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or의 소년택시기사 알라 형제 이야기 (2) – 알라가족탐방기

그날 알라 형제와의 저녁식사는 그들 사회의 숨겨진 많은 얘깃거리를 들을 수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알라의 형도 동생에 대한 배려에 감사의 뜻을 전하며 다음날은 자기가 직장을 쉬는 날이니 직접 저를 안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알라 형제가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운전은 알라를 시키고 알라의 형은 가이드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전날 동생한테 다녀온 일정을 모두 전해 들었는지 오늘은 제가 원하는 일정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곳까지 저를 안내하였습니다. 포장도 안된 사막도로를 좀 무리하다시피 하여 언덕을 올라 왕들의 계곡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을 데려다 주었는데 그 광경이 장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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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xor West bank 왕들의 계곡 입구에서 알라 형제와 함께, 1994년 9월 촬영 >

그런데 왠일입니까 ?

카메라 배터리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떠나며 김포공항에서 새로 구입한 배터리였는데 말입니다. 워낙 뜨거운 태양이 검은 카메라의 몸체를 달구어 배터리가 이겨내지 못하고 뻗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배터리가 온도에 따라 수명이 다르다는것 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태국이나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다른 열대지방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날은 이집트의 가정을 찾아가 보고 싶어서 저녁에 알라의 집을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알라는 아버지와 두 분의 어머니, 누나와 매형, 그리고 알라의 형은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알라의 형한테 부인이 몇명이냐 물으니 하나면 족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생기면 그때 결혼은 또 할것이냐고 물으니 궁금하면 몇년 후에 다시 와보라는 말로 멋지게 대꾸하였습니다. 알라한테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언제 결혼할 것이냐고 하니 모든 것이 형한테 달렸다고 형의 얼굴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틀 동안에 무척 친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알라한테 형이 네 부인보다 자기 둘째부인을 먼저 얻을 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건네자 알라의 형은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알라가 자기 말을 잘 안 들어서 그럴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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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이 큰 부인과 장남인 알라의 형, 왼쪽이 작은 부인과 아들 알라. 아버지는 3년 후 방문했을 때 돌아가셨다. >

알라의 집은 연립주택식으로 한 건물에 여러 세대가 살고 있었습니다. 주방이라야 특별한 시설은 없는 것 같았고 빵을 굽는 큰 화로는 집 밖에 있어서 여러 세대가 같이 이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라의 식구들은 외국인이 자기집에 찾아 온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듯 이미 이웃한테도 얘기를 하여 동네 사람들이 다들 부러운듯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알라의 이웃들이 알라의 식구들을 부러워하도록 좀 띄워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김포공항 토산품점에서 구입한 신랑각시의 천원짜리 열쇠고리를 여자들한테 하나씩 나누어 주고 남자들 한테는 오마샤리프 담배를 한 갑씩 선물로 내놓았습니다. 액수로는 큰 것은 아니지만 외국인으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로는 무척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비쳐졌습니다. 뒤 늦게 나타난 알라의 매형은 저를 구면처럼 얘기를 하는데 나일강을 건널 때에 제가 기아자동차의 봉고를 보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차가 자기가 운전하던 차였다고 하며 한국에 대해 무척 친근감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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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나일강 선착장에서 본 기아자동차의 봉고승합차 >

