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로부터시내에있는아뜰리에를떠난다는전화가온게오후5시였다.
그런데7시가지나도도착하지않았다.
곧다시전화가왔다.
-나,지금교보에있어,
자료를찾을게있어들렸는데여기서저녁을사먹을테니먼저식사해.
-이봐,또갇히지않게조심하고,밤운전조심해서오라구.
이얘기엔사연이있다.
아내는광화문에있는교보문고에자주들리는편이고마음에드는미술책자가있으면
서가사이에쪼그리고앉아시간가는줄모르고읽는습관이있다.
한번은책을다읽고집에오려고미술코너를나섰는데출구로나가는통로에셔터가
내려져있었다.
마침폐점시간직전이어서직원들을찾을수있었고갇히는신세는면한것이다.
아내는그림을그리거나책읽는일에몰입하면주변을완전히잊어버리는일이자주있다.
그만큼집중력이크다는얘기이기도하다.
밤10시가지나집에도착한아내는개선장군처럼빛나는얼굴로커다란책을안고현관에
들어섰다.
-나,이거교보에서반값에줬어.
그게13만원이란다.
가로30,세로40센티에무게가6.3키로나가는,Taschen에서발간한
‘구스타브크림트’의대형화집이었다.
그건정말잘만든고가의화집이었다.
아내가아뜰리에로쓰는거실의한쪽벽은천정까지이런책들로꽉차있다.
아내는진짜‘자료부자’다.
아내의금년목표는,
2015한국수채화협회공모전,
제37회중앙미술대전,
2015년세계수채화트리엔날레참가.
제34회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의비구상,구상부문응모다.
매주월,화,목요일은친구들과그림을그리기위해시내의아뜰리에에나가는데,
새벽4시반에일어나5시에식사하고내가싸주는도시락과산더미같은화구들을
차에싣고떠난다.
수요일은집에서쉬면서나와함께외식을하고,
금,토요일은제자들에게그림을가르치는일을한다.
이렇게꽉찬스케쥴을소화해내는아내의무서운저력에나도놀랄때가많다.
아내는작년에수채화협회공모전에입선했으며,
이어제33회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구상부문에입상했다.
화가로서는가장어려운,선망의마지막관문을통과한셈이다.
그런데도멈출줄을모른다.
금년의목표들을달성하기위해서는글자그대로피나는노력을다시해야된다.
지금아내의나이는73세다.
완전한할머니인데도무지그런구석을찾아볼수가없다.
거의모든사람들이아내를60대초반으로본다.
처녀때의치마허리를그대로입을만큼무섭게운동하고,
내가‘택시기사’라고부를만큼거의매일장거리운전을한다.
특히밤운전이나,안개,비,눈과같은악천후에아주강하다.
아내는차안에서잠도자고,식사도하고,그림도그린다.
그래서아내에게차는또하나의생활공간인셈이다.
조금만이상해도정품으로만부품교체를하기때문에차의컨디션은언제나최상급으로
유지하며차에대한애착도대단하다.
1974년에운전면허를발급받았고바로차를사서운전을시작했으니41년의운전경력인
셈이다.
내가아내를‘행복한여자’라고부르는것은,
좋은남편만나호의호식한다는뜻이아니다.
아내가정말행복한것은평생을통해,73세의할머니가된지금까지분명한‘자기일-
자기분야‘가있기때문이다.
특히여자가나이들어서까지미술-그림을그린다는것은아주중요한자기실현이다.
미술은철저히창작의세계이며창의력과천부,그리고부단한노력이없으면불가능한
일이다.
내가은퇴한후,
아내와나는부엌을임무교대했다.
지금나는장을보고,식사를준비하고,설거지하는일까지전부내가직접한다.
그림그리는아내를부엌에서해방시켜야된다는생각은늘하고있었으며은퇴와함께
실행에옮긴것이다.
부엌일에서해방된아내는그림그리기의연속성에서완전히자유롭다.
국전에입상했을때,
‘이건,자기가입상한것과같아’하면서진심으로내게감사했다.
금년의목표들을달성하기위해서는전보다더한노력이요구될것이다.
그마큼내일도늘어나게된다.
그림을그리는아내의모습은글자그대로‘몰입과집중’이다.
몰입은어떤일에깊이파고들어가빠지는것이며,
집중은어떤일에정신을모으는일이다.
여기에는차원높은‘즐거움’이필수적이다.
그몰입과집중을통해성취감과희열을느끼기때문에계속할수있는것이다.
내게도몰입하는일들이있다.
책읽기,음악듣기,악기연습,글쓰기등이그것인데
그중최고의몰입은‘낚시채비’만들기였다.
바다의변화무쌍한물때,
날씨가맑았을때와흐렸을때,그리고비가올때,
아침,점심,저녁의시간과낮과밤의차이,
수온의차이등에따라고기들이회유하는위치가다르기때문에거기에맞춰내가수집한
온갖자료들을참고해서여러가지채비를만드는일은‘몰아’의경지에이른다.
