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성장, 그 애환의 시대.
1939년나치독일의폴란드침공으로시작된제2차세계대전은

1945년8월15일일본의무조건항복으로끝났다.

그러나세계는새로운형태의전쟁인‘냉전시대’로돌입했다.

소련의사회주의불럭이동구를잠식,위성국가를세우고있을때

자유진영을지키기위한미국의필사적인노력도시작됐다.

마샬플렌을제외하고도미국은대전후의신생국가137개국을전폭지원했다.

공산화를막기위해서였다.

쏟아부은돈과노력은어마어마한것이었지만

민주화와산업화를동시에성공시킨나라는대한민국밖에없었다.

한,미동맹이전,미국이대한민국을그들의보상과보람으로생각하는이유다.

세계최빈국중하나에서OECD회원국이되었고,

세계10위권의경제대국이된것은물론,정치시스템에서도의회민주주의의

국가가되었다.

세계는이러한대한민국의성공을한강의기적이라고불렀고,

한편으로는‘압축성장’의모델케이스로인정했다.

8.15광복이후,

1948년8월15일건국을기준한다면불과67년사이,단지두세대만에성공한

국가가된것이다.

여기에는1962년부터1996년까지이어진제7차까지의‘경제계획5개년계획’이

그핵심이었다.

압축성장은,

실로엄청난대가를요구했으며지금의70,80대세대는그한복판에서쉬지않고

피와땀을흘리며이과업을이루어냈다.

특히67년부터84년까지의2,3,4차5개년경제계획은산업화의빛나는성공을

이루어낸금자탑같은시기였다.

그만큼고생과고통이따랐고,

지금으로서는상상도할수없는열악한,흡사탄광의막장같은환경에서모두가

묵묵히일만했다.

가난의대물림을끊기위해서였으며’우리도한번잘살아보자‘는강력한정치적

구심점이있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그날나는,

경제기획원(당시의EPB)투자3과에서가지고간서류를접수시키지못한채

복도에있는문을열고비상계단으로나가한손에서류봉투를쥔채멀리

창밖을내다보며오래동안서있었다.

공장의시설물도입을위한‘차관승인신청서’는그내용을보완하고또보완

했지만다시퇴자를맞은것이다.

나는계단에힘없이주저앉아만감이교차하는생각을했다.

담당업무부서의과장으로서오래동안최선을다했지만이제그한계에선것이며

이대로는회사에돌아갈수없다는점도분명했다.

최선의방법은사표를내는것이었다.

가족들의얼굴이떠올랐고스스로의부족을한탄하기도했다.

참으로처참한심정이었다.

바로그때,

위층으로올라가기위해문을열고비상계단에들어선‘담당’(주사보로나보다나이가많은상이군인이었다.)이나를발견했다.

-아니,아직까지여기서뭐하고있는거야.

-갈데가없어서여기앉아있는겁니다.

그는한참동안나를지켜보더니눈짓으로따라오라고했다.

자기책상옆에나를앉힌그는오래동안생각을한후종이에뭔가를적어서내게줬다.

-잘읽어보고다시서류를만들어봐.

그때는,

그게어떤사업이든‘수입대체효과’가분명한게관건이었다.

워낙외화가부족한시기였기때문이었다.

그담당은그점을지적했으며특히통계수치에서디테일한설득력이있어야함을

강조했다.

회사로돌아온나는부장에게간략히보고하고업무1과1계를중심으로나까지

다섯명이이일에달라붙었다.

우리는3일동안집에가지않았으며온갖데이터와시장조사는물론,통금때문에

근처여관에서자면서꼼꼼하게서류를만들었다.

다시만든서류를읽어본담당은처음으로‘두고가라’고했다.

나는지금도그때를생각하면등골이서늘해진다.

흡사죽을고비를넘긴것같은기억이다.

그후나와업무1계장은그담당의생일이되면금강구도상품권2매를개인적으로

구입,그를만나설렁탕을먹었고내외분이새구두를맞춰신으라고했다.

우리는매년그렇게했다.

그후공장건설을위해건설부를드나들면서고전할때도그담당은많은도움을

줬다.

그는훌륭한공무원이었다.

좋은관료없이압축성장도없다는얘기다.

그때만해도일본에가기위해서는서울에있는주한일본대사관에서비자를

받아야했다.

비즈니스의경우대개는당일로비자를발급했다.

