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식사가끝났을때,
아내는근심스로운얼굴로남편에게말했다.
‘옆집에서또쌀독긁는소리가나네요.’
남편이어두운얼굴로대답한다.
‘거참,야단났구먼.’
1950년대,아직이땅에아파트가생기기전에는모두가단독주택에살았다.
울타리도제대로없이옹기종기모여사는동네는그래서옆집의수저가몇벌인지
훤히알고지냈다.
그러니쌀독긁는소리가이웃까지들리는것이다.
그때모든집은재래식부엌을가지고있었으며그바닥은굳은흙이었다.
그리고부엌의한쪽에는어김없이커다란쌀독이자리잡고있었다.
그독에쌀을채우고작은바가지로끼니때마다쌀을퍼내어밥을지었다.
거의모든집이그렇게소박하고가난하게살았다.
쌀독을긁는다는것은
쌀이바닥나바가지로그바닥을긁는다는뜻인데,쉽게말해그집식량-쌀이
떨어졌다는얘기다.
다음끼니가없으니굶게되는것이다.
그래서쌀독긁는소리도유난히크게들린다.
간식이나주전부리가없던시절오직먹을수있는건밥밖에없었으며그만큼
쌀-식량은절대적인것이었다.
그때의밥사발은지금의세배정도더컸다.
라면도햄버거도없던시절이다.
밥이주식이었고그밥은쌀로지었다.
늦가을이되면,
쌀,겨울김장,연탄의준비가필수적이었다.
춥고긴겨울을나기위해이세가지는생명선같은것이었다.
그때의모든주부들은이세가지만장만하면부자가된기분이었고걱정근심이
없었다.
특히쌀은그무엇보다도중요했다.
단순한주식,그이상의의미가있었다.
그리고쌀은늘부족했고비쌌다.
쌀은벼의왕겨와겨층을벗겨내어먹을수있도록가공한것이다.
쌀미자(米)를보면八十八로조합돼있으며심어서먹기까지사람손이여든여덟번
간다고해서그수고로움을짐작케한다.
그만큼재배하기어려운작물이기도하다.
벼(禾)는외떡잎실물이며화본과의한해살이다.
동인도가원산지이며벼의열매를찧은것이쌀이고전세게인구의40%가
주식으로먹고있다.
쌀은이미일천여년전부터우리나라에서재배되었으며생산량이많아지면서
식생활의큰부분을차지했다.
그이전은피,기장,조,보리,밀등의잡곡이주식이었으며조선조이후생산량이
많아지면서잡곡을앞질러주식이되었다.
그러나쌀은언제나절대량이부족했다.
1950년대의심각한식량사정을이해하기위해서는춘궁기를알아야한다.
춘궁기(春窮期)는,
지난가을에수확한양식이바닥나고보리는미처여물지않은5-6월,
농가생활에식량사정이매우어려운고비를이르는말이며보리고개로유명하다.
매년보리고개가되면절박하고참담한일들이일어나곤했다.
그중하나가절량농가(絶糧農家)다.
농사짓는집에먹을양식이떨어졌다는뜻이며
초근목피(草根木皮)는풀뿌리나나무껍질이라는뜻으로,
맛이나영양가가없는거친음식을의미한다.
‘초근목피로근근히연명하다.’
‘초근목피로끼니를때우다.’라는말의유래가그러하다.
그만큼식량사정이어려웠고실제로춘궁기에는굶는사람들이많았으며
심한경우굶어죽는사람도있었다.
6.25전쟁때나는피란지인시골에서춘궁기를겪었으며절량농가에서초근목피도
먹어봤다.
인천상륙작전이끝난후,
나혼자먼저집을둘러보기위해인천에갔으며저녁때아버지친구집을찾았다.
그댁에서정말여러달만에쌀밥을먹었다.
밥이,그부드러운쌀밥이식도를타고내려갈때나도모르게눈물이나왔다.
나는지금도그때의감격을잊지않고있으며쌀한톨도함부로버리지못한다.
우리들에게있어정말쌀은주식이상의것이었다.
1963년보리에이삭이팬후,
많은비가내리는바람에평균수확량의70%만생산됐다.
농촌,도시할것없이식량사정은크게악화됐다.
이제벼의품종개량은기아선상에서국민들을구하기위한절체절명의과제였다.
당시재배되던자포니카품종은키가커서잘쓰러지고도열병에도약했으며
수확량도적었다.
벼육종전문가인허문희서울대교수는
1964년부터2년간필리핀의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벼품종실험을거듭했다.
1967년새품종인IR667을수원농진청으로공수,발이푹푹빠지는수렁논에
심었다.
여름내내관찰한후이품종에서선발한종자를원두막옆의자투리논에심었다.
7월이되자놀라운변화가일어났다.
이파리들이하늘을향해꼿꼿하게고개를든것이다.
8월예비량조사에서10아르당634kg가나왔다.
그때농가의평균수량은350kg였다.
1972년비로서쌀생산량이처음으로3000만석을돌파했다.
광복전에는남북한을합해도2500만석을넘지못했던벼생산량이다.
단보당생산량이거의두배에이른IR667은‘통일벼’로명명되었으며,비로서
굶주림에서벗어나게되었다.
그건대한민국을살린기적의볍씨였다.
1977년벼품종개발에전력투구했던박정희대통령은‘주곡자립달성’이라는
감격적인기념휘호를쓸수있었다.
