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체험기

지금의 80대는 철이들어 6.25전쟁을 겪은 마지막 세대다.
따라서 국토를 초토화한 이 참혹한 민족상잔의 전쟁에 대해 산 증인으로서 그 체험을
일부라도 기록으로 남길 책임이 있다.
북은 지금도 우리의 주 적이며,
이제 핵을 개발한 불량집단으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는 악의 정권이기도 하다.
역사를 잊으면 다시 그런 역사가 되불이 되는게 세상의 이치다.
때문에 우리모두는 6.25전쟁의 참상에 대해 알고, 이해하고, 기억해야 된다.
직업정치인의 상당수가 종북세력의 영향을 받고있는 현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전쟁은 체험하지 않고는 그 참상에 대해 알수가 없다.
그래서 증인이 필요한 것이며 기록으로 남아야할 소이이기도 하다.
전쟁을 철이들어 직접겪은 사람들이 아직은 상당수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중요
하다.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남반부적화통일 야욕과 모택통의 동의, 그리고 동서냉전시대 사회주의
블록의 확장을 꾀하던 스탈린의 의도가 맞아떨어져 일어난 민족상잔의 전쟁이었다.
1950년 6월25일새벽,
북한의 인민군은 38선의 전 지역에서 선전포고없이 불법남침을 시작했으며 이후
3년동안 국토의 80%에서 접전하는 전투로 이어졌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될때까지 38선을 각각 세 번씩 넘나들며 싸운, 치열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 전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치로 나타나는 그 규모를 알아야 한다.
국군의 전사자가 14만 7천여명,
부상자 70만 9000여명,
실종 13만 1000여여명으로 98만7000여명의 손실을 입었으며,
민간인 피해는,
피학살자 12만 8000여명, 사망자 4만3000여명,
부상자 22만9000여명, 피랍자 8만4천500여명,
행불자 33만3000여명, 의용군강제징집자 40만여명,
경찰관손실 1만6000여명으로 합계 140만여명의 손실이 있었고,
남한의 총 인명손실은 230여만명이다.
더불어 이산가족은 1000만여명이 발생했다.

북한은,
인민군 사망자 52만여명,
부상자 40만6천여명,
민간인손실 200만여명으로 합계 292만여명.
남북한을 합한 총 인명손실은 520여만명에 달했다.
정말 엄청난 숫자가 아닐수 없다.
다음은 UN결의에 의한 참전국을 살펴보면,
프랑스,영국,네델난드, 태국,벨기에, 룩셈부르크, 미국,카나다, 필리핀, 뉴질랜드,
호주, 콜롬비아, 남아공, 에티오피아, 터키, 그리스등 17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
했으며,
의료지원은,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등 5개국이다.
유엔군의 피해는,
전사자 3만5000여명,
부상자 11만 5천여명,
실종자 1500여명으로 집계됐으며
부산에는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유엔군 묘지가 있다.
6,25한국전쟁이 국제적 전쟁이었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1951년초,
북한지역점령으로 물리적 통일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김일성의 요청으로 중공군이
참전, 유엔군 주력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피해는,
전사자 18만4000여명,
부상자 71만5000여명,
실종자 2만1000여명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때까지 3년동안 대부분의 한국국민들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 공포, 기아선상에서 신음했다.
그때 인천에서 살고있던 우리가족은 7월초, 인민군의 진입과 함께 피난길에 나섰다.
큰길에는 피난길에나선 사람들로 가득했으며 어떤 젉은 아낙은 베개를 업고있었으며사람들이 그것을 지적해주자 ‘우리애기’를 외치며 미친 듯이 되돌아 가기도 했다.
그만큼 모두가 제정신 없이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아수라가 따로 없었다.
처음겪는 일이기에 더 황당했었다.

