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타나 계신분.
시적인천재성을가진’프랑코제피렐리’감독은
1977년371분짜리3부작[나사렛예수]를4년여의노력끝에완성했다.
아직까지만들어진’예수전’가운데최고의걸작으로분류된다.
그가캐스팅한예수역의’로버트파웰’은영국시골극장의무명배우였다.
제피렐리는카메라렌즈로파웰의눈을드려다보고그를선택했다고말했다.
그렇게,파웰의눈은맑고아름답고투명한눈이었다.
마리아역을맡은’올리비아핫세’의탁월한연기도우리는잊지못한다.
그때그녀는결별때문에고통스러운시간을지나고있었다.

그영화[나사렛예수]의마지막부분,
가룟유다와예수를넘겨받는거래를주도했던가야바쪽의유대인’제라’는
예수가부활한후그사실을확인하기위해빈무덤에직접가본다.
무덤이비어있는것을확인한’제라’는참담한표정으로말한다.
‘이제시작이군.’
명석한유대인’제라’는자기들의치밀한계획이완전히수포로돌아갔다는사실을
깨달은것이다.
무덤이봉인되고그입구를큰돌로막았을때,
예수의실패는현실이었다.
그렇게끝난것이다.거의모두가그렇게생각했다.
아리마데요셉과니고데모의용기로그의시신이십자가에달려훼손되지않은것만도
다행이었다.
(우리가아는것과는달리로마는십자가의시신을내리지않았으며날짐승들의먹이가되게
했다.십자가처형은가장무거운사형방법이었다.)

산헤드린의사악한세력들은가슴을쓸어내렸을것이고빌라도는민란이일어나지않은것에
안도했을것이다.
그들은이제더이상나사렛청년때문에골치아픈일은일어나지않을것으로단정하고안심했다.
그러나사실은그게시작이었다.
죽은사람은잊혀진다.
잊혀져야정말죽는것이다.
그런데십자가에서처형된,분명히무덤에묻힌그예수를봤다는사람들이하나둘나타나기
시작한것이다.
단지소문이었다면시간이지나면잦아들어야하는것인데날이갈수록그를봤다는사람들이
늘어나고숨어있던그의제자들이나서서’형태’를갖추기시작했다.
그건그누구도생각지못했던새로운사태의발전이었다.

초대교회의기록된증언중가장구체적인것이바울의설명이다.
‘그리스도께서는먼저베드로에게나타나신뒤에다시열두사도에게나타나셨읍니다.
또한번에오백명이넘는교우들에게도나타나셨는데그중에는이미세상을떠난사람도
있지만대다수는아직도살아있읍니다.
그뒤에야고보에게나타나시고또모든사도들에게도나타나셨읍니다.
그리고마지막으로팔삭둥이같은나에게도나타나셨읍니다.’고전15:5-8공동.
이본문에서주목할것은,
부활하신예수를새벽에조우했던여인들의이야기와혼란스러운상황설명이삭제된점이다.
그리고3절에보면,
‘나는내가전해받은가장중요한것을여러분에게전해드렸읍니다.’라는대목이있다.
즉,바울은이미초대교회에서정형화된,고정된고백문을인용하고있는것이다.
이미부활신앙의고백은사도중심으로서술되는전승이확립된것이며바울은그것을다시
고린도교인들에게전한것이다.
말하자면게바로부터바울까지의병열적나열이그것을증명하고있으며중요한최초의
증인이될수있는여인들은삭제되고대신게바가선두에등장한것이다.

다음은,
‘나타나셨다’는단어에대한설명이필요하다.
단순과거수동태인옵데,-opthe-appear는,
보는자의경험에촛점을두기보다는나타내보이는분의주체적의지를부각시키는단어다.
따라서부활경험을현현경험에참여한자들의주관적경험으로만축소시킬수가없다.
오히려’계시적현현’쪽에무게가더실리는단어다.
그들은무엇을보았는가.
무엇을느꼈으며어떤체험을했는가.
가장중요한증언은바울스스로가자기체험으로말하고있다.
‘마지막으로팔삭둥이같은나에게도나타나셨읍니다.’
이고백은,
말할것도없이사도행전9장에상세하게기록된것으로다마스커스로가던중극적으로
그리스도와조우한체험적사건이다.
바울은주의음성을들었고그분과말을나누었다.
바울은하늘로부터의강열한빛에의해땅에엎어졌으며실명하게된다.
바울과동행하던사람들은’음성’은들었지만눈으로본것은아무것도없었다.
부활하신예수가바울에게나타나신’방법’이그러했으며이는옵데라는단어의의미를
이해할수있는중요한단서가된다.

고린도전서는바울의3차전도여행시에베소에서써보낸것으로주후53-55년어간에
기록됐다.
여기에비해로마에서기록된베드로전서는주후64년경에기록된책이다.
10년의경과는특히초대교회에서의’교리적정리’를위해서는중요한기간이될수있으며
베드로전서3:18절은그대표적인사례라고할수있다.
‘그리스도께서는몸으로는죽으셨지만영적으로는다시사셨읍니다.’-공동.
sarki-flesh로는죽었지만pnumati-spirit으로는부활하셨다는것이다.
Hewasputtodeathinthebodybutmadealivebythespirit.-TNIV.
몸은보이지만영은보이지않는다.
바울이조우한분이그분이다.
바울은그분이그렇게자기에게’나타나셨다’고했는데그건하나도틀린말이아니다.
주께서는바울에게나타나셨고말씀까지주고받으셨다.
그놀라운체험은사울이바울이되게하고순교하기까지자기가만난그리스도를전하는
결정적인계기가됐다.
바울에의해비로서’기독교’가탄생되었다.

지금의우리들은예배를드릴때성경말씀을봉독한후,
‘살아계신말씀’이라고한다.
그리고그말씀에감동하고놀라운은혜를받는다.
죽은글에는그런능력이없다.
왜’살아계신말씀’이라고하는가.
살아계신분이하시는말씀이기때문이다.
왜’살아계신말씀’이라고하는가.
그분이우리중에나타나계심을믿기때문이다.
게바와바울에게나타나셨던그분은지금도우리앞에나타나계신분이다.
그래서우리는우리가그분을’영접’한다고말한다.
어떤경우에도죽으자는영접되지않는다.
예수의십자가사건은인간의기준으로서술하면단지’역사’가된다.
그러나신앙의눈과마음으로읽으면그사건은어제일어났던현실이되고
오늘그리스도와조우하는현장이된다.
‘부활’을물리적인’기적’으로만설명하려는시도는,그마음은이해할수있지만
위험한일이다.
자칫전혀다른것이될수도있기때문이다.
성경이말씀하시는대로바울에게나타나셨던주께서는지금우리들에게도그대로
나타나계신분이다.
그분이우리들의’주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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