북한의사회주의가사실상무너진것은,
‘식량배급제’를실시할수없었기때문이다.
그들은‘쌀은공산주의다’라는구호까지외쳤지만식량사정은나아지지않았다.
절대량이부족했기때문이다.
정치와먹는문제는그렇게예민하고밀접하다.
우리정부도식량의안정적인공급과가격안정을위해‘추곡수매제’를실시했다.
매년가을,
정부가정한가격으로농민들로부터일정량의쌀을사들였으며수매량과수매가는
국회의동의를얻어정부가결정했다.
1973년부터는곡가의안정을위해수매가격보다판매가격이낮은이중곡가제도가
실시되기도했다.
비싸게사서싸게파는것이다.
이때발생한적자가양특적자-양곡관리특별회계의적자였으며
발생원인은쌀과보리에대한수매에서생기는적자와관리비용이었다.
이차액-적자는그대로세금으로보전되었으며쌀은그만큼특별한대우를받았다.
아직쌀은시장(市場)밖의온실에있었다.
가뭄에도불구하고금년쌀농사는역대최고의풍작을기록했으며
단위면적당생산량도10아르당542kg로지난해보다4.2%증가한
432만7000톤을생산했다.
이미정부창고에쌓여있는쌀재고량은136만톤이며보관비용만도연간
1760억원이들어가고있다.
금년의풍작과쌀직불금을더하면앞으로2조원대의재정이투입될전망이다.
쌀재고가늘어난가장큰이유는쌀소비량이급감했기때문이다.
2006년부터지난10년간국민1인당쌀소비량은17.4%나줄었다.
반면생산량감소는그절반이안되는7.5%에그치고있다.
여기에더해FTA체결로인한농가패해를보전하기위해추곡수매제를폐지하고
쌀직불금제도를도입한것도쌀생산이늘어난원인이된다.
정부가지난10년동안농가게지불한각종직불금은10조원에달한다.
특히80kg당목표가격이18만8000원이며고정직불금이1헥타르당100만원
이기때문에농민들이논농사에매달리는원인이제공된측면이크다고할수
있다.
쌀농사를줄이고밭농사를유도하는정책에서실패한것이다.
얼마전한지역농민들이트럭에벼를싣고와서군청앞에야적해놓고시위를했다.
작년보다쌀값이7-8%하락한것에대한항의와생산량을정부가구매하라는
것이그들의요구였다.
어떤지자체에서는벼를땅바닥에쏟아붓는행패까지있었다.
오래동안각종특혜가몸에밴농민들의생떼인것이다.
이대목에서우리모두는냉정한머리로생각해봐야한다.
배추농사를짓는농민이가뭄때문에배추가자라지않아큰손해를입었거나,
농사는잘되었지만과잉공급으로값이떨어져큰손해를입는경우정부에대해
손해를물어내라거나배추를사라고요구하지않는다.
자기책임이기때문이다.
그런데같은농작물인쌀만은예외여야할이유가무엇인가.
한때쌀은국민의주식으로그중요성이인정되어각종특혜를받은것이사실
이다.
그러나지금은식량이부족한시대도아니고쌀이남아도는시대다.
계속전과같은특혜를누릴이유가없어진것이다.
그동안퍼부은10조원은곧우리들의세금이아닌가.
쌀문제가오늘에이르게된경위에는농협의책임이가장크다고할수있다.
소비량이급속히줄었다면,
이미영농지도가합리적으로이루어졌어야하며대체작물의재배와판로까지
연구되었어야옳다.
오늘날거대해진농협은농사지도보다는금융업에매달리고있다.
직무유기가따로있는것이아니다.
쌀문제,농민의문제를정책차원에서그근본부터개선하고해결해야하는
막중한책임이농협에있기때문이다.
정권이바뀔때마다농협이전리품으로전락,비전문가의낙하산인사가오늘의
농협을만든악의근원이라고할수있다.
지금도쌀농사에대한정책적개혁과그실행은변함없이농협의몫이다.
소비가되는대체작물을정하고재배기술을전수하는것은물론판로까지확보
해야하는작업이농협에서이루어져야쌀문제가해결될수있다.
농민한사람한사람이개인적으로해낼수있는일이아닌것이다.
쌀이아무리국민의주식이고
국가식량의기본이라고해도이제는시장에내놔야한다.
지금은이미쌀만먹는시대는아니다.
천지에먹을거리가널려있는시대가아닌가.
쌀도농민이농사짓는작물의하나일뿐이다.
따라서모든특혜를거두어들이는게쌀이경쟁력을가지는올바른길이다.
차별화된쌀,특징이있는쌀,수출까지할수있는기능적인쌀을재배하지
않고는살아남을수가없다.
이미일본은이문제를극복하고있다.
또하나는지금은사람이쌀농사를짓지않고기계가농사짓는기계영농시대다.
그래서더더욱시장경제의틀에들어가야한다.
길게보면쌀을시장에내놓는것이오히려쌀이사는길인것이다.
경쟁보다더좋은처방은없기때문이다.
국가적으로도이제는쌀에서해방될때가됐다.
쌀은지금도중요한우리들의주식이지만농산품의한가지일뿐이다.
다른농작물들과달라야할이유가없다.
음식귀한줄모르면반드시고생하게된다.-법정.
새블로그주소를알려드립니다.(조선블로그는12월말에종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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