그런데수입원료의가격을결정하기위해내일전무가출국하게되었는데

그날따라영사가회의참석차출타,비자발급이안된다는것이었다.

비행기예약도끝났고,내일동경에서의회의스케쥴도확정된상태에서비자발급이

안된다니눈앞이캄캄했다.

입술이타들어갔고,넋이빠지는기분이었다.

나는대사관에근무하는한국인직원을붙잡고통사정을했다.

오늘비자를못받으면목이열개라도견딜수없으니손을써달라고했다.

그때내표정은죽기아니면살기였을것이다.

피는물보다진했다.

그는나를차에태우고영사가있는곳으로갔고,서류를펴들고영사에게설명했으며현장에서결재를받았다.

빛깔도선명한비자스템프가찍힌전무의여권을받아든나는다리의맥이풀렸다.

그후나는구하기힘든진짜꿀한병을가지고그직원을찾아가인사했다.

나는지금도일본대사관앞을지날때면그때의악몽을다시꾸곤한다.

정말어려운일도많았던시절이었다.

일본출장에서만족할만한결과를안고돌아온전무는,

동생과곧결혼할제수씨가너무마음에들어아주색깔이아름다운고급옷감한벌을사가지고들어오다세관에압수당했다.

국내섬유산업보호를위해취해진엄격한조치였다.

전무는세관업무에능통한나를다시불러그압수당한옷감을찾아주면좋겠다는것이었다.

비자에이어두번째난관을만난셈이다.

그옷감의통관은절대불가였다.

누구보다내가그점을더잘알고있었다.

고민에고민을거듭한끝에나는김포세관에근무하고있는선배를찾아갔다.

그는학교브라스밴드에서내게슬라이트럼본,유포니움,후렌치혼,튜바를가르쳐준형님같은분이다.

저간의사정을다들은선배는단화하게물었다.

-절대로팔건아니지.

몇번이고그점을다짐한선배는자기의상사와오래동안상의했고,며칠이지나

그옷감을봉투에담아내손에쥐어줬다.

우리전무가이일을친구들과의회식자리에서자랑했고,

얼마후,그친구회사의총무과장이나를찾아와자기도같은케이스에걸렸으니

방법을알려달라고했다.

나는아주간단하게대답했다.

-그게무슨소립니까,그런일없었는데요.

30만평대지에,

공장건물5만평을짓고기계를설치하는데꼭3년이걸렸다.

초고속의치열한전투였다.

작은도시에서10개의여관을장기임대했고,수십대의버스를운행한것을물론,

하루세끼모두공장식당에서먹어야했다.

정말지긋지긋했다.

안전모와작업복,군화보다무거운안전화,

우리는그악몽같은3년을‘포로수용소시절’이라고불렀다.

월차도,년차도,휴가도없었고,

기계설치를위해공장바닥에가마니를깔고신발도벗지못한채잠자는건다바사였다.

압출공장기계설치를위해입국한소련인들은밤낮없이보드카를들이켰고,

특수강라인을담담한영국,독일인들은칼퇴근을했으며,

혼산탱크기술자인프랑스인은반은놀면서일했다.

그래도우리와같이가마니에서자준건일본기술자들뿐이었다.

그점지금도고맙게생각한다.

아침일찍출근한청소담당아줌마들은우리들에게담뇨를덮어주면서

-모두가제집에서는귀한아들들일텐데여기선갈데없는거지들이지‘했다.

그들이보기에도우리의몰골은갈데없는거지꼴이었던것이다.

우리들은그렇게,그혹독한환경에서가장값비싼청춘을바쳤다.

세상에공짜가어디있겠는가.

내친구들은그곳을‘휴전회담막사’라고불렀다.

하루에수백명의근로자를‘면접’하는건물이꼭휴전회담당시의막사같이생겼기때문이다.

근로자선발을위한면접은,

정확한기술수준,경력,시급,비교평가를해야하는고도의정밀작업이었다.

각분야전문간부사원들과함께최종결론은인사부장인내가내려야했다.

거기엔청탁이나압력도많았다.

물론들어준건단한건도없었다.

인사부안에는노무과가있고,나는그어려운업무를통해

‘이세상에서가장불쌍한것도근로자들이며

돌아서면가장무서운것도근로자들임‘을이미잘알고있었다.

