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지금 우리사회는 여러 가지로 크게 혼란스럽다.
그중 하나가 극단으로 치닫는 여러 가지 갈등구조다.
있는자와 없는자의 빈부갈등은 대표적인 것이며,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정치적 이념갈등,
영남과 호남으로 대표되는 지역갈등,
나이에 따라 갈라지는 세대갈등,
배운자와 배우지 못한자의 학력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대우갈등,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갑,을 갈등,
적어 나가자면 그 끝이 안보일 정도다.
역사적으로 어느사회나 갈등은 있어왔고, 그것이 촉매가되어 발전한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사회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기 때문에 해법이 없이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안겨주는 망국적인 것이다.
나, 아니면 적밖에 없기 때문에 중간자리가 없고, 완충지대가 없기 때문에 한쪽이
죽어야 끝나는 참담한 구조다.
선거가 끝나면 승자가 독식하고 패자는 폐족이 된다.
그러니 싸움이 치열할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사회로 치닫고있는 원인은 여러가지다.
그중 하나가 ‘에코 체임버, echo- chamber’ 다.
에코 체임버는 온라인 공간이 만든 새로운 구조다.
같은생각, 같은 이념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있으면 이념과 사상이 더 공고해진다.
동호인, 동지끼리 똘똘뭉치는 온라인세상은 에코체임버 효과를 강화한다.
닫힌시스템에서는 정보와 아이디어를 공유할수록 그 내용과 형식이 증폭, 강화된다.
다양성이나 다른의견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없는 닫힌공간이 될 수밖에 없는구조다.
온라인공간이 동호인끼리의 카페라는 폐쇄적 좁은공간이라면 오프라인은 넓은광장
이다.
과거에는 이 넓은광장에서 나와 다른생각, 다른이념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당연히 반대의견도, 다른생각도, 듣기싫은 소리도 들을수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 공간에서는 나와다른생각, 이념을 가진 사람은 쉽게 배제된다.
오직 같은생각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끼리 온라인 공간에서 더 강력하게 뭉치는 것이다.
나와 다른의견이 배제된 집단성 에서는 결국 전체주의의 악몽이 잉태될 수밖에 없다.
극간으로 치닫는 첫걸음이 그렇다.

에코 체임버는 IT인프라가 만들어낸 SNS의 부산물이다.
스마트폰 보급률이 이미 80%,
여기에 60%이상의 이용자가 SNS에 편입돼 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생산, 등장하면 그 이유에 대한 찬,반 논리가 뜨겁게
격돌하고 극단적인 주장, 논리가 SNS를 타고 광속으로 퍼져나간다.
찬, 반 논리사이에는 그 극단성과 속도 때문에 진위를 가릴수 있는 ‘여유’ 가 없어
진다.
동시에 벌써 다른 이슈가 생산되며 이 이슈는 똑같은 순서를 통해 우리사회를 둘로
쪼갠다.
보수는 보수끼리, 진보는 진보끼리 이기적인 정보와 의견을 주고받으며 자기들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 나간다.
따라서 양쪽사이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다른쪽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없어
진다.
극단은 독선을 끌고오며 독선은 우리사회를 경직시키는 독버섯이다.
IT인프라는 전에는 없던, 넓은광장을 삼켜버린 새로운 메카니즘이다.
같은 칼 이라도 주부가들면 요리하는 도구가 되지만
강도가 들면 사람을 해치는 흉기가 되는 법칙이 그것이다.

끼리끼리뭉쳐 자기들의 주장을 공고히 하면 다른쪽은 ‘적’ 이된다.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토론문화가 없는이유다.
토론(討論)은,
어떤 의견이나 제안에 대해 찬성과 반대의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상대를 설득하거나 상대에게 정당함을 주장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토론문화가 있기위해서는 ‘다른의견’ 도 있을수 있다는 열린마음이 있어야된다.
다른 하나는 토론을 통해 더 좋은내용을 도출할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어야 한다.
대의정치인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에서는 예외없이 토론문화가 있다.
우리는 학교교육에서도 질문과 토론이 없다.
토론에 대한 교육이 없기 때문에 쉽게 ‘말다툼’이 생기고 급기야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이다.
나와다른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이 문화적 체질이 극단주의를 부르는 또 하나의
요인이된다.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할 높은벽인 것이다.

