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학자들에 의하면,
1820년대에 세계사적 대분기(大分期)가 일어났다.
지금의 선진국들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이 대분기에 부유한 국가대열에 합류했다.
세계사적 예외가 일본, 한국, 대만이며
특히 한국은 1960년대 초까지 아프리카의 가나와 비슷한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선진국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균형을 이룬 일류국가를 의미한다.
물질문명은 압축성장이 가능하지만 정신문명은 불가능하다.
의식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더디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복이후의 대 혼란에서 걸출한 지도자들을 만나 건국했으며, 세계가 기적
이라고 부르는 산업화도 이룩했다.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정신으로 민주화에도 성공했다.
따라서 다음단계는 당연히 선진화다.
우리에게 크게 부족한 것이 균형과 효율이기 때문에 선진화 작업은 그만큼 어렵
겠지만 이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 반드시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
그게 발전이기 때문이다.
우리친구들은 한달에 한번 고급식당에 모여 즐겁게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오래
얘기를 나눈다.
그때 대화의 주제는 비교적 무거운것들이며 토론형식으로 진행한후 함께 결론을
도출하는 순서다.
노년생활을 하는 노인들이지만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에서도 많은경륜을
쌓은 사람들답게 그 얘기들이 논리정연하고 무리가 없다.
그래서 함께 도출하는 결론도 대단히 합리적이고 합목적적이다.
이런시간이 중요한 것은 80대인 노인들이 활발한 토론을 통해 지적활동, 뇌의 자극
을 받을수 있고 정신적으로 젊게 살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묵계는 우리가 만날 때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주제를 각자가 준비하는 일이다.
여럿이 내 놓은 주제중 가장 시기적으로 긴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채택된다.
가까운 친구끼리 하나의 주제를 놓고 조용하지만 치열하게 토론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은 늙었지만 정신세계는 건전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이런 모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8.15가 지난 얼마후 우리는 다시 모였다.
그날의 토론주제는 ‘선진국진입’ 에 대한것이었다.
지금의 혼란스러운 나라를 보면 우리가 과연 선진국으로 진입할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은 모두가 같았다.
그러나 해법은 달랐고,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날모인 네명중 두명은 우리나라가 지금의 수준으로는 선진국에 진입할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둘은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는 쪽이었다.
선진국 진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두명은,
외국유학에서 박사과정까지 했고, 또 한사람은 대기업의 해외주재원으로 모두가
10년이상 선진국에서 살아본 사람들이다.
10년이면 그땅의 속성은 알만큼 알 수 있다.
그들이 전개하는 비교와 설명은 체험적인 것이기에 사실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이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 갖추어야할 조건들에
대한 것이기에 공감할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만큼 디테일에 근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의 첫 번째 조건이 ‘애국심’ 이었다.
그들은 지난 8.15때 태극기 게양율이 채 1%도 안되는 심각성을 지적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대상이 무엇이든 먼저 마음이 안가고 따라서 손도 가지않는다.
애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시한게 ‘공유지의 비극’ 이었다.
누구의 땅도 아닌 모두의 공유지는 저마다 양떼를 몰고와 풀을 뜯기 때문에
종당에는 풀이 자랄 수 없고, 새싹이 솟을수도 없어 사막이 된다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부정과 부패로 제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하고
공동체의 기본약속인 법이 지켜지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적 혼란과 분열은 그 근저가 똑같이 이기심에서 비롯됐다.
지금과 같은 태극기 게양율로는, 그래서 선진국 진입은 무망하다고 했으며,
나라사랑은 공허한 개념같지만 선진국에 살아보면 대단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임을 알수있다고 했다.
우리에겐 그런 정신세계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이 ‘책임감’ 문제였다.
책임은 맡아서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임무이며
책임감은 그 임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업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예약’ 부도율은 50%가 넘고 있다.
예약은 약속이고 그건 말, 언어다.
자기말에 책임을지지 않는 것이 곧 부도다.
부도율이 평균 50%가 넘는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예약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뜻이며 거의 절반의 사람들이 자기말에 책임을 지지않고 산다는 얘기다.
신뢰사회가 될수 없는 이유다.
또 하나는 부도에 대한 페널티에서 한국은 아직 불모지라고 지적했다.
약속을 어기면 그 약속을 믿고 준비한 한쪽에선 반드시 물리적인 손해가 발생한다.
그 손해에 대해 대가를 치르도록 하는 메카니즘이 없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후진적 현상이라고 했다.
사법의 솜방망이가 선진국 진입의 커다란 걸림돌이라는 얘기다.
예약에 대한 부도는 내일을 예측할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중의 손해를 초래한다.
가장 신랄한 공격은 이 무책임이 만들어낸 정치후진성 이었다.
유권자들이 민주주의 대의정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투표에서 아직도 연고를
기준하는 정치수준의 미흡이 그것이다.
그런수준의 유권자들이 뽑은 국회의원들의 한심한 작태는 무책임의 극치라고 지적
했다.
정치는 결국 정당정치이며 각 정당은 그 이념과 정책으로 심판받아야 하는데 아직
우리에겐 그 수준이 크게 미달이라고 했다.
유권자들을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의 잇속을 찾아 이합집산하고 패거리를
만들어 권력을 지키려한다.
