을것이며땅에서풀면하늘에서도풀려있을것이다.‘라는긴첨가부분이나온다.
사실그때예수는‘교회’라는존재를모를때이며이부분이예수의말씀이아니라나중누군가에의해첨가된것임은이미신약학계에서결론이난부분이다.
예수와무관한이허구위에로마카톨릭이서있다는것은커다란아이러니가아닐수없다.
그래서로마카톨릭은지금도‘성경’보다는‘전통’을더우선하고중요시한다.
기반의문제가걸려있기때문이다.
기본적으로예수는유대교의개혁을주장한분이다.
그분은그것이자기의사명임을깨달았던것이다.
그대표적인기사가요한복음2장에있는‘성전정화’기사다.
밧줄로채찍을만들어짐승과장사꾼들을몰아냈으며‘내아버지의집을장사하는집으로만들지말라’고했다.
‘이성전을허물어라내가사흘만에다시세우겠다‘고도했다.
이과격한행동이그의죽음을재촉한사건이된것은말할것도없다.
지금까지의내생각은지극히개인적인것들이다.
똑같이다른분들의다른생각도있을수있으며또존중받아야한다.
우리모두는예수에게더다가가기위해함께열린마음을가지고있어야한다.
나의이런생각들은내신앙생활에어떤영향을미치는것일까.
고백하건데‘이끼’를걷어낼수록인간예수는더가까이내게다가왔으며그의말씀들은더큰울림이되어나를사로잡는다.
‘죄없는자가먼저돌로치라.’
인류역사상이렇게놀라운말씀을한분은그분하나뿐이다.
그래서사람들은그분을‘하나님의아들’이라고신앙고백했으며‘예수는그리스도’라고외치는것이다.
이번성탄절에는더많은분들이더많이‘인간예수’에대해생각하고그분을만날수있었으면좋겠다.
‘나사렛예수’는우리들생각보다훨씬더가까이계시는분이다.
주여,나는당신에게만소송하나이다-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