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전야.

‘한국이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기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마침내 사람들이 기술로 무엇을 할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지난 1945년 한반도 남쪽과 북쪽의 사람들이 사용할수 있었던 기술은 정확히
똑같았다.
하지만 오늘날 남북한의 기술적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동일한 언어와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동일한민족의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기술을
사용해서 완전히 다른사회를 건설한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히브리대학의 유발 하라리 교수가 그의책
한국어판 서문에 쓴 글의 일부분이다.
남쪽의 우리는 북쪽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 경제대국이 되었고,
북쪽의 그들은 가난과 핵을 안고 막다른 길로 달려가고 있다.

인공위성이 촬영한 밤의 한반도는,
남쪽의 밝은 전깃불과 대조적으로 북쪽은 암흑의 세계다.
북은 남한이 사용하는 전기의 10분의 1 정도를 겨우 발전하고 있다.
단순히 조명을 못하는게 아니라 산업시설-공장을 돌릴수 없는 수준이다.
쿠바와 함께 남아있는 사회주의국가 북한의 계획경제가 낳은 비극이다.
하라리교수의 표현대로 같은 기술을 가지고 남과 북은 전혀다른 사회를 만들었다.
우리는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고 북은 세계최빈국이다.
가장 큰 이유는 체제의 차이다.
전체주의국가의 계획경제와 자본주의시장경제라는 시스템에서 북은 완전실패했고,
우리는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38선 이남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자본주의시장경게로 성공한 것은
결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그 선택을 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자기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부심을 가질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역사적왜곡이 생기는 것이다.
이제는 바로잡을때도 됐다.

1945년 8월 15일에서
1948년 8월 15일까지의 3년간은 ‘조선’이 죽고사는 갈림길에 섰던 암울한 시기였다.
해방된 조선의 운명을 쥐고 있던 것은 이승만도 김일성도 아니었으며,
한민당이나 남로당도 아니었다.
해방된 조선의 운명은 2차대전 전승국인 소련과 미국이 쥐고있었다.
그들에 의해, 승전국 군대의 진주를 위해 38선이 그어진 것이다.
이점을 언제나 분명히 해야 왜곡의 소지가 없어진다.
때문에 남북한 분단의 책임을 남북한 어느한쪽에 묻는 것은 그 근본에서 잘못된
것이다.
1945년 12월,
소련과 미국은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결정하고 5년간 이를 실시하면서 서로가 받아들일수 있는 독립정부를 수립한다는
복안을 세웠다.
남과북이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통일정부를 세우지 못하고 갈라선 것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미 소련과 미국이 그 바탕에서 분리의 소지를 만든 것이다.
미,소가 동시에 받아들일수 있는 정부는 동,서 냉전이 시작되는 세계정세 속에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복안이었다.
또 하나의 동일한 케이스가 패전국 독일의 분단이다.

1945년-1948년의 3년사이 한반도의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의 군정시기였다.
해반직후 남조선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그 외 좌익 지도층이 중심이된 ‘좌익세력’ 이 한축을 이루었고
송진우와 김성수가 이끄는 이른바 ‘보성그룹’ 이라는 호남세력이 중심이된 한민당이
또다른 축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여운형의 진보적 중도세력과,
김규식이 이끄는 중도적 우파세력이 형성되면서 남한내에 좌,우와 중간 노선이라는
3대 정치세력의 대립구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했고,
이어 연말에 중국에서 돌아온 김구를 중심으로 한독당이 조직되어 한민당과는 다른
또 하나의 강력한 우파세력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우파 정치세력으로 상당한 세력을 떨친 것은 한민당 이었다.
한민당은 한때 초당주의를 주장하던 이승만을 자기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대했고
이승만의 지도노선을 지지하는데 앞장섰다.
한민당과 정면으로 대결한것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반일 지하운동을 전개했던 공산주의자 박헌영, 이강국, 허헌,
최익환, 정백등이 좌익의 주동이었으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그후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보조를 맞추고자 1946년 11월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명했다.
한편 온건좌파라 할 수 있는 여운형과 그의 건국준비위원회세력은 1945년 9월6일
미군의 남한진주를 앞두고 박헌영등과 손을잡고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 해방정국의 기선을 잡고자 했다.
인공정부를 조직하면서 보수세력을 포용했다는 인상을 주기위해 아직 미국에서 귀국
하지않은 이승만을 주석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1945년 10월16일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추종세력에 대해 냉담했다.
여운형의 중도파도 나름대로 이승만을 옹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미 미국에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으며 그들과도
손을 잡지않았다.

