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藝人 李 나경

집앞까지나와있었다.

가회동은예전에살아봤던동네라대충짐작으로그집을

찾아갈수있으리라생각했는데쉽지않았다.

가회동북촌마을,골목깊숙한곳에’아라가야’는자리잡고있었다.

가회박물관앞에서다시전화를하고어느골목인가찾고있는데,

박물관바로맞은편골목에낮익은사람이서있다.

나경(那瓊.57)씨였다.

7,8년전,인사동에서여럿이본후처음이지만서로안면은있다.

한번만나얘기를좀듣고싶다고했을때,나경씨는조건을내걸었다.

매일하는그렇고그런얘기로들으려면하기싫다는것.

‘매일하는그렇고그런얘기’란그녀가안고있는장애에대한것이다.

우리나라색깔의염료로우리나라옷을제일잘만드는사람,

그러나그에따라다니는말이있다.장애를갖고있는사람이라는것.

사람의캐릭터는그사람을가장잘특징짓는것에서드러나게마련이다.

용모도될수있고,재능도될수있다.덧붙인다면신체적인장애도포함된다.

유명한사람이장애인일경우그사람의유명은장애로더빛이날수도있다.

그러나나경씨는그게싫다는것이다.

"언젠가까지내머리속에는장애를느끼지않았다.

그러나어느날부터나의뇌속에서그장애가망각되면서세상을받아들였고씩씩하게됐다."

그런데왜세상은자신을꼭그런식으로묶어보느냐는것이다.

그녀를부르는명칭에혼란이없잖아있다.

언론에서는나경씨를’한복장인(匠人)’이라부른다.

틀린호칭은아니다.한복을손수짓는일을하고있고,

그일이세상사람들로부터크게인정을받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나는그녀를’한복예인(藝人)’이라고부르고싶다.

匠人이란칭호를폄하하고자하는게아니다.

그러나아무래도匠人보다는藝人이란칭호가그녀에게걸맞을상싶다.

그녀는미술대학에서서양화를전공했다.서양화가로서의명성도물론높았다.

그녀는그러나유화를그리면서추구하고자하는색(色)을알게된다.

유화의두터운질감의색보다는바다를닮은투명하고맑은빛.

결국은그빛깔의색을찾아나선다.

그렇게해서하게된작업이우리나라고유의빛깔을살리는천연염색이다.

고서를헤집으며전통미학등을열심히공부하면서

유병훈,정관채,한광석같은당대최고의염색장인들을찾아다녔다.

쑥과맨드라미,홍화,치자오미자등염료재료를짜고,

고열로구워낸조갯가루에섞어발효를시킨전통천연염색방식을철저하게구현했다.

그열정과노력을인정받아그녀는2000년’천연염색기술기술혁신가’상을받는다.

천연염색의자연빛깔을입혀질대상이무엇이겠는가.

그래서그녀는그염료로채색할우리옷을만들게된것이다.

‘아라가야’홈페이지대문에도나경씨의이런뜻이담긴’천연염색(NaturalDyeing)’이란말을내걸고있다.

이런일련의과정을무시하고그냥’한복장인’으로부르기가그래서좀아쉽다는말이다.

나경씨는그녀의작업장을왜’아라가야’로내걸었을까.

1978년부터屋號로삼았으니삼십년도넘었다.

아라가야는그녀가추구하는색과옷의원터전이요,

지금의경상남도인옛해양왕국이던여섯가야중의한나라이다.

그옛나라,아라가야토기문화의따뜻한색과철기문화의강인한선으로빚고있는게

바로천연염료로만들고있는나경씨의우리옷이다.

아라가야엔그녀가태어나서자란고향마산을아우르는의미도있다.

아랫채에작업실,윗채에나경씨의방이있다.

그방에앉았다.

둘이앉기가그리수월치않은좁은공간이다.

책상옆에옛날것으로보이는재봉틀하나가놓여있는것으로보아

소소한작업은그방에서도이뤄지는모양이다.

책상엔노트북컴퓨터,그리고라디오가있다.

라디오에선음악이흘러나온다.클래식이다.

라디오음악듣기를좋아한다고했다.

지금은없어진어느방송의’세상의모든음악’을즐겨들었다고한다.

그녀가쓴글중에이런구절이있다.

"생명이다해서자연스럽게돌아갈때는미련하게쿨하게가야지요.

하지만오늘최선을다해살다가게되면,눈앞에보이는산머리초승달도밤하늘별들도

비온뒤땅에비친나무그림자도가슴이시리도록슬프게흘러나오는저음악이아쉽긴할것같습니다.

죽고난뒤에는…"

그래서물은게음악인데,그녀는당시라디오에서흘러나오는그방송의그것을얘기하고있는것이다.

그러다한마디더붙인다.

"좋은음악들,죽으면못듣겠구나하는생각많이한다."

한쪽벽에흑백사진한장이붙어있다.

동생가족들과함께찍은사진이다.부모님은없다.

