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돌아오기위해떠나는길이다.
돌아오지않는길이라면그건망명이다.
여행은사람을키운다는말이있다.
여행은인간의안목을깊고넓게열어주며생각의틀을바꾸게하고사물을이해하는
능력을높여준다.
특히해외여행은다른땅,다른사람들,다른문화를통해사람을변화시킨다.
여행을많이한사람들은사소한것에집착하지않는다.
좋은옷,보석,비싼가구,큰집,큰차가별의미가없다는것을알게된다.
마지막에남는것은그것들이아니라여행이기때문이다.
여행은,특히해외여행은젊었을때해야된다.
나이가들면비행기를타는게어렵기때문이다.
같은노년을살아도여행을많이한사람들은그정신생활이더없이윤택하고풍요롭다.
반추할것이많기때문이다.
그것은더없이값진자산이기도하다.
젊었을때여행을많이해야한다.
특히해외여행을많이할일이다.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에가기위해빠리공항에서비행기게탑승하면이미거기엔깊이배인아프리카
냄새가짙다.
아마도그건그들이즐겨쓰는향신료와모로코인들의몸에서나는특유의향토적인
냄새가합해진것이리라.
일단마그레브지역에투입한여객기는다른노선으로보낼수없다는얘기는그래서
이해가되었다.
카사블랑카는불어로‘하얀집’이란뜻이다.
대서양연안에위치한모로코최대도시이며본래는베르베르족이세웠던어항이었는데
1468년파괴된옛도시안피의자리에포르트갈인들이새도시를건설했다.
1757년모로코술탄에게점령되었으며
1907년프랑스의식민지가되었다.
1912년이후료타원수(元首)에의해근대적인항만과도시가건설되었다.
모로코수출입물량의70%이상을취급하고있으며국제공항도있다.
영화‘카사블랑카’의촬영지로도유명한곳이다.
공항에내려입국수속을마친후출입구까지의공간을걸어가노라면앞에눈부시게
아름다운자그마한아랍식아치문이나타난다.
나는수많은공항들을드나들었지만카사블랑카의이아치문보다더아름다운
출입문을본적이없다.
대부분의방문객들은잠시라도멈춰서서그황홀하게아름다운아치문을볼수밖에
없다.
특별한장식도없는,지극히평범한그작은아치문은팽생을통해내뇌리에
각인돼있다.그렇게아름다웠다.
다음이‘하산2세모스크’.
카사블랑카바닷가에세운이불루모스크는현대식건축으로아름답기그지없으며
그크기는세계에서세번째다.
더인상적인것은모스크내부의바닥이다.
두꺼운유리로깐바닥밑으로는밀려왔다나가는바닷물이그대로보인다.
수많은모스크를봤지만이렇게아름답고독특한모스크는처음이었다.
그래서카사블랑카는어제나다시가보고싶은곳이기도하다.
투우.
마드리드의플라자데토로스엔라스반떼스투우장이있다.
2만여명을수용하는이투우장엔벌써사람들로붐비고있었다.
그곳에도착해서알게된사실은같은투우장이지만그늘쪽에있는좌석과햇볕이
드는좌석은그값에서차이가컸다.
그리고투우장에입장할때방석을하나씩준다.
계단식좌석이차고딱딱한시멘트이기때문이다.
한번입장하면여섯번의투우를구경하게된다.
오직투우만을목적으로사납게키운무게450-650킬로의3,4년생의검은황소가
먼저투우장에나타나는데,
그때관중들이엄지를위로올리면투우가시작되지만밑으로내리면서푸에라,푸에라
(나가라)라고외치면소를바꿔야한다.
그날도빈약해보이는소한마리가쫓겨났다.
스페인에만있는그소들은보기만해도무시무시했다.
내게있어직접투우장에서투우를본다는것은참으로놀라운경험이었다.
그건전혀다른세상이었다.
책에서읽었거나영화에서본일은많지만
직접투우장에서,투우에열광하는스페인사람들사이에서투우를본다는것은
흥분을감추기어려운시간이었다.
투우는격열한싸움이었으며투우사의기술은생명을건묘기였다.
날카로운작은칼들로등을찔러소를흥분시키고결국은긴칼로심장을찌르는
과정들은생소한광경이었다.
소가죽으면귀와꼬리는투우사에게주고,
두마리의말이끌고나가는몸통은대학기숙사등에보내어식용으로쓴다고했다.
한국인으로서투우를직접관전한다는것은사실특이한경험이다.
그건너무나생소한‘다른문화’였다.
결국여행은다른문화와의접촉이아니겠는가.
또하나,마드리드엔엄청큰축구장들이많았다.
그게모두개인들의소유였으며수많은축구클럽들이임대해쓴다고했다.
스페인축구의저변을볼수있는기회이기도했다.
인도에서밥먹기.
인도의대표적인IT도시벵갈로루를떠나동고트산맥을넘은첸나이행버스는
시골의어떤마을에멈춰섰다.
점심식사를하기위해서였다.
우리부부가들어선식당은육식이가능한전형적인시골식당이었다.
인도에는채식만하는식당이따로있다.
밥을달라고했다.
식탁은표면이거무튀튀한플라스틱이었다.
초등학교5학년정도의남자애가물통을들고오더니유리를닦을때쓰는도구로
식탁위를닦았다.
그리고는또다른놈이나타나더니커다란바나나나무잎사귀를우리앞에하나씩
놓고갔다.