그래서채비는과학이자창의이며경험의산물이다.
이렇게여러가지채비들을만들때가가장행복했다.
지금은체력이달려바다에나가지못하지만손때묻은낚시장비들을만져보며그때를
반추하는즐거움을누리고있다.
대신,근자내가가장몰입하는것은첼로다.
피아노와맞추기위해생상의백조를맹연습하고있는중이다.
아내는그림을그리기시작하면밥먹는시간도아까워하고잠자는시간도줄인다.
그렇게집중하고몰입한다.
아내의몰입이나나의집중을통해생각할수있는것은몰입과집중이가지는긍정적
효과들이다.
그게무슨일이든,
몰입과집중을통해얻는일차적인결실은차원높은‘즐거움과기쁨’이다.
고도의정신작업과창의력을통해서얻을수있는게그것들이다.
특히나이든사람들에게는이런정신적계기가꼭필요할것같다.
동양적인표현으로는物我一體,무아경이그것일것이다.
몰입과집중은개인이가지고있는잠재력을개발하고자신감이생기는계기이기도하다.
어떤일에고도의전문성을가진다는것은세상을자신있게살수있는힘을가진다는
뜻이기도하다.
말하자면스스로진화(evolving)하는것이다.
중요한것은이런몰입과집중이누가주는것이아니라자기의의식적선택이라는점이다.
여기에는상당한수준의개인적인안목과용기가요구된다.
예를들어아내의금년목표는스스로자기가선택한것들이다.
쉽게말해몰입과집중을위해구체적인목표가설정된것이다.
그리고그몰입과집중을위해서는‘지속성’이절대필요하다.
중간에단절되면무위로끝나는허망함이된다.
모두가즐기는쇼핑이나게임,그리고마약같은것은순간의기쁨과즐거움은있지만
지속성은전혀없다.
생각해보면몰입자체는그비용이상당히저렴하며대단한준비물이필요한것도아니고
만약실패한다해도거의잃는게없다.
단지다시시작하면될뿐이다.
어떤일에몰입하고집중하는것은더나은인간이되는길이며다양한기회에접촉할수
있는잇점이있다.
지금현재우리들의몰입과집중을방해하는가장큰적은스마트폰이다.
스티브잡스도정말필요할때가아니면그것을가지고다니지않은게그때문이다.
5분에한번씩,잘때까지도그것을꺼내보지않으면불안한,불안증후군이현대인이앓고
있는중병인지도모른다.
정말비즈니스를위한것은5%수준,
나머지는메시지와게임이라는통계는오래전에나와있다.
아내는늘같은말을되풀이한다.
‘하루가30시간이면좋겠다’가그것이다.
아내에게는정말24시간이부족한것이다.
내가부엌을맡아부엌에서해방되었는데도그렇다.
아니,오히려그렇기때문에할일이,더몰입하고집중해야할일들이늘어난것이다.
그만큼그림그리기에전력투구하고있는것이다.
아내의그림은작년과금년이다르고,어제와오늘이다르다.
그변화를은밀히즐기는것이나이기도하다.
사람이나이들어늙어도몰입하고집중할수있는‘자기일’이있다는것은최고의행복이다.
아내는이미마지막관문을통과했지만형식에매이지않고자기구현을위해24시간이
모자랄정도로노력하고있다.
나는비록아마추어이지만봄에는피아노반주에맞춰제대로된연주를하기위해백조를
무섭게연습하고있다.
단지한소절을한시간씩연습할때도있다.
현악기가얼마나어려운것인가를매일실감하고있다.
노년기의가장무서운적이치매와함께‘무료함’이다.
사람이할일이없으면빨리늙고일찍죽는다.
텔레비전리모컨을쥐고소파에앉는인생만은반드시피해야한다.
아내는전혀텔레비전을시청하지않으며,
나는뉴스와음악,그리고MLB중계만시청한다.
야구가없는생활은상상도할수없다.
그리고,나는스마트폰이없다.
나의노년은,나를위한,내부지향적인아날로그의슬로라이프이기때문에사람을
종속시켜달달볶는그흉물을배제한것이다.
현역일때충분히겪었다.
그래도하나도불편한게없다.
그게밥처럼없으면죽는것이라면벌써장만했을것이다.
정신적으로나육체적으로불편하게사는게건강한삶이라는것을깨달았기때문이다.
우리는모두가‘바쁘다,바쁘다’하면서숨차게살고있다.
그래서궁극적으로얻는게과연무엇인가.
정말깊이성찰해볼일이다.
그리고그성찰을통해한인간으로서집중하고몰입할수있는‘자기일’을찾아야한다.
인생의진정한행복은그안에있기때문이다.
바다는비에젖지않는다-헤밍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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