쓸쓸하게웃는다.없을수밖에.

아버지돌아가신지는삼십년도더됐다.어머니는작년10월에별세했다.

흑백사진잘찍는유명사진작가가찍어준사진인데,

흑백이라그런지사진을볼때마다부모님생각이난다고했다.

나는팔하나로옷을만든다
  • 박종인기자seno@chosun.com기자의다른기사보기
  • 입력:2009.03.0709:36/수정:2009.03.0713:56

    설날을사흘앞둔1967년2월6일월요일.중학교입학을한달앞둔계집아이이나경은저녁을후딱해치우고마을방앗간으로달려갔다.인절미를찍어먹겠다는일념으로한손에는떡살을,한손에는일하는언니손붙들고.기계돌아가는걸바라보며다가서는순간,오른쪽소매가쇠바퀴와벨트사이로들어가버렸다.

    피투성이가된계집아이를사람들이업고서가까운병원으로갔다.병원의사는아이얼굴을보는순간통곡했다.자기딸이다.아버지는딸의팔을직접잘라내고또울었다.사람들이가져온떡살은수술잘해줘서고맙다고환자가족이준선물이었다.이후10년넘도록집에서는아무도떡먹고싶다는말을꺼내지못했다.42년세월이흐른지금,팔하나없는마산아이이나경(李那瓊,55)은장안에서둘째가라면서러워할정도의한복(韓服)명장(名匠)이되었다.왼팔하나로.

    이나경을만난곳은서울종로구재동헌법재판소옆골목에숨어있는작업실‘아라가야’였다.아라가야는고대여섯가야왕국가운데그녀가살았던마산지역에근거를둔왕국이름이다.탤런트고두심,소설가박완서,이경자,가야금연주가문재숙등대한민국문화예술인들이단골로찾는고급한복집이기도하다.

    이나경은자기가만든옷을입고있었다.회색빛저고리에검은색치마.오른쪽소매끝은치마에달아놓은주머니속에들어가있다.싱긋웃으며“내가만든옷에는꼭있는주머니”라는말을듣고서야이장인이장애가있다는사실을깨달았다.사춘기때팔잃은소녀의50년세월이담담하게그녀입에서흘러나온다.

    자기작품들에에워싸인이나경이활짝웃는다.염료부터마감까지모두그녀의손을거쳐탄생한작품들이다.왼팔하나로창조한미학이다.

    그림잘그리는아버지,고미술품모으는게취미인엄마를흉내내며자랐다.엄마는도자기며반닫이며자기수집품을막무가내로들었다놨다하는딸을그냥내버려뒀다.할머니한테싱가미싱이한대있었는데,옆에붙어서함께재봉질을하기도했다.외과의사인아버지수술도구로가죽소파를꿰매기도했다.초등학교1학년때밤바다를그리고싶어서한밤중에파도치는바다로달려가기도했다.그소소한경험들이고스란히그녀인생속에녹아들었다.

    상처가아물고,남들보다한달늦게중학교에입학했다.어느날,미술부선배언니가불쑥와서는이랬다.“나경아,내일사생대회있는데,거기같이나가자.”방과후미술반에서그림한장연습하고다음날대회에갔다.대상을먹었다.“내가안돼보이니까심사위원들이격려차원에서준상”이라고했다.이나경은미래를결정했다.나는이제화가가된다.

    이나경이바늘땀을딴다.왼손하나로,무거운문진에옷감을고정시키고.“남보기에는어설퍼도옷은잘만든다”고했다.

    잘한다고칭찬받곤했던공부를놓았다.붓을잡았다.왼손으로스케치를하고물감을짜고붓을놀렸다.“어렵지않았다”고했다.“장애에대한의식보다는사물에대한호기심이더컸다.그래서거의의식하지못하고살았다.”

    수업시간이면창밖을보는일이잦아졌다.“교실창밖으로바다가보였다.빨간세무서건물,그옆에새하얀시청건물이보였다.그앞에는해송(海松)이서있었고.봄이되면배꽃과무꽃이노랗게넘실거렸다.너무너무이뻐서얼른나가서그림을그리고싶었다.”한눈파는나경을본담임선생이교단으로뭇매를가하곤상담실로끌고갔다.그리고둘이서손을잡고서엉엉울었다.“별탈없이공부는잘하던아이가옆길로어긋났다고생각하신것이다.나도한참울었다.”

    소용없었다.나경은마치“원래부터팔이하나였던것처럼”학교와집,바다를헤집고다니며그림을그렸다.두팔이필요한작업이나오면무릎을썼다.지금도무릎에는남과다른굳은살이박여있다.“힘이들고아팠지만,거의의식하지못했다.불편했지만,작심하고하니까일이되더라.오히려사회에나와사람들과부딪치다보니,의식을못한다는것자체가문제가되곤했다.”

