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어슬렁[3] – 한국과 대만과의 감정적 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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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심사를 마치고 타오위안 공항청사를 빠져나오자, 후텁지근한 열기가 온 몸을 휘감았다. 게다가 습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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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988년 이후부터 해외여행자율화가 됐다. 그러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만을 여행 1순위로 꼽았다. 아시아권에서 대만은 더없이 우방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92년도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 대만과 단교를 했다. 이후 양국 간 왕래가 뚝 끊겼다. 비행기 노선도 끊겼다. 다시 트이기 시작한 게 1997년도인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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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 단교했을 때 대만인은 한국인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아마도 굉장히 큰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사실 장개석이 한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었고 임시정부 사옥도 장개석의 국민당이 돈을 들여 지어주었다. 그리고 아무리 나라는 패망되어 임시정부로 쫓겨나와 있었어도 김구 선생을 항상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예우하면서 국가 대소사에 늘 초대했었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대만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끼는 또 하나는 태평양전쟁 말기, 1943년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3개국 정상(미국 루즈벨트, 영국 윈스턴처칠, 대만 장개석)이 만나서 전후의 판을 어떻게 짤 것인가를 논의했다. 여기서 중요한 주제 하나가 바로 조선이었다.
조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영국과 미국은 조선을 신탁통치하자 했고(우린 무지 반대했던 것) 장개석은 절대 조선을 신탁통치해선 안되고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미국, 영국 정상은 장개석의 말을 듣고 조선 독립을 굳혔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렇듯 장개석이 조선독립쟁취를 위해 노력해 주었는데, 또 우리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우리의 임시정부를 물심양면 많이 도와줬었는데, 또 우리 한국이 힘들 때(보릿고개) 곡량까지 제공해주고 돈도 빌려 주었는데… 대한민국이 이걸 내팽개치고 중국과 수교를 맺기 위해 대만을 걷어차 버렸으니 어마무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단교가 되고, 왕래도 않고, 긴긴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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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우연히 한국과 대만이 다시 가까워지게 되는 계기가 마련됐다.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말이다. 우리나라 한 TV 드라마가 대만에서 굉장히 히트를 쳤다. 드라마를 만든 PD가 자기 돈 들여 자막까지 넣어서 대만 방송의 아는 PD한테 공짜로 주면서 이거 한번 틀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하여 대만에 방영됐다. 이게 대박이 날 줄은 그 누구도 상상을 못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시간이면 타이뻬이 시내를 오가는 사람이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고도 했다. 대만의 남여노소 눈물샘을 자극한 이 드라마는 바로 최지우와 배용준이 열연한 ‘겨울연가’였다. 이때부터 대만 사람들이 물밀 듯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필히 춘천 남이섬으로 갔다. 그 다음 춘천 명동으로 달려가 닭갈비를 뜯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 대만이 삐치는 계기가 있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태권도 경기에서 한국과 대만 선수가 붙게 됐다. 경기에서 리드하던 대만 선수가 규정에 맞지 않은장비(신발에 패드가 달린 것을 신어야 하는데 안 신었던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실격패를 당하게 된다. 그때 공교롭게도 심판위원이 한국계 외국인이었다. 그런 이유로 한국에 유리하도록 판정에 개입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급기야 태극기를 불태우고 한국산 라면을 바닥에 패대기 치는 등 대만 전역이 반한 감정으로 들끓었다. ‘겨울연가’로 가까워진 분위기는 또 멀어져 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또 일이 발생했다.

대만의 어떤 부부가 우리나라로 여행을 왔다. 임신 7개월째인 부인이 숙소에서 샤워하고 나오다가 미끄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고 수술로 가까스로 칠삭동이를 낳아 인큐베이터에 넣었다. 의료보험혜택이 안되다보니 비용이 엄청 나와 퇴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병원비 못줘 퇴원을 안시켜 인질로 잡혀 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대만 편의점에서 한국 라면이 보이면 발로 짓뭉개버리는 등 혐한 감정이 또 일어났다. 이 소문을 들은 한국의 한 독지가가 거금을 쾌척해 병원비는 물론, 대만까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게 됐다. 누굴까, 꾼들의 신상털기가 시작됐다. 바로 대장금으로 잘 알려진 배우 ‘이영애’였다. 대만에서 또다시 반전이 됐다. “얼굴도 이쁜 게 하는 짓도 이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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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몇해 전 대만에 큰 지진이 있었다. 한국 119소방대원들이 현지로 자원봉사 차 날아갔다. 탐색견이 잔해더미에 깔린 사람 하나를 찾았다. 여진으로 무너질 확률 90%라 누구도 선뜻 내려가질 못했다 .생명의 골든타임이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그때 우리 119 대원 하나가 허리에 로프를 묶고선 잔해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한시간만에 어린 남자아이를 구해 나왔다. 잿빛 먼지를 뒤집어 쓴 아이를 껴안고 나오는 장면을 본 모든 대만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구급대원의 어깨에 태극기가 붙어 있었다는 사실에 또한번 대만인들의 가슴이 뜨거워진 것이다. 그 광경이 대만에서 일주일 넘게 화면에 잡혔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대만이 한국을 또 다시 보게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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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요근래 ‘꽃보다 할배’ 대만 편이 히트를 쳐 한국인들의 대만 여행이 봇물을 이뤘다. 이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대만에서 훈장까지 받았다. 대한민국과 대만은 또다시 붙같이 뜨거워진 것이다. 대만도 우리처럼 냄비 근성, 즉 빨리 끓고 빨리 식어버리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러나 모처럼 좋아진 분위기,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나 요즘 대국답지 못하게 찌질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국을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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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1. 데레사

    2017년 8월 24일 at 9:49 오후

    대만과 우리나라 진정한 우방이었는데 국가간의
    일이란 항상 자국의 이익을 쫓다보니 소원해
    졌지요.
    제가 중학교 졸업반 손녀를 데리고 대만을
    갔는데 이 아이가 장개석 총통을 모르더라고요.
    학교에서 안배웠데요.
    그래서 일장연설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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