우리가족은 어머니와 나, 그리고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 4식구였다.
경찰간부인 아버지는 그때 어떤 사건 때문에 경기도 광주에 파견되어 집에 안 계셨다.
피란길은 두가지였다.
시골에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목적지가 분명했고,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들은 정처없는 길을 나선것이었다.
소래를 지나 계속 남쪽으로 가던 우리가족은 오이밭을 만나 허기를 달랬다.
저녁때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며 우리가족은 시골의 초가집 담벽에 붙어서서
비를 피했다.
갈곳도, 먹을 것도, 잠자리도 없는 그때의 막막한형편은 내가 평생동안 잊지못하는
악몽이다.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았다.
그 농가의 주인은 우리에게 보리밥을 주었으며 헛간에서 자도록 해 주었다.
이북출신인 어머니는 대단히 강한분이 었으며 이튿날 그집 주인과 담판을 지었다.
우리가 경찰가족이라는 것, 전쟁이 끝날때까지 보살펴 달라는것과 이후 아버지가
반드시 보상할 것을 약속, 그집 사랑채에 머무를수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시골생활은 생소하고 힘들었다.
우리까지 합해 10명이 넘는 대가족의 부엌일은 어머니가 도맡다시피 했으며
나는 밭에 나가 풀을뽑고, 논에서 피를뽑아 지개로 날랐다.
논에서 자라는 피가 그렇게 무거운것도, 그것을 뽑느라 손가락이 벗겨지는것도,
지개를 질줄몰라 넘어지는 모든일들이 힘들고 어려웠다.
땔감을 위해 산에가서 낫으로 마른풀을 베다 손가락을 크게 다쳤고 그 상처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보릿고개, 농가에 식량이 떨어지는 시기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식은 모두 먹어봤다.
초근목피-草根木皮-풀뿌리와 나무껍질을 삶아 먹는다는게 바로 그거였다.
특히 풀떼기는 지금생각해도 정말 끔직했다.
들에나가 일할 때 하늘을 찢으며 날아가는 포탄소리, 제트전투기들, 그리고
가까운 철로에 떨어진 폭탄의 폭발과 그 후폭풍으로 몸이 날아가는 공포도
겼었다.
도랑에 처박힌 수많은 시체들,
팔에 붉은완장을 찬 머슴이 주인의 주리를 트는 처참한 장면도 목격했다.
기존의 법과 질서가 무너진 자리에는 오직 ‘야만’ 만이 남았다.
무서운 세상이었다.
동네 빨갱이가 더 무섭다는 얘기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전장의 허리를 끊었으며
전세를 바꾼 것은 물론, 퇴로를 차단당한 인민군은 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이후 공비토벌로 이어지는 단초가 그랬다.
우리가 파난해있던 군자에까지 밤새 퍼붓는 함포사격의 불빛이 선명했으며,
이튿날 어머니는 나를 집에보냈다.
형편이 안정되었으면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른아침에 떠난 나는 저녁 무렵 집에 도착했으며 그때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도했다.
우리동네 초등학교 앞에있었던 커다란 동네하나가 송두리째 없어진 것이었다.
정말 잿더미가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함포의 집중사격을 받은 그 큰 동네가 흔적도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것인지 그때 깨달았다.
우리집은 그런대로 무사했으며 저녁때가 되어 알고있는 아버지의 친구집에 갔다.
그댁에서 몇 달만에 쌀밥을 먹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났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그 부드러운 쌀밥의 감촉을 나는 평생잊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쌀 한톨을 허투루 버리지 못한다.
나는 군자로 돌아갔으며 우리식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9.28 수복으로 집에 돌아온 우리는 정말 눈이빠지게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후 아버지의 친구 몇분이 우리를 찾아왔으며 어머니앞에 하얀 봉투를
내려놨다.
아버지의 ‘전사통지서’ 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이 기절하는 장면을 봤다.
어머니는 그렇게 청상이 되었으며 그때부터 가난과 고통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도 경찰청은 시장의 좋은자리에 좌판을 마련, 어머니가 장사할수 있도록 했으며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 취직할때가지 고생스럽게 장사했다.
1951년 1.4후퇴,
중공군의 개입으로 유엔군 주력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우리가족은 이웃의 해군
장교가 주선한 LST를 타고 그들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갔다.
우리일행은 비가오는 부산에 도착, 광복동의 어떤 쓰레기장을 치우고 가마니와
대나무로 임시 막사를 지었다.
비가내리면 물이샜고, 축축한 바닥은 깊은잠을 잘수가 없었다.
고생이 하늘에 닿은 것이다.