미군정의 책임자는 24군단장인 하지중장 이었다.
그는 남한에서의 유일한 통치기구는 미군정이며
박헌영, 여운형등 좌익세력이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중국에서 돌아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조선의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남한의 정치지도층과 국민은
이를 강력히 반대했다.
반탁진영의 선두에 섰던 것은 이승만과 김구였다.
국내의 좌익세력도 처음에는 다같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주둔 소련군의 지시를받은 남로당은 하루사이에 반탁에서 찬성
으로 돌아섰다.
1946년 3월 20일부터 50일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한반도에 공산국가를 수립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국가를 수립할것인가 하는 핵심
쟁점을 놓고 서로 양보할수 없는 대치를 보였으며 결국 미소공동위원회는 결열되었다.
이어 하지장군의 미군정지원을 받은 여운형과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세계정세판단을 끝낸 이승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선언했으며 그의 이 신념은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김구는 미군정청의 만류와 측근이나 추종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김규식과 함께 1948년 4월 19일에서 26일까지 평양에서 열렸던
‘남북연석회의’ 에 참석했다.
나라의 통일과 독립정부를 염원했던 김구의 정신은 올바른것이었다.
그는 남북이 분단되는 상황만은 막아보려고 애썼다.
아버지 김구를 수행,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김신의 증언을 들어보자.
‘1948년 4월 22일,
평양이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김구를 향한 김일성의 일성은,
‘아이고, 항일독립운동의 대선배이신 김구선생을 뵙게되어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였다.
그때 김일성의 나이는 설흔넷이었다.
김신이 ‘아버지가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반대하기 때문에 이곳에 왔다’ 고
하자 사람들은 박수로 환호했다.
그러나 김구가 ‘북한에서 단독정부를 세우는것에도 반대한다.’ 고 하자
바늘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정도로 조용했다.
통일은 소련도, 미국도 아닌 우리동족끼리 해야 한다는 말에 박수가 없는 것을 보고
통일정부를 세우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같은해 2월10일 북한의 김두봉 헌법기초위원장은 북한의 헌법초안을 공개하고
온 조선인민이 그것을 검토할것이라고 발표했다.
그 헌법초안에는 ‘우리나라 국호는 조선민주주의공화국’ 이라고 명기돼있었다.
그 며칠전인 2월8일에는 북한의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었다.
그리고 4월 29일 조선인민회의 특별회의는 조선인민공화국 헌법초안을 승인했다.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정부가 수립된 셈이다.
스탈린은 조선의 북쪽을 공산불럭에 편입시킨 것이다.
김구는 김일성이 남북합작을 위해 노력했다는 명분만 안겨준채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다.

1948년 2월 26일,
유엔총회에서는 한국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으며 미국측이 제안한 결의문을 통과
시켰다.
접근이 최대로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로 한국국민의 대표를 뽑고 그들이 유엔한국
위원회와 협의해 한국의 조속한 독립을 협의토록 하고 그 대표들이 국회를 구성한후
국민적 정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추산된 남한인구 1천994만7천명중 21세 이상의 유권자는 49.3%에 해당하는
998만3천명 이었다.
1948년 5월 16일 유엔한국위원회의 감시하에 제헌국회의원을 선출하기위한 선거가
치러졌으며 79,9%의 등록유권자중 92.5%가 투표에 참여하는 높은 참가율을 보였다.
유엔한국위원회는 그들이 활동할수 있었던 지역주민 3분의 2의 유효한 의사를
대표하는 선거였음을 천명했다.
선거후 소집된 임기2년의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고 이어 시행된
국회의원 간접선거로 이승만이 압도적인 다수의 지지를 얻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려이
되었으며,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이 임기 4년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었다.

정부(政府)는 국가를 통치하는 중추기관이다.
따라서 그 통치를 받는 국토와 국민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때문에 상해임시정부는 ‘독립단체’ 는 될수 있어도 사실상의 정부는 될 수 없다.
우리는 그 숭고한 정신과 상징성만은 이어받아야 된다.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 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하나,
남북분단의 궁극적책임은 전승국인 소련과 미국에 있는것이고 김일성과 이승만은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
남북분단을 막고 통일된 나라에 하나의 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김구의 생각은 올바른
것이었지만 그 순수한 정신은 김일성에 의해 악용됐다.
김구의 애국심은 순수했지만 그는 그때의 세계정세를 읽는 안목이 부족했다.
이에비해 프린스턴과 하바드에서 수학한 이승만은 이미 세계인 이었으며 독립을
위해 국제무대를 뛰어다닌 베테랑이었다.
그는 동,서의 냉전을 읽었고 남한만의 민주정부 수립이 시급한 과제임을 통찰하고
있었다.
두사람의 애국심과 헌신에는 추호의 틈도 없었지만 그 방법에서 달랐을 뿐이다.
그래서 두분은 모두 우리들의 지도자인 것이다.

세계인들이 한국에 대해 하는 말이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을 우습게 알고있으며,
자기들이 얼마나 잘 사는지를 모른다.
그리고 북한이 얼마나 무서운 집단인지 모르고 있다.
지금 우리는 OECD회원국이며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다.
이승만의 탁월한 선택이 없었다면 우리모두는 지금 김정은의 병영국가에서 포로처럼
살고있을수도 있다.
더 이상 이승만을 폄하해서도 안되며,
김구의 순수함을 비웃어서도안된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폭풍과도 같았던 건국전야의 혼돈속에서 애국심과 신념, 자기희생으로 나라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오늘의 잣대로 1940년대를 재단하면 안되며, 할수도 없다.
그때는 지금과는 전혀다른 ‘그때의 시대적 정황’ 이 있는 것이다.

이제 한 주간지의 편집장이 쓴 글로 결론을 대신해 보자.
‘냉정히 말하자,
한국은 한.미 동맹의 틀 안에서 성공한 나라다.
미국 프리스턴대 박사인 이승만이 공산주의자들의 기세등등하던 해방정국에서
신생국을 친미자유진영에 편입시킨 것은 신(神)의 한 수 였다.
미국의 안보우산속에서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총력을 쏟아부은 결과 한국은
1980년대초 체제경쟁에서 북한을 압도했다.
2차대전후 독립한 신생국들은 모두 예외없이 빈곤, 전란, 독재, 쿠데타를 겪었다.
산업화없이 덜컥 민주체제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지금 어찌되었나.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성취를 이룬나라가 한국이다.
20세기 세계사의 기적을 만든 영웅들에게 고마움을 표할줄 알아야 한다.
곧 8월 15일이다.‘
광복이 되었을 때,
우리집에는 나무상자속에 진공관이 가득찬 낡은 라디오한대가 있었다.
어느날 그 상자에서 정말 생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고국에 계신 2천만동포 여러분, 나 이승만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감격에 겨워하던 생소하고 특이한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바람에 밧줄을 걸수는 없다.-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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