알라의 형이 한 명씩 가족소개를 하는데 알고 보니 알라와 그의 형은 이복형제였습니다. 즉 아버지는 같지만 아버지의 두 아내가 각각 낳은 형제들이었습니다. 부인들 간의 서열이야 있겠지만 모두 정식으로 결혼을 한 부인으로 우리 사회에서 보는 그런 부자유스런 가족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알라는 자신의 생모 보다는 나이가 많아 몸이 불편한 형의 생모한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큰 어머니가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지를 모른다며 도움이 될 만한 약이 있으면 달라고 하여 제가 비상약으로 가지고 다니는 소염제를 주겠다고 하자 무척 좋아들 하였지만, 내심 걱정도 되었습니다. 보통 노인들의 퇴행성 관절염으로 보이는데 소염제 몇 알 가지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알라의 형수가 차를 끓여 가지고 어린 아들과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 아이는 오줌을 쌌는지 바지를 벗고서 들어왔는데 아직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슬람사회와 유대인사회에서는 모두 남자아이는 할례를 하게되는데 왜 아직 하지 않았냐고 하니 손 바닥을 벌리는데 돈 때문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인도네시아의 롬복섬을 여행할 때에 한 마을에서 단체로 적령기의 남자 아이들을 모아 할례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할례시술을 종교적인 의식으로 하기에 의사가 아닌 사람이 시술하는 경우도 있지만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은 의사를 찾아간다고 하며 제법 그들로서는 비싼 경비가 든다고 하였습니다. 알라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치과의사는 할례시술을 못하느냐고 하기에, 어린 아이는 못하지만 너는 해주겠다고 하여 이 말을 알라의 형이 식구들한테 통역을 해주니 모두들 배꼽을 잡고 알라는 부끄러워 어쩔줄을 몰라했습니다. 사람들 사는 모습이야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어쨋든 색다른 인종의 이색적인 풍습을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알라식구들과 다정한 시간을 지내고 나오는데 알라의 큰어머니는 알라한테 뭐라고 얘기하더니 알라가 큰어머니한테 달려가 진하게 키스를 하는 모습에서 그들 가정의 화목함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알라의 큰어머니는 자신의 다리가 불편한 것을 알라가 걱정해 주는 것이 제가 준 약보다 무척 더 고마움을 느꼈던것 같았습니다.

저는 알라의 형이 농담한대로 알라를 먼저 결혼시키기 전에 자신의 둘째 부인을 얻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3년 후 다시 룩소를 찾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 3년 전 알라의 집에서 기념촬영한 사진을 액자에 보관할 수 있도록 11×14 사이즈로 사진을 준비하여 가져갔습니다.

알라의 집은 대강은 기억이 나지만 혼자 찾아갈 자신이 없어서 호텔 앞의 택시기사들한테 알라의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이사람 집을 아느냐고 물으니 알라의 아버지를 가리키면서 그 분은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택시로 알라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3년 만에 나타난 동양에서 온 손님을 골목에서 만난 주민들이 아는 척을 하며 알라의 집에다 대고 큰 소리를 지르자 알라의 큰어머니가 뛰어 나와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비록 말은 서로 통하지 않았지만 지난 번에 주고 간 소염제가 좋았다는 뜻인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미 알라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택시기사로 부터 들어서 조심스럽게 알라가족의 대형 가족사진을 알라의 큰어머니 앞에 내 놓으니 그 분은 큰 소리로 우시며 사진을 뺨에 비벼 대고 알라의 친모를 부르는 듯 큰 소리를 외쳤습니다. 알라의 친모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데도 수줍음을 탔지만 대형가족사진 속의 남편모습을 보더니 둘이 껴 안고 우는 모습이 저마저 정들었던 친척이 떠난 것 같은 슬픔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마침 낮 시간이라 알라와 그의 형은 없어서 알라의 어머니들과 얘기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자꾸 일어서는 저를 말리고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니 저를 위하여 빵을 구워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알라의 어머니한테 호텔이름이 적힌 성냥갑을 주고 알라의 집을 나와 부지런히 돌아 다니며 지난 번 여행에서 놓쳤던 룩소의 모습을 슬라이드에 담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알라와 그의 형은 깔끔한 모습으로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알라는 돈을 벌어서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며 여전히 형은 자기를 결혼시킬 생각을 안한다며 농담을 하는데 제법 영어실력도 늘었습니다.

 

알라 형제는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 만났던 택시기사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에 알라의 앳된 얼굴에 동정심으로 택시를 이용하였고 자신의 실수는 아니었지만 다른 나쁜 기사의 사기에 희생될뻔도 하였지만 자신의 실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음날 아침 호텔로 찾아와 사과를 하는 성실한 모습도 반드시 못 받은 택시요금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하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니 무척 기특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알라는 저를 공항에 태워다 주기 위해서 친구의 차를 빌려 갖고 호텔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No pay, no pay, this is not a taxi. My Brother !”

저는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This is not taxi fare. I don’t need anymore Egyptian pound, because I’m leaving Egypt now. My Boy !”

그리고 또 3년 후 치과의사 이집트유적답사단을 이끌고 룩소를 방문하였을 때 알라는 공부를 마치고 카이로로 이사갔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알라를 만나지 못한 것이 섭섭하기는 했지만 알라가 카이로로 갔다는 것은 축하를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운전대를 잡은 알라가 아니라 특급호텔을 드나들어도 될 멋진 캘러비아를 입은 성공한 알라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봅니다.

Allah ! ma’a salaama, ( Good Bye Alla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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