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평등이다.

길을 걸으면서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분노한 얼굴들’을
마주하게 된다.
분노는 불쾌해서 성을 내는것이며 그 바탕은 불만이다.
불만은 마음에 들지않거나 차지않아 언짢거나 원망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분노와 불만의 바닥에는 거의 언제나 불평등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평등은 차별이 없으며 고르고 한결같은 것이며 불평등은 차별이 있고 고르지 못한
것이다.
불평등하게 느끼는 감정은 주관적일수도, 상대적일수도 있다.
모두가 똑같아야 된다는 감정은 이기적일수 있지만 인간은 여러면에서 서로다른
현실은 객관적 기준이 될수있기 때문이다.
평등을 원하는 것은 인간기본권의 문제지만 불평등은 사회생활을 통해 노출되는
결과적 차별이다.
그래서 설득력을 가지는 측면도 크다.

이제 가장 기초적인 사례를 들어 살펴보자.
나이 20세인 청년 10명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게됐다.
같은 나이는 가장 평등한 기준이 된다.
다음이 출발선인데 그 누구도 단 한발자욱도 앞서 나서지 못한다.
출발신호에 따라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서 똑같이 출발하는 것, 이것이 기회의
평등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민주국가에서는 이 기회의 균등-평등이 지켜지고 있다.
다음이 달리기의 과정이다.
중간에 어떤 부정행위나 하자가 없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힘, 국가의 감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결승점.
1등에서 10등까지 서로다른 시간에 도착, 등수-순위가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결과에 의한 불평등이 나타나는 순간이다.
출발에서는 균등-평등했지만 결과에서는 불평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불평등은 사실상의 평등이 된다.
반대로 모두가 똑같이 결승점에 도착하도록 통제되어 결과도 평등하다면 그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거짓이다.
때문에 결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허구가된다.

분노하고 있는 얼굴들의 대부분은 결국 결과의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같은 20대의 청년들이지만 체력과 기능의 차이가 1등부터 10등의 순위를 만들
었다면 당연히 그 결과에는 모두가 승복해야 옳다.
반대로 이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면 불만이 생기고 분노하게된다.
왜 그럴까.
기회의균등, 평등은 지켜졌지만 그 과정에서 정당성이 결여되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반자본주의 정서나 반재벌주의가 대표적인 케이스이며 축재의 과정에서 그 방법과
수단이 정당성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병철, 정주영, 조중훈은 모두가 그 대상이 된다.
특히 근자 재벌3세들의 일탈이 사회적분노의 대상이되것도 같은 맥락이다.
빈부격차나 계층간의 위화감도 그 바탕에는 이런 감정이 깔려있다.
그것이 우리사회의 만연한 부패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상대적 박탈감이 생기는 것이고 그게 성난얼굴을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실패로 끈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지금까지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결과의 평등’을 속삭였기 때문이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만큼 가져간다’ 는 프로파간다는 인간성에 대한 배신이었다.
그리고 가장 평등해야할 그들의 세상은 민주국가보다 더 큰 불평등이 존재했다.
1991년말은 악의제국 소련이 붕괴된 해 이기도 하다.
그해 5월 나는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었으며 하루는 공산당청년회관에서 공연
되고있는 ‘모이세프발레단’을 보기위해 그곳에 갔었다.
크게놀란 것은 복도에 가득찬 담배연기였다.
속이타는 그들은 정말 속이타도록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점 북한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담배연기를 피해 밖으로 나와 현관근처에 갔을 때 번쩍이는 리무진승용차들이
도착했으며 문이 열리자 막 공항에서 도착했음직한 화려한 사람들이 내렸다.
‘노멘클라투라-공산귀족’ 이었다.
공산당 고위간부들과 그 가족은 전혀평등하지않는, 서방의 부자들보다 더 화려
했다.
대부분의 경우 평등은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적으로는 가능하지 못하다는 얘기다.

멀리 남의얘기 할것도없다.
제7차 노동당전당대회에서 ‘사회주의’를 외치고있는 독재자 김정은을 보면 알 수
있다.
북한은 세계최고의 불평등집단이다.
조작된 백두혈통을 옹위하고 지키기 위해 2.500만 국민이 포로가된 수용소다.
대한민국 한복판에 친북좌파가 있다는 사실은 인간이 어디까지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어떤경우에도 결과의 평등은 있을수 없다.
가장 기본이 되는 사람자체가 같지않고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서로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1등에서 10등까지의 순위에 따라 서로다른 대접과 대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능력과 기능에서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결과적평등은 개인의 노력에 의한 계층간이동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지만 민주국가에서는 ‘경쟁’ 이 합법적으로 허락된다.
순위는 개인의 기량과 노력으로 얼마든지 바뀌는 것이다.
불평등이 인정받기 때문이다.

