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박창수, 김선욱

생생하고 진솔한 얘기가 와닿아 스크랩 했는데
문제되면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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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인터뷰 장소 입구에 안내문이 있었다.
‘인터뷰 진행 중입니다. 오후 1-6시’

약속한 시간이 오후 5시였다.
각 한 시간씩 예정되어 있으니 다섯 번째 인터뷰라는 의미였다.

다섯 시가 되었다.
그런데 인터뷰 장소로 들어갈 수 없었다.
네 시부터 인터뷰를 하고 있는 팀들이 아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섯 시 십오 분이 되어서야 이전 팀들이 나왔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인터뷰를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다.

방에 들어서니 두 대의 동영상 카메라가 김선욱을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인터뷰 장면뿐만 아니라 일거수일투족 카메라로 찍는 듯했다.
동영상 카메라를 피해 멀찍이서 서로 눈인사만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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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둘러보니 원탁의 테이블이 즐비했다.
마치 중식당이 연상될 정도였다.
더구나 피아노도 없었다.
피아노 없이 피아니스트를 찍어야 하는 상황이 직감되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한 시부터 쉼없이 인터뷰를 해왔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공연 프로그램에 대해 취재 기자가 질문을 했다.
모차르트 환상곡 K397, 슈베르트 소나타 D894, 베토벤 디아벨리 변주곡
이라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런데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을 하는 김선욱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피곤했던 기색은 온데 간데 없었다.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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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에 대해 잘 모르는 내게는 외계어처럼 들렸지만,
취재기자와 김선욱은 신명 넘치는 대화를 이었다.
그렇게 음악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한 게 삼 십 분이었다.

솔직히 내게는 그 삼십 분이 가슴을 옥죄는 시간이었다.
없는 피아노, 중식당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사진의 이야기가 될 메시지는 김선욱의 인터뷰 속에서 찾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금까지 독주회 중 가장 마음에 드는 프로그램”이라는 이야기가 고작이었다.
한 시간 내에 인터뷰와 사진촬영을 마쳐야 하는데 메시지도 찾지 못했으니 조바심만 났다.

삼십 분이 지나서야 취재기자 김선욱의 음악 이야기를 막았다.
음악 이야기만 하다가는 인터뷰에 쓸 이야기가 없을 거 같으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김선욱의 답이 청천벽력이었다.
“저는 음악 이야기가 너무 좋은데요 “
그러면서 그가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낭패감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내 모습을 본 게다.
그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넨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 그의 세상살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는 건 똑같아요. 아침에 차를 끓이고 점심 먹기 전까지 연습합니다.
필요하면 세 시, 다섯 시까지 연습하고요. 이후엔 장보러 가고요. 저녁 먹으며 와인도 마십니다. 이런 틀 안에 있는 게 좋습니다.”

그의 말을 이어 취재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십 년 전과 달라진 점은 없나요?”
“사람들이 저더러 더 이상 영재라고 안 합니다. 그렇다고 제 스스로를 볼 때 성숙한 피아니스트도 아닙니다. 딱 중간입니다. 지금부터 삼십 대 후반까지가 연주자로 사는데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음악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평생 동안 이걸 하려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해야 합니다. 솔직히 연주자는 제가 만들어 연주하는 게 아니라 불러줘야 연주를 할 수 있잖아요. 그들이 안 불러 주면 연주기회도 없는 거죠. 그래서 나만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매일 연습하는 겁니다.”

우리는 그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라 칭한다.
그런 그의 입에서 평생 동안 연주를 하기 위해 지금 연습에 연습을 거듭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6년 전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났다.
마침 피아노가 있는 공간이었다.
조명을 준비할 동안 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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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난데없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급기야 미친 듯이 피아노를 쳤다.
마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피아노에 신들린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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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그는 땀 범벅이 되었다.
코끝에 땀방울이 맺혔고, 심지어 머리카락에까지 땀방울이 맺혔다.

그 모습 그대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건 말건 그는 아랑곳없었다.

당시 세간에선 그를 두고 아이큐 150의 천재 피아니스트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동양인 최초로 영국의 리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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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의 사진을 찍으며 내가 감복한 건 그의 천재성이 아니었다.
온몸에 땀 범벅이 되고 머리카락과 코끝에 땀이 맺혀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그의 열정에 감복을 한 게다.

그런 그가 평생 피아노를 치며 살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사진을 찍기 전에 그에게 손을 보여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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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손을 들여다 보며 그가 말했다.
“이젠 손도 늙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6년 전의 손과 달라져 있었다.
왼손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손마디도 굵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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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건반을 쳤을지 짐작이 되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마주한 피아노에서조차 신들린 듯 피아노를 쳤던 그의 손이었다.
하물며 스스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고비라고 했으니 오죽하랴.
평생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우리의 바람이기도 하다.
더 묵직해져 갈 그의 손을 기꺼이 지켜보고 싶다.

