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은 순수한 우리말로 새해 첫날을 이르는 말이다.
이때 새해는 물론 음력이 기준이다.
태양력인 양력을 아직도 ‘달럭-月曆’ 이라고 부르는 것은 태음력의 준말인 음력의
다른표현으로 우리 일상에 남아있는 옛생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양력을 사용하면서 양력에서의 새해첫날은 신정(新正)-양력설로,
음력의 새해첫날은 구정(舊正)-음력설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설명절은 어디까지나 음력의 새해첫날이다.
명절은 오랜 풍습에따라 온나라 사람들이 즐겁게 지내도록 계절에 따라 택하여
정해진 날로서 설날이나 추석등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국가적, 사회적으로 정하여 경축하는 기념일로 삼일절이나 광복절등이
있다.
우리의 경우 아마도 가장 큰 명절은 변함없이 설날과 추석일 것이다.
경축일로는 삼일절과 광복절이 가장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보도에 따르면 금년의 설연후에 예상된 총인구이동은 3천115만명 정도이며,
이 기간동안 하루에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515만대 수준이라고 한다.
글자그대로 민족대이동 이라고 할 수 있다.
길고 힘든길을 마다하지 않고 모두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은 가족, 친지들과의
즐거운 재회가 있기때문이며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전통생활양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각박한 세상에 그건 끝까지 지켜야할 우리의 미풍양속이 아닐수 없다.
나는 매해 설날이되면 마음이 슬퍼지고 우울해진다.
그리운 고향에 갈수 없기 때문이다.
1946년 월남한 이후 70년동안 하룻길인 고향에 가지못하고 있다.
휴전선이 가로 놓여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수많은 실향민들이 파주의 망배단에 모여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다.
고향을 지척에 두고 갈수가 없다면 그게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비극이 해마다 되풀이 되고 있다.
런던에 주재하던 태영호 공사가 얼마전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인천공항에 도착, 서울로 이동하면서 처음느낀 소회는 ‘강산이 같다’ 는
것이었다.
같은땅이니 같을 수밖에.
같은땅, 들과산이 새삼 같아보였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차단된 사회에서 살았는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족은 1946년 여름,
한밤중에 인민군의 눈을피해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그리고 70년동안 그때떠난 고향에 가보지 못하고있는 것이다.
우리의 본가는 평안북도 강계다.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들은 생전에 반드시 고향에 갈수있다는 희망을 버린적이
없었다.
지금80대인 나 역시 언젠가는 그리운 고향에 돌아갈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살고
있다.
가족단위로 계산하면 실향민-이산가족은 천만명이 넘는다.
아직도 고향산천을 똑똑히 기억하고있는 나이많은 실향민들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안타까운일이 아닐수 없다.
밖에서 들어오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일단 이땅에서는 극단화한다.
정치도, 문화도, 교육도, 종교까지도 그렇다.
극단(極端)은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크게 치우치는 것이다.
개신교의 경우 이땅에 들어온후 심령대부흥회라는 굿판을 통해 광신, 미신, 기복
으로 변질한게 그런예다.
남과북의 대치도 극단적이기 때문에 작은교류도 없이 더 강고해지고 있다.
우리는 그 누구라도 마음대로 해외에 나갈수 있다.
그러나 북은 단 한사람도 밖으로 나갈수가 없는 철조망으로 둘러친 포로수용소다.
사회주의가 극단으로변질,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 독재국가가
됐다.
우리의 극단적인 민족성이 지금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척에 고향을 두고 왕래할수 없다는 것은 우선 인간적으로 비극이다.
이데올로기-체제가 가로막아 자기고향에 가지못하고 있다.
세계에 하나남은 체제의 높은 차단벽이 우리사이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1945년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에는 쏘련군과 연합군이 진주,
동,서독으로 분리됐다.
그리고 1960년 유명한 배를린장벽이 세워졌으며 자유를 찾아 장벽을 넘으려던
수많은 사람들이 사살됐다.
1969년 서독의 위대한 정치지도자 빌리 브란트는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유명한
‘동방정책’을 시작했다.
1972-87년까지 34차례의 협상을 통해 과학기술, 문화, 환경분야에 대해 협력체계를
구축했다.
그 이후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한 비전을 가지고 진척됐다.
우선 인적교류다.
서독인의 동독친척방문, 그리고 그 반대의 민간인 교류가 엄격하고 제한적이었지만
꾸준히 계속되었고 확대되었다.
우리는 지금 고향에 살고있는 가족, 인척의 생사도 모르고 있다.
편지조차 주고받지 못한다.
우리가 아니라 북이 이를 막고있기 때문이다.
유입될 정보의 홍수를 막을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아예 막아버리고 있다.