피난지였지만 우리는 광복동의 교회에 나갔으며,
내가 속한 중등부 부장은 그교회의 장로였으며 그분은 영도다리 옆에서 ‘천사당’
이라는 큰 양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분은 나를 자기 양과점에서 일하게 했으며 숙식제공하고 일주일에 쌀 소두한말
을 보수로 줬다.
어머니는 그쌀로 밥을지어 소고기덮밥을 만들어 팔기시작했으며 음식솜씨가 뛰어
났기 때문에 밥장사는 잘 되었다.
나는 하루종일 도넛을 튀기느라 팔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으며.
속에 팥앙금을 넣는 모찌-찹쌀떡을 싸느라 손가락이 붓기도 했다.
아이스케키를 만들기위해 팥을 가마니째 조리로 일어야 했고 냉동기의 압력
게이지를 지켜보느라 밤잠도 제대로 자지못했다.
그때 부산에서 제일 귀한게 물 이었다.
추운겨울 먼곳까지 가서 물지개를지고 빙판길을 걸어오는 고통은 필설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다.
나는 지금도 가급적이면 부산가는 일은 피하고 있다.
너무나 지독한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인기관에 취업한 나는 두툼한 첫 월급봉투를
어머니의 손에 쥐어드렸다.
‘어머니,
이제 고생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는겁니다.
어머니는 편히 쉬세요.‘
어머니는 그 월급봉투를 가슴에 안고 오열했다.
그건 그대로 피눈물이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젊은나이에 청상이된 어머니는 온갖 고통과 역경을 이겨내고
삼남매를 키워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나는 순간 무너진 것이다.
남동생이 의대를 졸업, 의사시험에 합격한후 병원으로 첫 출근하는날 아침,
어머니가 말씀했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그동안의 고생은 소설로는 다 못쓴다.
이제는 너희들 아버지를 만나서도 할 얘기가 있구나.‘
지금 두분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합장돼 있다.
비석 뒤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1950년 7월 2일 광주지구에서 전사’
그리고 나이80인 나는 지금도 ‘6.25 전몰군경유자녀’ 로 등록돼있다.
참혹한 전쟁은 그렇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는자는
현재에 대해 눈먼 장님이 된다.- 바이체커 (전 독일대통령)

2 Comments

  1. 김 수남

    2016년 6월 25일 at 7:58 오전

    정말 생생히 체험하신 이야기를 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동작동 국립묘지에 부모님이 함께 계시는 자랑스런 귀한 가족이심을 감사합니다.선생님께서 더 오래도록 건강하셔서 제대로 역사 인식을 못하는 많은 젊은 세대들에게 영향을 끼쳐 주시길 기도합니다.삼남매를 잘 키워내신 선생님의 어머님! 정말 훌륭하십니다.’국제시장’의 영화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그 실상을 실감하기도 했습니다.부산에 대한 기억이 그러시군요.정말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오늘 선생님이 계시게 하기 위한 그 발걸음들이 감동이 되어 가까이 전해옵니다.다시 6,25를 상기 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늘 건강하세요.

    • yorowon

      2016년 6월 27일 at 6:38 오후

      부족한 글을 감명깊에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작은글이나마 기록으로 남기는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글을 쓰게되었습니다.
      자주 찾아주시고 좋은글도 남겨주기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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