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사전적 의미는,
시간적으로 현대에 살고있는 사람, 특히 현대의 생활양식과 사유구조-思惟構造-
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물리적 시간으로는 2016년 현재이며 공간적으로는 주권국가인 대한민국영토에
살고있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오늘’ 이라는 생활환경속에서 그 환경에 적응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생활양식은,
어떤사회 또는 집단의 구성원이 공유하고있는 생활방법에 대한 인식이나 행동
양식이며 사유는 이성을 통해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따라서 현대인으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처한 오늘의 환경에 대해 가장 합리적으로
적응하면서 사는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그 적응이 합리적이기 위해서는 환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관건이 된다.
과연 나는 지금 어떤세상에 살고있는가.
그래서 그 세상에 대한 직관, 관찰, 체험. 판단이 중요해진다.
현대인의 삶은 그분야가 복잡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어떤 ‘틀’을 사용, 대표적 분야에 대한 선택과 설명을 시도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던 1930년대와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다.
공간적으로는 같은 땅 이지만 시간적 으로는 전혀 대입할수 없는 간격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현대는 언제나 그 개인이 처한 ‘지금’ 의 환경이다.
바로 지금이 현대이며 그 현대에 적응하면서 사는게 현대인이다.
한 개인이 소속된 공동체의 일차적 정의는 그 공동체가 운용되는 방식 즉,
체제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모두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시스템 안에서
살고 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현대인 이라면 무엇보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해 올바른
인식과 수용이 있어야 한다.
그 시스템이 내가 살고있는 오늘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틀’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습과 체험을 통한 민주시민이 되는게 우선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유재산권’이다.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것은 ‘우리것’ 만 있고 ‘내것’ 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것의 극심한 편차다.
빈부의 문제가 그것인데 자본주의 속성상 그 해결은 아주 어렵다.
현대라는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갈 때 ‘소유’는 개인적으로 큰 차이가 날수
밖에 없다.
기회는 균등하지만 다양한 과정을 거친 결과는 동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자기의 ‘분수’를 깨닫고 살아야 한다.
남과 나를 비교하면 안되는 이유다.
내 실력으로 벌어 그 안에서 자족하고 즐기면서 살아야 한다.
이미 많은 젊은이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생긴게 서로다르듯 돈을 버는 방법도 다르고 수입도 다르다.
아무도 이 차이나는 벽을 그 근본에서 허물지 못한다.
그래서 ‘생긴대로 사는게’ 가장 편하다.
노력이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적 차이와 능력에 대해 이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결혼은 가장 전통적인 대표적 생활양식의 하나다.
그런데 많은 젊은이들이 돈-경비 때문에 결혼을 못하고 있다.
결혼의 방법에서 그 기준이 호화예식장과 호텔결혼식 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혼수와 주거문제가 겹치면 일은 미상불 틀어질 수밖에 없다.
남들에게 보여주기위한 결혼이 그것이다.
생각을 뒤집어 보자.
성직자나 지자체장 앞에서 간소한 증인을 세우고 둘이 결혼선서하고,
오피스텔에서 그릇몇개로 출발할 각오는 왜 못하는가.
그건 하나도 이상할게없는 여러방법중 하나가 아닌가.
더 심하게는 결혼은 꼭 해야 하는것인가.
왜 선진국에 그토록 독신자들이 많은가.
결혼의 전통적 ‘틀’을 깨는 것은 현대인이 사는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다.
내 친구 하나는 그 옛날 신부에게 구리철사로 만든 반지를 끼워주고 자전거
뒷자리에 태운채 신혼여행을 갔었다.
지금 그들은 아주 잘 살고 있다.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아는 저명인사가 됐다.
발상의 전환은 언제나 새 지평을 열어준다.
과거의 ‘틀’에 매이지않는 영혼, 그건 현대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저금리 시대가 되면서 직격탄을 맞은게 서민들의 주거문제다.
전세값이 집값에 육박한게 그런 사례다.
이제는 주거문제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꿀때가 되었다.
‘소유’에서 ‘이용’ 으로 가야옳다.
이미 대기업들도 상당량의 임대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했으며 주택임대업을 시작한
대기업도 많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전세’ 도 곧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는 ‘월세’ 가 대세다.
이미 선진국들은 오래전부터 임대주택공급을 국책사업으로 펴 왔다.
임대기간이 길고 임대료가 저렴하다면 굳이 제집을 애써 장만할 이유가 없다.
우리도 앞으로는 그렇게 될 것이다.
내집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월급을 평생저축해 봐야 작은아파트 한 채도 살수없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더 즐겁게 사는 방법을 개발할 일이다.
부동산이 곧 인생은 아니잖는가.