두 번째가 돈과 물자의 교류다.
서독은 동독에서 체포, 감금되어있는 정치범들을 돈을주고 데려왔으며,
서독군대의 피복을 동독에서 제작했다.
도로신설과 보수등 토목공사도 동독에 맡겼고, 분리수거된 재활용품의 처리도
동독에 맡겼다.
우리는 우리의 물자가 남아돌아도 그것을 북에 보낼방법이 없다.
그동안 북의 굶주린 동포들을위해 보낸 쌀의 경우,
탈북자중 그 쌀을 받아봤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고스란히 당 간부와 군대에 갔기 때문이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으로 북에 떨어지는 돈은 대부분 당이차지, 김정은의
통치자금으로 쓰인다.
햇볕정책으로 퍼준 거액이 핵개발에 쓰였다는 것은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금 우리는 쌀이 남아돌지만 그것을 북한주민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이 없다.
우리측 요원들이 배급에 입회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고 있다.
그쌀이 주민들에게 배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쌀뿐 아니라 그 무엇이든 주민들에게 직접 전달할수 없는게 북의 실정이다.
남쪽에는 물자가 차고넘치고 북쪽에는 모자라도 이를 해결할 방도가 없다.
마지막으로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TV를 시청하게 되었다.
통일을 준비하는데 있어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없다.
동,서독의 통일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라는 세계적인 변화가 그 계기
였다면 이미 안으로 다져진 내용적 연대가 그 계기를 선용, 통일을 이룬 것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빌리 브란트라는 위대한 정치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며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동,서독의 고위관리들이 있었음을 잊으면 안된다.
인적교류, 물자교류, TV시청은 유연성에서 오는것들이다.
극단으로 경직된 남북관계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동,서독은 분리되었지만,
이미 그들은 선진국 이었고 함께 나누던 유럽의 수준높은 문화가 있었으며
사고방식에서 유연했다.
아직도 통일의 후유증은 남아있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다.
우리는 이런 유연성들을 독일로부터 배워야 한다.
방법이 아니라 정신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상당수 젊은세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자.
북쪽의 주민들은 우리의 혈육이다.
병영국가에 갇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도대체 우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의 가족인 그들을 구할것인가.
통일이 되면 국토가 배로 늘어나고 북쪽의 부존자원을 활용할수 있는 것은 물룬,
8천만이 넘는 인구라면 내수산업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
이미 북한경제의 3분의1은 ‘장마당경제’ 가 담당하고 있다.
장마당은 시장이고 시장은 그 근본에서 자본주의다.
각종 전자기기는 남쪽의 거의 모든 것을 북쪽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백두혈통-김정은에 대한 충성도도 이미 전같지 않다.
보위부원에 대드는 인민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병영국가 안에서 이미 작은 변화들이 시작되고있다는 신호들이다.
북의 지도부가 핵개발에 매달리는 것은 다른 방어수단이 없기때문이며 그것을
손에서 놓게되면 파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북의 핵심세력들은 전범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에게는 신분상의 안전보장을 암시적으로 전달해야한다.
때문에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무력화한 국정원의 대북라인을 빨리재건, 활용해야
한다.
통일에는 반드시 ‘물밑접촉’ 이 관건이 될수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핵심세력에 대해서는 상응하는 단죄가 있을것임을 말해줘야 옳다.
군함이 소형어선에서나 쓰는 소나(수중음향탐지기)를 달고 진수했다면 이걸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방산비리, 군납부정부패 때문이다.
지금 우리들은 군지휘관들을 대놓고 ‘똥별’ 이라고 부른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썪은똥별들이 북을 상대로 승리하는 전쟁을 할수있을까.
역사상 모든군대는 무기-장비가 아니라 ‘정신’으로싸울 때 승리했다.
우리군대에 그 ‘정신’ 이있을까.
장담할수도, 믿을수도 없는게 현실이다.
우리집에서도 나까지는 고향에 대해 구체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산하를 기억하고 골목길들을 알고있으며 나이는 들었지만 사촌들을 만나면
알아볼수 있다.
그러나 다음세대는 고향에 대한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고향을 잃어버린세대’가
된다.
통일이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세계국가로 존재하기 위해서도 통일은 필수다.
물리적인 크기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나는 사촌들과 뛰놀던 산하와 물고기를 잡던 대동강지류를 기억하고 있다.
강계는 예로부터 미인이 많다고 했다.
정말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도 미인이셨다.
설이되면 고향에 가서 가족과 친지들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되새기곤한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방배단에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는 모든 실향민들의 마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송이 눈을봐도 고향눈이요
두송이 눈을봐도 고향눈일세- 고복수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