다음놈은큰그릇을들고와선그잎사귀위에불면날아갈것같은밥을퍼놓고갔다.
다음은바퀴달린쟁반이다가오더니스테인레스로만든작은종지10개를우리
두사람사이에펴놓고갔다.
그런데아무리살펴봐도숟갈이나포크나이프가보이지않았다.
그동안우리는계속호텔에있었기때문에이런경우는처음이었다.
나는그중한놈을손짓으로불렀다.
스픈,포크와나이프를달라고했다.
‘없다’는것이다.
기가막히다는표정의내얼굴을보더니이놈이손가락으로옆테이블을가리키는것이
아닌가.
거기엔한가족다섯이우리와똑같은음식을먹고있었다.
그런데,맙소사.
그들은모두손으로먹고있었다.
달리방법이없으니그들을찬찬히살펴봤다.
우선작은종지들의소스를밥위에쏟아붓고손가락으로섞은다음,
둘째손가락과셋쩨손가락위에얹어서입에가져간후엄지로밀어넣는것이아닌가.
우리도그대로했다.
입속으로들어가는밥보다흘리는밥이더많았지만차츰익숙해지니먹을만했다.
그리고종당엔,참으로뜻밖이지만맨손으로음식을먹는다는것이얼마나자유스럽다는
묘한기분까지들었다.
그건일종의해방감이기도했다.
그래서우리는아주천천히맨손으로소스와밥을섞어가며그인도식밥먹기를
즐기기시작했다.
음식을맨손으로집어먹는것도또하나의다른문화라는것을그때깨달았다.
붉은화살호.
1991년가을,
악의제국소련이붕괴되기직전,
우리부부는레닌그라드에서모스크바까지야간침대차를이용한일이있다.
열차에올라지정된객실에가서문을여는순간,
거기엔고색이창연한제정러시아가있었다.
낡고오래된침대차이긴했지만그건틀림없는러시아의열차였다.
침대는고급의붉은색융단으로덮여있었으며침구도깨끗했다.
가운데에는,작지만견고하고아름답게만든탁자가있었으며
무엇보다도창문엔레이스가달린흰색의아름다운커튼이쳐저있었다.
귀족들이타던열차라는뜻이다.
그건절대로볼세비키가아니었다.
밤은깊었지만우리는잠을잘수가없었다.
그때가마침백야였기때문이다.
우리는창문에붙어앉아러시아의신음하는대지를내다봤다.
끝없이이어지는자작나무들의숲.
간간히나타나는농부들의낡은집들은가난에짓눌려있었다.
백야는그렇게러시아의모든것을보여줬다.
정말아름답고인상깊은밤이었다.
한밤중속이출출해서겁라면2개를가지고열차의입구로갔다.
차에오를때거기에무쇠로된큰석탄날로가있었고그위주전자에서물이끓고있는
것을봤기때문이었다.
사모바르였다.
난로옆에는낡아빠진제복을입은할머니한분이앉아있었는데말하자면열차의당번
인것이다.
나는컵에뜨거운물을부은다음조심해서들고돌아왔다.
그런데아무래도그할머니의시선이마음에걸려컵라면하나와나무젖가락을가지고
할머니에게가서손짓으로시계를가리키며물을부은다음4분동안기다리가먹으라고
일러줬다.
거의한시간이지난후노크소리에문을여니그할머니동무가쟁반에차두잔을가지고
왔다.
종류는알수없었지만그차는아주맛이좋았다.
할머니와우리사이엔볼세비키는없었다.
한국인의마음과슬라브의정이있을뿐이었다.
기관차들이내뿜는증기가안개처럼피어오르는모스크바역에도착한것은새벽이었다.
나는천천히플랫홈을걸어앞으로나간후몸을돌려우리가타고온열차를봤다.
‘붉은화살호’
그열차의볼세비키식이름이었다.
타슈겐트의떡.
타슈겐트는우즈베키스탄의수도다.
면(솜)수출로유명한곳이며빈약하지만국제공항도있다.
그곳엔원형의3층건물로된초르수바자르가있다.
그시장엔억센사투리를쓰는고려인들이아주많았다.
각종반찬류는물론,건과류와향신료까지팔고있었다.
입구초입에할머니한분이좌판을벌리고있었는데떡들을팔고있었다.
그좌판을보는순간,나는발을멈추고좌판앞에앉았다.
눈에익은모양의절편이거기있었고하나를집어입에물자,
나를지극히사랑하시던우리할머니의모든것이떠올랐다.
그리고가슴이아팠다.
우리가족이남쪽으로내려올때내손을잡고하염없이우시던할머니의떡,
그절편이거기있었던것이다.
방앗간에서기계로찍어내는떡이아닌,하나하나손으로빚어낸그떡은원형을
간직하고있는우리할머니의떡이었다.
나는그할머니에게작은비누와치약을선물로드렸다.
‘내어찌거저받겠음.’하면서기어이절편한꾸러미를만들어주는것이아닌가.
지금도그리운할머니를생각하면타슈겐트의절편이떠오르곤한다.
인간이가지고있는정(情)은때와장소에관계없이살아있기때문이다.
아내는그들의간곡한요청으로여러사람의모습을촬영했으며귀국후크게현상,
그들에게보내줬다.
세상에태어나그렇게큰천연색사진은처음이라는,
그들의투박한한글답장은우리가한핏줄임을알게해줬다.
산은다른산을만날수없지만사람은다른사람과만날수있다.-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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