[출처: 중앙일보 2016.10.03 00:01]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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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음악계의 이단아 박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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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음악계의 이단아입니다”
2015년 6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박창수씨 만나러 가면서 취재기자가 한 마디로 그를 정의한 말이다.

이단아’라는 정의가 의아했다.
그를 두 번 만난 적 있었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유난히 차분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카메라를 똑바로 보지도 못할 정도로 숫기없는 사람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2009년이었다.
우리나라 하우스콘서트(이하 하콘)의 현황을 짚어보는 기획취재 때문이었다.

하콘이 열리는 광장동의 음악스튜디오를 방문했다.
관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방석도 없는 마루 바닥에 앉았다.
그저 빈 공간에 앉으면 자기 자리였다.
그렇게 모여든 관객이 어느새 빈틈을 메워 빼곡해 졌다.
문 앞에 벗어둔 그들의 신발도 그렇게 빼곡히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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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공연 시작 전엔 출연자들의 공간 바로 앞까지 자리를 메웠다.
빼곡한 관객을 뚫고 어렵사리 공연 자리로 들어선 이들은 이한철 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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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었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없으니 숨소리까지 함께 호흡하는 시간이 펼쳐졌다.
심지어 드럼의 진동이 마룻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온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하는 콘서트, 난생 처음 보는 새로운 형식이었다.
이런 게 하우스콘서트였다.
당시 내겐 처음이었지만 하콘은 2002년 처음 연희동 주택에서 시작하여 벌써 226회에 이르고 있었다.
하콘은 그 자체로 이미 문화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박창수씨와 잠깐 마주했다.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사실 하콘이 취재의 주제였기에 반드시 찍어야 할 사진은 아니었다.
나중에 공연기획자의 사진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찍어 둘 요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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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선 그는 피아노 건반만 만지작거렸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건반만 응시했다.
서로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 어색했던 침묵이 내게 각인된 그의 첫인상이었다.

두 번째 만난 건 2012년이었다.
하우스 콘서트 10년의 소회를 묻는 인터뷰였다.
가수 강산에씨와 함께였다.
강씨는 콘서트에 최초, 최다 출연한 대중 음악가였다.
대중 음악가와 클래식 음악가로서 서로 다를 것만 같은 그들,
하콘을 매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당에 잎이 넓은 알로카시아 오도라가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연잎을 머리에 쓰고 빗속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 잎을 이용하여 사진을 찍자고 그들에게 제안했다.

강산에씨는 단박에 좋다고 했건만 박창수씨는 유난희 쑥스러워했다.
사진을 찍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래도 강산에씨가 박수를치며 좋다고 하니 마지 못해 이파리 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박창수씨의 표정이 문제였다.
쑥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대중 음악가로서 사진 촬영 경험이 많은 강산에씨가 금세 이 상황을 눈치챘다.
강산에 특유의 장난기를 발동했다.
절친을 위한 장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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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난기 앞에 무표정했던 박창수씨가 무너졌다.
얼굴에 순박한 웃음이 번졌다.
그 순박했던 웃음, 두 번째 각인된 그의 인상이었다.

숫기없어 보이고 순박해 보였던 그를 두고 취재기자가 ‘이단아’라고 한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그 이유를 취재기자에게 물었다.
“한때 천재라는 소문이 자자했어요. 초등학교 때 한 달 배운 피아노인데도 서울대 작곡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고 들었어요. 대학 3학년 땐 음대 앞마당에 땅을 파서 불을 피우고 그 불과 함께 춤을 추는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도 했어요. 그 일로 학교에서 제적을 시키느니 마느니 했죠. 기존의 질서를 깨뜨리고자 하는 성향이 다분해요.”

취재기자의 설명에 적잖이 놀랐다.
그를 두 번 만났지만 내가 본 것은 피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그의 입을 통해 속 내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인터뷰에 더 집중했다.

당시 그는 27개국 155도시 432차례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공연이 일년이 아니라 한 달 내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른바 ‘ONE MONTH FESTIVAL’ 이었다.
무려 연주자만 1500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취재 기자가 물었다.
“문화 환경을 흔들어 놓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한 달에 한번 예술의 전당에 가서 무엇을 해야 문화생활을 한다는 착각에 빠져 삽니다. 그들에게 늘 문화가 있는 삶을 만들어 주고 싶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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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바닥에 시선을 두고 조용히 말했지만 날이 서있었다.
날 선 만큼 신랄한 속내를 이었다.
“연주자들에게 ‘돈이냐 무대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무대’라 합니다. 연주자들에게는 무대가 부족합니다. 갓 유학 마치고 온 연주자들은 정말 잘합니다. 그런데 2년만 있으면 실력이 떨어집니다. 공연 기회가 없으니까요. 그리고 청중은 남들이 유명하다고 골라 놓은 연주자의 공연만 보죠. 그러니 감동이 없죠. 나 같은 개인도 이렇게 콘텐츠를 활용해 공연을 많이 만들 수 있다는 걸 문화정책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를 두고 취재 기자가 ‘이단아’라 칭한 이유를 알 듯했다.
하콘을 처음 접한 날, 온몸으로 느끼고 함께 호흡했던 기억이 스쳤다.
2009년 처음 접한 후 여태 내 기억 속에 각인 된 그것이 이 남자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이런 감동을, 문화를 세상에 퍼뜨리고 싶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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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를 향한 세간의 비판이 있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정경화 선생을 초등학교 공연에 세웠다고 공연기획자들의 세찬 원성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동의를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이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손들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나요?”