온갖 특권을 누리면서 민생에는 관심조차없는 귀족국회는 무책임이 만들어낸 괴물
이라는 것이다.
국회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한,
지금과 같은 패거리정치가 없어지지 않는한,
선진국진입은 어렵다는 얘기다.
정치라는 ‘틀’ 이 있어야 하나의 국가가 운영되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아픈
지적이 아닐수 없다.
다음으로 그들이 지적한 것이 ‘전문성’ 부족이다.
수많은 가게에서 인삼을 팔고있는 직원들이 자기들의 대표상품인 ‘정관장’ 에
대해 제대로 설명을 못했다.
만하자면 자기도 그게 뭔지 모르면서 팔고있는 것이다.
전문성은 자기가 하는일에 대해 지식이나 기술에서 크게익숙, 뛰어난 수준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 전문성에서 다른 선진국에 비해 크게 떨어져 있으며 가장 큰 이유는
기초에서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없는것도 기초와 전문성에서 뒤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하나, 각분야의 전문성은 읽기-공부에서 오는것인데 우리처럼 읽지않는 나라
에선 전문성 제고가 어렵다고 한다.
전문성이 중요한 것은 그게 바로 생산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같은일, 같은제품을 만들어도 양과 질에서 모두 뒤떨어지는게 결국은 전문성 부족
이라는 논리다.
근무시간은 더 길지만 생산성에서는 그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게 그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경쟁력이 나올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진국진입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가장 가슴아파하는 분야가 ‘공교육붕괴’
였다.
역사를 읽어봐도 한 국가의 미래는 분명히 교육에 달려있다.
이미 초등교육에서 결판이 날 정도다.
‘입시를 위한 암기’ 는 교육이 될 수 없다.
내일 나라를 짊어질 젊은이들은 먼저 인간적으로 성숙해야 하고 도덕과 윤리를
배워야 하고 지식으로 힘을 길러야 한다.
암기교육은 이 덕목들을 앗아갔다.
그래서 어떤 세대가 등장했는가.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못해서 세상의 온갖것을 조롱하는 망나니들이 도처에
깔렸다.
SNS를 타고 넘쳐나는 ‘천박성’ 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기에 충분한 수준이다.
그들은 힘주어 말했다.
‘교육의 정상화 없이 선진국 진입은 어렵다.’ 고.
사교육시장이 전에비해 위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공교육이 살아날 수 있는
수준은 아닌게 문제다.
또 하나는 이게 어느 개인이 해결할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지적하는 것이 매너-manner 였다.
매너는 예절이나 규칙등을 지켜야하는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취하는 태도나 몸가짐,
그리고 말씨를 의미한다.
글자그대로 신사, 숙녀의 매너인 것이다.
한편 세련됐다는 말도있다.
서투르지않고 능숙하다는 뜻도있고 깔끔하고 품위가 있다는 의미도 있다.
품위는 사람이 갖춰야할 기품을 말한다.
선진국의 ‘시민’ 은 그 자세에서 세련되어야 하며 이 문제는 특히 대인관계와 깊은
관계가 있다.
다 아는대로 우리는 ‘거칠고 상스럽다.’
상대적으로 세련되면 품위가 생기지만 거칠고 상스러우면 난폭해 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겪는 가장큰 어려움이 바로 그점이다.
노비문화의 잔재가 크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련된 관계에서는 배려가 생기지만 거칠면 적대적이 된다.
그만큼 사회생활도 힘들어진다.
특히 ‘욱하는 성질’ 이 가져오는 파괴력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토론이 여기까지 진행된후,
국내파인 진입론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부분들이 있음을 반론으로
제기했다.
10년이상 선진국에서 살아본 사람들의 지적은 크게봐서 틀린것은 아니었다.
정말 우리들 스스로가 각성하고 고쳐야 할점들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는 전쟁의 잿더미속에서 단 두세대사이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2차대전 이후 유일한 케이스다.
이건 우리가 유능하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있는 민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게
아니겠는가.
지금 비록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것을 극복할
역량이 있다는 주장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가장 아쉬운 것이 국가리더십 부재다.
흩어져 있는 가능성과 힘을 끌어모으는 구심점이 없는 것이다.
근자 이승만, 박정희가 자주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교육에 모아졌다.
공교육을 살려야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할수 있다는데에 이견이 없었다.
한해 50만이 넘게 배출되는 대졸자의 절반이 백수로 누적되는 것은 시한폭탄이
될수있다는 점에서도 인식을 같이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는 결과에만 매달려 있을뿐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226개의 4년제 대학을 그대로 두는한 이 문제는 구조적으로 풀리지 않는다.
공교육을 살리지 못하면 입시기계에서 찍어내는 암기족만 양산할 뿐이다.
그런 인력으로는 나라의 내일을 기약할수 없다는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시간도 걸리고 어려움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도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리고 노력이 그 시기를 앞당길수도 있다.
애국심도, 책임감과 전문성도, 정치판도, 그리고 세련된 매너도 전부 기초교육에서
시작되는 덕목들이다.
그래서 교육의 정상화가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열쇠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말을타는 자세에따라 기사도 될 수 있고 마부도 될 수 있다.- 세르반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