애들은 부모를 보면서 자란다.
부모에게서 말을 배우고 행동거지를 닮는다.
귀납접적인 얘기이긴 하지만,
나 아니면 적이라는 폐쇄적인 사고방식은 구세대, 노년층에 더 심하다.
구세대는 좌파와 우파에 대한 이분법적인 잣대가 아주 강하다.
흑백논리에 강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잘 굽히지 않는다.
일제의 식민지교육과 과거의독재정권은 전체주의적 이었으며 이들세대가 지금
까지도 집단적인 행태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 세대가 볼 때 지금의 세상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곧 붕괴될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한다.
따라서 다음세대가 극단적이 된 데에는 이들의 책임도 크다.
그래서 구세대는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세상이 바뀌고 사회적인 메카니즘이 변한것도 인정해야한다.
흑백논리의 이분법에서 해방돼야 하는 절실한 이유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는 글자그대로 지구촌, 글로벌시대다.
이런 시대를 살기위해서는 함께살고있는 이웃이 중요해지며 그 이웃은 바로 이웃
나라들이다.
라면 하나만 봐도 80여개국으로 수출하고 있다.
특히나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는 소재를 수입, 가공, 제품을 만들어 수출해서
먹고사는 나라다.
지구촌시대의 가장 큰 덕목은 말할 것도 없이 다양성과 개방성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에는 다양성도 개방성도 설 자리가 없다.
양극화로 첨예하게 대립하고있는 경직된 사회는 그래서 제3의지대, 중간자리가
없다.
자칫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매도당할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진영논리에 빠져 죽기아니면 살기의 싸움으로 일관하는 정치권의 책임이
아주크다.
그들은 권력투쟁에만 몰입, 민생을 돌아보지 않고있으며 지금도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해 망국적 표퓰리즘을 서슴치 않는다.
나라야 어찌되든 나만 입신양명하면 되는 것이다.
사실은 가장 무서운 무리들이다.

사회의 극단적인 양극화에는 우리가 다함께 깊이 반성해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
있다.
그게 ‘국가백년대계’의 교육이다.
지금의 우리교육은 엄밀한의미에서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교육이 입시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면서 그 막중한 책임을 사교육시장-학원에
내 주고 말았다.
인간을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야할 ‘인성교육’ 이 실종되었으며,
도구과목에 매달려 사는 아이들은 더하기보다는 빼기를 먼저 배우는 각박한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
점수를 위한 치열한 경쟁이 그것이다.
칭찬과 배려가 없다면, 그런덕목을 배우지못했다면 양극화의 첨예한 대립은
대물림된다.
남을 깎아내려야 자존감이 올라가는것같고, 자긍심이 강해지는것같은 착각이
견고해진다.
사람이 각박하게 자라면 여유를 모르게 된다.
그 생각에 여유, 여백이 있어야 제3의자리, 중간지대가 만들어질수 있다.
중간지대가 있으면 양극단의 충돌은 피할수 있으며 대립에서 얻는 것 보다
몇배 효율적인 지혜를 얻을수 있다.

중용(中庸) 이라는 말이있다.
동양철학의 기본개념으로서 유교경전의 하나인 사서에 나오는 단어다.
중용에서 말하는 도덕론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없이 도리에 맞는 것이 中 이며
평상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庸 이다.
말하자면 모자라거나 지나치지않고 떳떳하며 변함이 없는 상태와 정도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德論)의 중심개념이기도 하며,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하고 지견(智見)으로 과대와 과소가 아닌 올바르게 중간을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양극단을 피하라는 이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에서 변함이 없다.
결국 양극단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한쪽은 죽고, 한쪽만 살게된다.
죽기까기 싸우고 피를 봐야 끝나는 구조다.
따라서 ‘중간지대’ 가 없으면 그 사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극단적으로 대치할 수밖에
없다.
사람살기에 가장 어렵고 불편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본수와 진보가 볼 때
중도는 비겁한 회색분자이거나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로 비쳐질수 있다.
따라서 우리처럼 첨예하게 극단화한 사회에서는 양극단중 하나를 선택하는것보다
더큰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보수나 진보처럼 중도주의도 어엿한 노선중 하나다.
중도주의는 모든사회에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갈등이 큰 사회에서는 양극단의 화합을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엄격히 말하면 중도는 상당한 균형감각 없이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런의미에서 중도주의는 가장 세련된 이념이기도 하다.
지금의 우리사회가 이 혼란을 극복하고 모두가 편히 살고싶다면 ‘중도’ 가 설
자리를 반드시 마련해야 하고 그들을 인정하고 활용할줄 알아야 된다.
중용은 아주 오래된 사상이지만 그 가르침이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된 이유가
그것이다.

극단은 다른 극단을 불러온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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