하콘에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었듯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공연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정경화, 강산에, 김선욱등 수많은 음악가들이 하콘에 서는 이유도 그의 방식에 동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하콘을 지금껏 끌고 온 그는 제대로 된 ‘음악계의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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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하우스콘서트가 있었다.
그날이 바로 하콘 500회였다.
2002년 7월 12일 시작하여 14년 2개월 만이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카메라를 챙길 틈도 없이 그곳으로 달려갔다.
1부 연주자인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순서는 이미 끝나고 2부 장사익 선생의 순서가 시작되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공연을 녹화하는 초등학생 어린이부터 팔짱을 낀 채 서로의 손을 마주치며 박자를 맞추는 노부부까지 180여 명의 관객이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게 중에 출입구 귀퉁이에서 공연을 지켜보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바로 박창수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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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으로나마 한참 동안 그의 모습을 찍었다.
얼마나 공연에 집중을 했는지 그는 사진 찍는 것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서로 눈이 마주쳤다.
빙긋이 웃는 것으로 서로 인사를 대신했다.

며칠 지나 그에게 전화를 했다.
걱정스러운 소식을 접했기에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파산위기라는 보도를 봤는데 어찌 된 영문입니까?”
“사실 힘들기는 합니다. 사람들은 제가 여유가 있어서 이 일을 해오고 있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사실은 사재를 털어가며 해왔는데 이젠 그것도 한계치에 왔습니다. 하우스콘서트가 이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니 문화단체 지원과 스폰서도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14년 전이나 지금이나 입장료가 2만원 이던데요. 입장료라도 올려 보시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올려도 큰 도움이 안 됩니다. 그리고 저희는 수익이 목적이 아니잖아요. 우리나라 문화의식을 올리는 게 목적이었고 단 1%라도 기초문화를 올려놓고 싶어 여기까지 온 겁니다. 버틸 수 있으니 지금껏 버텨 온 겁니다.”

“그나저나 500회 하우스콘서트의 소회를 들려주십시오.”
“여러 가지 감정이 일었습니다.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아쉬운 감정이 다 들더라구요.
참! 며칠 전에 저희 매니저들이 팟캐스트를 하며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에 식겁했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는데 반환점이라뇨. 앞으로 14년을 또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암담해지더라구요,”
그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걱정스러움이 배어있었다.

박창수씨의 뒷담화가 게재되는 오늘, 마침 501회 하우스콘서트가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다.
21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빅 주리스(Vic Juris )가 501회 하콘의 연주가이다.
그는 빅 주리스를 소개하며 걱정을 드러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가인데 한국에선 잘 알려지지 않아 걱정입니다. 관객이 얼마나 찾아 줄지도 모르겠구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환점이라는 말에 식겁했다는 그였다..
그런데 그는 걱정과 함께 이미 그 반환점의 첫 발을 떼고 있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9.26 [권혁재 사진전문기자의 뒷담화] 음악계의 이단아 박창수

4 Comments

  1. 데레사

    06/10/2016 at 09:33

    오늘도 공부 많이 했습니다.
    솔직히 참나무님 아니면 나는 이런 뉴스에는 접할 기회조차
    없거든요.

    고마워요.

    • 참나무.

      06/10/2016 at 09:44

      진솔한 얘기는 늘 감동이지요
      이 기자 앵글이 전부터 맘에 와닿아서
      좀 길지만 드르륵 했어요
      늘 고맙습니다아~~^^*
      오늘도 최고로 즐거운 하루되시길바랍니다

  2. 홍도토리

    06/10/2016 at 14:13

    김선욱과 박창수선생님 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기사 옮겨주시니 근황도, 그분들의 속내도 조금이나마 알게 되네요.
    가까이 율하우스라도 열심히 다녀볼 걸..
    많이 고맙고 많이 아쉽습니다.

    • 참나무.

      06/10/2016 at 14:59

      그러게요 쉽게 다닐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녀야하는데
      저도 그러질 못했답니다
      수준높은 연주자들 참여도가 점점 더 많아지던데…;;
      저도 많이 아쉽답니다.
      그래서 홍샘과 홍샘 언니,
      또 어머님과 함께 한 시간이 더 그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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