그래서더신중을기해야했으며특히임금인‘시급’결정에서는계산기를

두드리며냉정해야했다.

그건회사의손익과직결돼는문제이기도했다.

면접은사람을크게지치게하는고된작업이었다.

철강공장에서는3교대때문에반제품인수인계과정에서분쟁이잦았다.

불량률에대한기준과생각이서로달랐기때문이다.

때로는폭력사태까지벌어진다.

널려있는게쇠조각이니부상자가생기는것도다반사다.

사장이라해도그패싸움은못말린다.

그싸움을멈출수있는건나밖에없다.

일단,나한테명찰을뜯기면끝나는것이고크게봐줘도다음승급,승진에서는

제외다.

그러니인사부장은언제나그들에게는제일무서운호랑이인것이다.

철강공장은언제나수많은위험이도사리고있다.

한번은용해로에서녹인쇳물을담아운반하는잉코트케이스가기울어져뜨거운

쇳물이쏟아진일이있다.

그때현장에있던근로자들은죽기아니면살기로도망하게되는데,

사실은쇳물보다는급히뛰어가다각종구조물에부딛쳐다치는경우가더많다.

그러니크고작은인명사고가없는날은거의없다.

그런데한번은그렇게다친근로자한명이부상이심해현장에서숨졌다.

다음날아침,

시골마을에서올라운유가족들은경비원들의저지를뚫고정문옆스테인레스고철

야적장에서후라이판과주전자을찾아들고사무실에난입했다.

80여명의직원들은다도망치고나혼자남았다.

그들은있는힘을다해내게분풀이했고,내이미에서피가흘렀을때야흥분이가라앉았다.

나는그들을내책상옆에있는응접세트에앉게했고먼저깊은애도의뜻을표한후

혹시다른아들이있는지를물었다.

군복무중인작은아들이있다는것이었다.

나는그들에게그아들이제대하면형을대신해서반드시우리회사에취직시키겠다고약속했다.

그때나이많은어머니는손수건을꺼내내이마의피를닦아줬으며눈물을흘리며

미안하고고맙다고했다.

나는이미산전수전공중전까지다겪었기에대처하는방법을알고있었다.

돌이켜보면정말힘든시기였다.

나는한달에도몇번씩경찰서와검찰청사를드나들어야했다.

공장종업원이기천명이었으니사고치는일이많았기때문이었다.

그때나지금이나술먹고폭력을휘두르면무조건구속되었으며심하면기소될수

있었다.

경찰선에서훈방되는경우는쉬운편이지만,

검찰에송치되면일은아주힘들어진다.

그때나는할수없이비장의무기를꺼내들곤했다.

술먹고사고친건무조건큰잘못이고벌을받아마땅하다.

그러나M16총열을뽑아내고,수류탄탄피는물론장갑차의장갑판과박격포의

포판을만드는것이바로이놈들이며,

특히고도의정밀기술을요하는포신의진공주물은이놈이아니면안된다고호소

하는것이다.

대개의경우검사들은엄하게훈계한후기소유예처분했다.

더까다롭고힘든게근로감독관의호출이었다.

‘부당노동행위’가고발되어조사하는것이다.

사장을대신해서온갖핀잔을들어야했으며손이발이되도록빌어야했다.

모두가자존심상하고힘든일이었지만더큰것을위해나를희생한다는각오

없이는견딜수없는곤욕이었다.

그러나지금도후회는없다.

나만그런고생을한건아니기때문이다.

우리제품이처녀수출되던날,

간부사원들은임원들과함께부두에나갔다.

우리모두는선적하기위해쌓여있는제품상자에손을얹고정말뜨거운사나이들의눈물을흘렸다.

그간의온갖고통이주마등처럼지나갔다.

그건우리의청춘을바친결정체였다.

별을보고출근,별을보면서퇴근한데대한뜨거운보상이었다.

정말우리모두는미친듯이일만했었다.

그리고1974년봄,

나는막운전면허를취득한아내에게하얀색의일제브리사를사서선물했다.

아내는그차를‘나의백조’라고불렀다.

이제80노인이된나는,

13층의우리집베란다에서아래를내려다본다.

젊은부부가애둘을데리고나와자기들차에태우고외출하기위해출발한다.

나는그들의풍요로움을보는것만으로도만족하고감사한다.

정말우리들은압축성장을해낸것이다.

물을마실때는그근원을생각하라-중국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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