攝 理.
섭리라는단어는,
끌어잡을섭(攝)자와다스릴리(理)자로구성되어있다.
이단어의뜻은일반적인의미와종교적해석에서크게갈라진다.
일반적으로섭리는,
병(病)을조섭(調攝)한다는뜻이있다.
이는몸을보살피고병을다스린다는의미다.
다른한가지는어떤일을대신맡아처리하는것도섭리라고한다.
더큰의미에서’자연의섭리’라는말이있다.
자연세계를지배하는이법(理法)이며자연법칙이그것이다.
계절의순환과생로병사(生老病死)가그런것이다.
그어떤것도이자연의섭리,법칙을거스리지못한다.
섭리는그렇게큰흐름이며힘이다.

기독교에서말하는섭리는그의미에서일반적인해석과는질적으로다르다.
인간이나자연계가자립적인것이아니고하나님의지배와그붙드심에힘입고
있다는신앙적설명이다.
그래서’구원’을하나님의섭리라고말한다.
신학적해석에서섭리는세가지요소를가진다.
보존-만물의존재,
협력-그활동,
통치-지도하심이그것이다.
일반적의미에서도종교적인내용을가지는경우가있는데,
천우(天佑)가그것이다.
하늘의도움이라는뜻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말할때그것은하늘과신령의도움을의미한다.
예를들어사경(死境)을헤매다천우신조로살아났다고할때그런의미로쓰이고
있다.
섭리는일반적인의미에서나종교적인의미모두에서상당한무게를가지는어휘
이며그사용또한신중하고예사롭지가않다.

마태복음이독자적으로채집,수록한’천국비유’중,’포도원일꾼과품삯’이있다.
20장1-16절의내용이그것인바,
포도나무를손질할때가되어주인은일꾼들을고용하기위해이른아침거리로
나갔다.
하루한데나리온의품삯을주기로하고이른아침,오전9시,12시,오후3시,그리고
5시에각각일꾼들포도원에보냈다.
날이저물어품삯을지불하게되었을때,5번의시차를두고고용된일꾼들이똑같이
한데나리온씩받는이변이일어났다.
하루종일일한사람과한시간밖에일하지않은사람이같은임금을받은것이다.

이른아침부터뙤약볕밑에서일한사람들이불평하는것은당연하다.
이비유의비상식적반전은주인의설명에서비롯된다.
시차에관계없이일한사람모두에게같은품삯을지불하는것이자기의뜻이라는
것이다.
그리고핵심에접근한다.
꼴찌가첫째가되고첫째가꼴찌가될것이다.
이역전이야말로하늘나라의비밀이다.
이놀라운비유는구원의섭리에대한인간의기준과하나님의기준이상충된,
대단히특이한것으로그만큼결정적인의미를담고있다.
마태의이기록은유대인들의율법적공적주의(功積主義)에대해정면에서그것을
부정하는의도를가지고있다.
구원은하나님의섭리이지인간의공로에의해주어지는것이아니라는,대단히
단호한설명이다.

인간은계량(計量)과계수(計數)로차별화를시도한다.
인류의역사가그러하다.
일반적인사회생활에서그차별화는필요한것이며이로서우,열을가린다.
이른아침에포도원에들어가일한사람들의주장이그것이다.
오후5시에들어온사람들보다는그계량과계수에서분명더많은임금을받아야
한다는요구를하고있다.
이때중요한것은그들이처음포도원주인과약속한임금이한데나리온이었다는
사실이거부된점이다.
약속은약속이지만,실제로는더받아야하겠다는주장이다.
모태신앙,
교회학교영아부에서부터시작된신앙생활,
성수주일과십일조의철저한이행.
교회에서의각종봉사활동,
집사,권사,장로의직분.
빠짐없이나가고있는새벽기도회.
이모든조건은’보이는공적-업적’이다.
우리모두는,
이공적이’구원’의조건이될수있다는생각을가지고있다.
또그러기를바란다.

무리를해가며예배당건물을키우고,
총동원주일과전단,가가호호를방문해서라도교인수를기천,기만으로늘리고,
교회버스를운행,사람들을실어나르고,여러부설기관과각종이벤트,
해외선교사까지개교회가파송하는무모함이왜생기는가.
꿩잡는게매라는생각때문이다.
‘하늘나라’가무엇인지모르기때문이다.
인간의공적과물량으로그것을확보할수있다는반기독교적신앙이초래한결과
가그것이다.

주께서이놀라운비유를말씀하시는서두를보자.
‘하늘나라는이렇게비유할수있다.’
인간이하늘나라에가는,구원에대한비유인것이다.
이비유의핵심은,
이른아침부터오후5시까지의모든시차,차별이무시된점이다.
계량과계수가무의미해졌다.
공적과업적이설자리가없어졌다.
한데나리온으로상징된’구원’은포도원으로부름을받은모든사람들에게
똑같이주어졌다.
가장중요한것은’부르심을받은’사실이다.
인간의기준과하나님의섭리사이에생긴이근본적차이는’참신앙’이아니면
이해하지못한다.
거짓신앙만이계수와계량에매달려공적-업적을인정받으려고한다.
가진게그것밖에없기때문이다.
그게바로불순종이며거짓신앙이다.
보이지않는것을보이는것으로대체하려는어리석음이다.

한국의교회-교인들은지금이루말할수없이’교만’하다.
도무지하나님앞에서겸손하지못하다.
계량할수있는것,계수되는모든보이는것을계속키워나가는것이그것이다.
그건새로운’바벨탑’이다.
인간의것으로하나님께도전하는무모함이그안에있지만아랑곳하지않는다.
이미오래동안계랑,계수의물량화가진행돼왔기때문에이제는하나의타성이
되어멈추지못한다.
정말무섭고두려운일이아닐수없다.
그본질에서보이지않는것을추구해야하는고등종교가온갖보이는것을탐욕
스럽게추구하는인간의종교로변질되었다.
성(聖)이썪으면그악취는몇배나강하다.
거룩한것이인간에의해썪었기때문이다.
비단보자기에쌌다고오물의냄새가안나겠는가.

마태복음은,
그서두인1장1-17절을보면이복음서가특히유대인크리스챤들을위해쓰여
졌다는것을알수있다.
아브라함부터예수까지의족보가그것이다.
한부족(部族)에게있어족보는생명같은것이다.
야훼는그들의부족신이다.
20장의포도원일꾼과품삯의비유는유대인들이전통적으로가지고있는공적주의
에대한일대반격이다.
예수를’혁명가’라고부르는소이가그렇다.
주께서공적-업적을배격하신이유는무엇일까.
구원은하나님의섭리로서주어지는’은총’이지인간이자기의공로로획득할수
있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
그잘못을지적하신것이다.
구원의조건은언제나하나뿐이다.
pistis-faith-믿음뿐이다.
‘믿음’이무엇인가.
하나님의절대적인’올바름’을전적으로신뢰하는것이다.
따라서그분의섭리-결정도올바르다는신뢰가믿음이다.
그믿음에시차-차별,계량-계수는끼어들틈이없다.
전혀그차원이서로다른세계이기때문이다.
이른아침이든,저녁5시든,시차에관계없이부르심을받은사실에감사하고맡겨진
일에충실하면된다.
구원은전적으로’나’개인과하나님사이의절대적인문제이기에상대적인다른
사람과연관지을이유가없다.
이른아침과오후5시는인간의시간이지만,한데나리온씩품삯을주는시간은
하나님의시간이다.
어떤인간이,무슨자격으로,무엇을가지고하나님의섭리에간섭할수있겠는가.
인간에게간섭받는하나님이라면그건단지우상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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