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0대의 구 세대이며,
중학생으로서, 철이들어 6.25전쟁을 겪은 마지막 세대이기도 하다.
두 번의 피난생활과 함께 3년동안 겪었던 전쟁의 참화는 필설로는 다 설명할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기를 찢으며 날아가는 포탄의 무시무시한 소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널려있는게 시체였으며 붉은완장을 찬 동네빨갱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였는지도
기억에 새롭다.
먹을것과 물, 그리고 잠자리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일 인지도 그때 깨달
았다.
엄친의 전사통지서를 받은이후 우리집은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내가 대학을 졸업,
취직할때까지의 고생은 자당의 말씀처럼 ‘소설로는 다 못쓰는’ 가시밭 길 이었다.
전쟁은 보이는것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것까지 파괴하는 엄청난
재앙이었다.
전쟁을 겪은세대가 전쟁에 대해 가지고있는 공포와 전쟁을 겪지않은 세대의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그건 당연하기도 하다.
똑같이 안보문제에 대한 시각과 자세도 두 세대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체험과 경험의 차이는 그렇게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국가안보’에 대한 기준은 어디에 맞추는 것이 더 합리적일까.
왜냐하면 그건 현실적으로 우리가 죽고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건국이후 처음으로 크게 좌경화되고 있다.
6.25전쟁을 겪은세대가 이를 걱정하는 것은 세대갈등이 아니라 우리의 생사가
걸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며 젊은세대가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다는 판단
에서다.
볼세비키혁명이후 70여년의 혹독한 실험을 통해 사회주의이데올로기는 비인간성
때문에 용도폐기됐다.
오늘의 북한을 보면 저절로 설명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의 얼치기 진보좌파들은 그 망령을 끌어안고 혁명을 얘기하는
치졸한 수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심성이 태생적으로 꼬여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2일,
전미국신문기자협회(NPC)에서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딘 에치슨(1949-1953)은
‘아시아에서의 위기’ 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는데,
이 연설을 ‘에치슨선언’ 이라고 한다.
주요내용은 제2차대전이후 동,서진영으로 갈라진 상태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의 아시아에 대한 공산화야욕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에서의 미국방위선을
알류산열도-일본-오끼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즉 에치슨 라인을 설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지배적 이었다.
이 선언에 대해 한국정부는 임병직 외무장관이 주한미국대사 존 무처를 불러
에치슨라인의 진의를 해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훈령을 보내 에치슨발언의 경위를 조사,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에치슨은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에치슨 선언으로 미국의 태평양 방위라인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인도차이나반도가 제외됐다.
미국의 결정적 오판은,
태평양방위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해도 ‘전쟁’은 없을 것 이라는 것 이었으며,
스탈린과 모태동의 오판은,
에치슨라인에 근거, 공산화를 위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양쪽의 정세오판은 결국 6.25전쟁이라는 참화를 불러왔으며.
동,서진영의 대리전이기도 한 이 전쟁에서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채 일어서기도
전에 전국토가 초토화되고 말았다.
수백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 처참한 전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에치슨라인
이었으며 미 공화당의 격열한 비난과 함께 ‘에치슨선언’ 은 결국 철회됐다.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한반도의 위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우리를 배제한채 북한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당사자는 우리지만 우리에게는 몫이 없는 것이다.
이게 현실이다.
대선이 끝나고 좌파정권이 들어서는 경우,
우리앞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위기’가 조성될수 있다.
특히 절체절명의 문제는 ‘국가안보’다.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자주국방’의 능력이 없다.
미국의 ‘핵우산’ 이 그 증거다.
북한과 우리는 군사적으로 비대칭적이다.
한쪽이 핵무기를, 다른한쪽이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있는게 현실이다.
낙관적으로 생각해봐도,
한미관계는 그 기본에서는 유지되더라도 군사적동맹은 다른문제가 될 것이다.
비관적으론 전망한다면,
미국은 일본열도를 방위선으로 하는 ‘제2의 에치슨라인’을 긋고 한국을 대륙쪽
으로 방치할수 있다.
기업가 출신인 트럼프가 일본의 아베와 독일의 메르켈 총리를 대하는 극단적인
차이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아시아에서의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변했다고 생각하면 이 시나리오는 현실이 된다.
좌파정부는 그 속성상 ‘반미’를 깔고있기 때문에 대미외교에서 실리적으로 손해볼
가능성이 높다.
우선 한미관계는 냉각될 것이며 사드배치에 대한 입장차이,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관광의 재개는 한미관계와 대유엔 관계에서 엇박자가 될것이며 한국은
그만큼 고립된다.
나아가서는 가장 예민한 문제인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은 물론, 주한미군의 존재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수 있다.
북한이 그동안 줄기차게 요구하는게 주한미군의 철수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선후보중 하나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우리의 필요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무서운현실주의자인 트럼프는 손익계산을 해본후 중국대륙과 일본
열도룰 가로지르는 새 에치슨라인을 설정하고 한국에서는 손을 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미국우선주의’ 가 그의 정치철학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모두는 우리의 생존, 국가안보를 위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금후의 사태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해 봐야한다.
선택이 잘못되면 그 결과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비참한 것이 될 수 있다.
과거 좌파정권때도 반미나 친북노선이 있었지만 그때는 보수,우파세력이 건재했었다.
때문에 미국정부는 좌파의 주장에 이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보수, 우파세력이 크게 약화돼 있다.
또 한가지 무서운 일은,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하는 경우 북한의 반격과 한,미의 재반격으로 한반도는
첨단의 무기들에 의해 파과될 것이다.
지금의 전쟁은 무기의 첨예화로 전,후방이 따로없다.
주요시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더 위험해 질 수 있다.
이때의 변수가 중국이다.
미국의 압박과 중국의 역할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가 최대관심사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중국은 끝까지 북한편이라는 점이다.
미국도 중국도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변수가 일본의 재무장이다.
패전국일본 이었을때는 상대적으로 한국이 미국에게는 더 중요한 동맹국이었다.
대아시아정책에서 한국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미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 가 됐고 필요하다면 즉시 핵무장까지도
할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한국보다 든든한 우방인 일본에 더 기댈 수밖에 없다.
우리만 개밥에 도토리가 되는 것이다.
한,미동맹도, 주한미군도 국제정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지금까지는 한국과 미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그러나 좌파정권이 들어선후 이 기본관계에서 금이가기 시작한다면 먼저 손을
떼는 것은 미국쪽이 될 것이다.
그이후, 좌파정권은 혼자의 힘으로 국가안보를 책임질수 있을까,
정말 그들에게 그만한 정치적 역량이 있는것일까.
아무도 그렇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국가안보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실리적인 검토를
해봤다.
많은 변수들이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예측하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한국인의 선택’이다.
그 선택에따라,
현상이 유지되어 국가안보가 지켜질수도 있고,
한미관계에 균열이 생겨 결과적으로 미국이 손을 뗼수도 있으며,
최악의 경우 전쟁이 벌어질수도 있다.
이제 우리모두는 우리의 선택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기준을 설정해야한다.
어떤정당, 어떤개인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국가안보가 최우선이다.
이게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절박함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인도를 올가매는 것은
영국의 대포가 아니라 인도자신이다.- 마하트마 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