꼭 ‘내집’ 에서만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
현대인으로 오늘을 살면서 가장 크게 요구되는 기능은 정보의 홍수속에서 진짜를
찾아내는 분석, 판단력이다.
정보에는 날것이 있고 익힌 것이 있다.
일차적으로 IT 기기들이 전해주는 정보는 날것들이다.
즉시성, 홍보성, 대중성에서는 앞서지만 정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도 그만큼
크다.
정보를 선별하고, 정제하고, 분석하고, 종합해 주는게 종이신문이다.
‘뉴스의 깊이가 다르다’ 는 케치프레이스가 그것이다.
현대인으로 오늘에 올바로 적응하려면 반드시 종이신문을 정독해야 한다.
종이신문은 개인이 정보의 홍수속에서 겪어야 하는 과정들을 대신해 주고 있다.
‘정부없이는 살수 있어도 신문없이는 못산다’ 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종이신문뿐 아니라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많이읽은 사람들이 앞서는 이유가 그것이다.
기회를 떠 빨리 잡을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은 쫓기듯 바쁘고 분주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강정처럼
허망하다.
그게 남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나도 평생직장을 다녔지만 그건 모두가 돈받고 남의일을 해 준 것이다.
이런생활이 누적되면 결국 ‘내것’은 찾지도 못한채 늙은이가 된다.
내것은 무엇이며 어떤것일까.
그게 ‘취미생활’ 이다.
같은일이 돈벌이가 되면 프로지만 돈과 관계없으면 아마추어다.
이 세상의 모든 분야는 아마추어만이 그 즐거움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독서를 취미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서-읽기는 취미가 아니라 필수다.
현대처럼 각박한 세상일수록 개인이 가지는 ‘자기취미생활’ 은 중요하다.
나는 매일아침 첼로를 연습, 연주하면서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남는게 무엇인가.
남는게 있는 삶을 살아야 진정한 의미의 현대인이다.
취미는 대단히 개성적인 분야다.
그래서 더욱 귀한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보람’을 느낄때가 가장 행복하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고 바친다’ 는 말이있다.
이 격언안에는 거의 절대적인 보람의 뜻이 있다.
인간이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목석과 다를게 없다.
묘한 것은, 보람은 돈과 무관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제돈을 쓰면서 보람있는 일을 할때가 많다.
그게 ‘봉사활동’ 이다.
내가가진 재산, 기능을 나누는행위는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특유의 재산이다.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눈빛부터가 다르고 자세도 다르다.
그게 어떤분야의 봉사활동이든 봉사는 사람까지 변화시킨다.
결코 넉넉한 수입이 아닌데도,
목수, 미장이, 전기공, 교도관으로 이루어진 한팀은 지금까지 수백곳의 독거노인
주택을 무상으로, 제돈들여서 수리해 주고 있다.
‘보람’ 이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들이다.
교도소에서 만들어진 팀 이지만 이제는 완전히 한 식구가되었다.
인생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다가 무엇을 하고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물음이 없다면 무의미한 인생이다.
종교가 인류의 문화현상의 한가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필요성은 처음부터
절대적 이었다.
오늘날의 종교가 변질되고, 부패하고, 타락한것과는 무관하게 종교자체의 의미는
달라진게 없다.
제도종교의 교인이 되라는 차원이 아니다.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이유에 대한 성찰과 희망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모사피엔스는 진화된 동물이지만 영혼은 철학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종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종교를 가지는 것은 우리들의 진솔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 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과학과 철학이 설명못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단, 지금은 워낙 사이비가 많기 때문에 판단을 잘 해야한다.
황금돼지 그림을 그려 팔고있는 중의 사진이 5단광고로 버젓이 실리는게
현실이다.
상업주의는 얼마나 무서운것인가.
‘광고에 저항하라’, 법정이 하신 말씀이다.
평균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인간이 120세 까지도 살수 있다는 주장이
있을정도다.
몇 살까지 살것인지는 개인에 따라 큰 차이가 있겠지만 전보다 오래사는건
확실하다.
이때 중요한게 돈-재산이 아니라 건강이다.
노인의 70%는 지병이 있는 환자들이다.
생노병사는 불가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사실이고 현실이다.
건강은 건강할 때 그 관리를 시작하는게 요체다.
가장 중요한 것이 섭생-먹는것과 생활습관이다.
그만큼 노후준비는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
오래 산다는 것은 노후준비도 그만큼 장기적으로 치밀하게 해야한다는 뜻이다.
노인이되면 결국 준비한 만큼만 사는게 또 인생이다.
현대인이라 해도 사람이기는 마찬가지다.
단지 ‘오늘’ 에 살고있을 뿐이다.
방법이 아닌 그 근본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은 끝까지 아날로그적 존재임을 잊으면 안된다.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인 것이다.
소유는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들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