분노하고 성난 얼굴들이 가지는 불만은 그 근거가 분명한 것 이라해도 거기에는
객관적평가가 따라야 한다.
내가 가질수있는 것이 다섯인데 열을 원한다면 그건 성공할수 없는 욕망일뿐이다.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지금의 내 불만이 자기의 부족을 타인에게 전가, 핑계를 대고 있을수도 있다는
얘기다.
자기의 등수-순위가 달리기의 결과인데도 남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잘못된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경우가 그렇다.
원인을 다른곳에서 찾고있는한 해결도 성공도 어렵다.
내순위-등수를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재출발할수 있다.
끝까지 내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면 희망이 없다.
기회의평등에 엄격한 그만큼 결과의 서로다른 평등에 대해서도 엄격해야 옳다.
그런의미에서 공정한 경쟁을 통해 나타난 불평등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평등이
된다.

그렇다면 불평등은 관연 나쁜것이기만 한것인가.
KAIS의 뇌과학전공인 김재식 교수의진단을 들어보자.
‘건전한 수준의 불평등없이는 혁신과변화에 대한 동기역시 사라진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이며 동시에 혁신과 변화의 동기가 되지못하는 불평등은 사회의 독이
된다는 사실역시 역사의 교훈이다.‘
한편 올해 노벨경제학상의 수상자인 프린스턴대의 앵거스 디턴교수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거나 혁신이 일어나 경제가 성장하면 일부는 먼저 기회를
잡지만 나머지는 뒤쳐진다.
이때 생겨나는 불평등은 일종의 발전결과로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고 진단한다.
결국 일정수준의 건전한 불평등이 발전의 동력이 되는 것은 ‘경쟁’ 때문이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것이 결과의 평등 때문에 경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경쟁이 차별화된 불평등을 낳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없이는 발전도 없다.
이제는 우리사회공동체의 대표적인 불평등사례 한가지를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게 누구든 법치, 납세, (남자의 경우) 병역의 의무를 가진다.
특히 세금은 국가경영을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법인세 신고의무가있는 55만 472곳 가운데 실제 법인세를 납부한곳은 29만여곳
(52.7%)으로 절반 가까운 47.3%는 세금을 내지 않았다.
영업손실이 인정되어 면세가 된 것이다.
한편 근로소득자 1600만여명중 근로소득세를 한푼도 내지 않는사람이 48%, 절반
가까이가 면세점 이하의 소득을 인정받는 것이다.
기업과 국민의 절반정도가 세금한푼 내지 않는다는 것은 커다란 불평등이다.
형평성과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고 있다.
아주 작게라도 세금을 내는게 옳다.
돈이가는곳에 마음도 가기 때문이다.
국회가 조세법에 손을 대야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사회적 불평등현상은 어떤 개인이 해결할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한 이유가 그것이며 거의 모든 국가가 조세정책으로 이 문제에
적극개입하고 있다.
그게 ‘재분배정책’ 이다.
많이 가진자 에게서 거두어 없는사람들을 돌보는 ‘복지’ 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의미에서 지금처럼 절반에 가까운 기업과근로자가 세금한푼 안내는 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
일단은 많든적든 모두가 국가운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정당하고 공평하다.
다음은 좀더 세분화된 맞춤복지로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
선진국 대부분이 세금이 과중할정도인 것이 바로 이 재분배 정책이 강도높게 진행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원없는 포퓰리즘의 복지는 그런의미에서 허상일 뿐이다.
그건 나라가 망할수도 있는 위험한 정치게임이다.
일부 남유럽과 남미국가들이 거덜난게 그 때문이다.
그러나 건전한 재분배는 성나고 분노하는 얼굴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이세상 사람사는곳에는 그게 어디이든 완전한 평등은 없다.
인간자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다름은 필연적으로 등수-순위를 만들게 되고 우리는 그 결과에 승복해야한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기를 아는일이 먼저다.
불의와 부패에 대한 분노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게 이기적이 되어 객관성을 상실
하면 자기를 속이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부의 세습도 그게 정당한것이라면 인정 받아야 한다.
그리고 계층이동은 법적뒷받침과 함께 개인의 노력이 더 요구되고 있다.
민주국가에서는 그 ‘기회’ 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주어져있다.
그래서 불평등한 사회에서 살지만 희망을 가질수 있는 것이다.
분노만 한다면 성난얼굴로 끝날수도 있다.
그러나 노력하면 그 인생이 달라질수 있는게 우리사회의 메카니즘이기도 하다.
그래서 분노보다는 지혜가 더 필요하다.

그 노래는 모두가 불러야 한다, 부르면 안된다.
두가지 주장 모두가 독선이며 독재다.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르고, 싫은사람은 안 부를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권리’ 는 없다.
있어서도 안된다.-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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