    그때별명은‘하고집이’.하고싶은건반드시하고마는징그러운애라며고모가붙인이름이다.집에서는하고집이를미대에보내기로결정했다.고32학기.개인레슨을받기위해서울로올라왔다.서울대에원서를내러갔던가족과레슨선생이돌아왔다.“너,팔이없어서수학능력이없대.원서안받겠대.”사고후처음으로“제대로한번열받았다”고했다.

    그런데이화여대에서그녀를받아줬다.안면화상을입은학생하나,그리고척추가부러져휠체어를타는학생하나가함께이화여대에합격했다고했다.1973년이었다.이나경은서양화과에들어갔지만주류인유화는물론판화에염색까지건드리며예술을배웠다.방학이면홀트아동복지회에가서고아들에게미술을가르쳤다.“외팔이괴짜있다”는소문이캠퍼스에좍퍼졌다.

    대학원에다니던1978년,신촌역공동화장실앞에서극작가겸연출가오태석과마주쳤다.당시그는이대에서연극반을지도하고있었다.그가대뜸말했다.“너이나경이지?나따라와.이번에옷해.”세종문화회관개관기념공연에쓸의상을만들라는것이다.

    공연작은단종애사를다룬‘胎(태)’.그녀는고민끝에종이로의상100벌을만들었다.한지에빳빳한천을배접해붙여옷을만드니,배우는큰동작으로움직여야했고움직일때마다효과음이만점이었다.어린나이에장안의화제가된그녀에게무대의상의뢰가쏟아졌다.신나게일했는데,“어느날‘이러다그림못그리겠다’고겁이나더라”고했다.그래서10년정도실과바늘을놓고그림만그렸다.

    그녀그림을보면,그섬찟함에겁부터난다.움츠러든몸을배경에숨기는희끄무레한나신(裸身),흘러내리는핏빛액체….본인도“곡(哭)소리가느껴지는그림들”이라고했다.기억도희미한사고의슬픈추억이아니었을까.그런데이따금앞에보이는바늘과가위를쥐면기분이좋아지곤했다.그러다퍼뜩,“깨달았다”고했다.“유화의두터운질감보다바다를닮은투명하고맑은빛이내가원하는것이었음을.옷이라는게결국은캔바스아닌가.벽에걸면그림이고,무대의상은움직이는설치미술이다.물을들여조형을만드는.”

    힘들기로는그림과비교가되지않는날이시작됐다.고서를헤집으며전통미학을연구했다.고구려부터조선을관통하는‘핵심옷선’을찾아갔다.책을정리하고나면이제는옷을지을옷감을구할차례.유병훈,정관채,한광석같은당대최고의염색장인들을찾아갔다.택시를탔다가“물잘들이는할머니안다”는기사말에바로방향을돌려만나러가기도했다.책을모으고,장인들한테직접배우며염색을익혀갔다.

    1990년대초,구파발지나경기도고양삼송리에1200평짜리밭을사서씨를뿌렸다.쪽과맨드라미,홍화,치자,오미자.봄에씨를심고여름에베고잿물에담아염료재료를짜고,고열로구워낸조갯가루에섞어발효를시켜야완성된염료가된다.농가월령가를고스란히따라해야나오는부지런한농부의삶이다.그걸팔없는여인이겁도없이해냈다.잠?밤새거나한두시간잤다고했다.결국2000년,나라에서는그녀에게천연염색기술기술혁신가로국무총리상을줬다.

    염색을익혔으니이제옷을만들차례.말이되지않는도전이었다.
    한손으로바느질을해본적이있다면알것이다.왼손으로오른손잡이용가위를써본적이있다면더더군다나.이나경은,오른발발가락에바늘을끼우고,왼손으로실을꿰어,온몸으로물들이고왼손으로가위질한천을,오른쪽무릎으로고정시키고바늘땀을땄다.“손은수많은도구중의하나다.입술도무릎도발가락도훌륭한도구지.보는사람에겐어설프고불안하지만,어찌됐건나는옷본을재단하고바느질을해서옷을만들수있었다.”지금은무릎대신에서예가들이화선지고정할때쓰는무거운문진을쓴다.

    세상이한복장이이나경에열광했다.“곡소리나는그림만그리던나경이가이렇게맑고고운옷을만들다니!”또다시무대의상의뢰가쏟아졌다.지금까지그녀가만든무대작품은100여편.이가운데에는2005년부산APEC기념공연‘태평양건너기’의상도있다.내친김에1995년서울인사동에‘아라가야’라는한복짓는집을열었다.그때그녀를찾아온사람들이고두심,박완서,이경자등등이었다.이나경은손님들에게“100년후에박물관에전시될옷이니귀하게입으시라”고신신당부하며옷을건넸다.

    세월이다시흘러2009년이되었다.이나경은명사가되었다.사지멀쩡한사람도하기어려운일을그녀는해냈다.“비장애인이누리는일상적인삶”을뛰어넘어대성공을거둔장인이되었다.모교인이대에강의도나가니뒤를이을제자들도생겨나고있다.

    지난달초이나경은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사라예보에서열리는‘2009환경아트페어’에참가했다.“천연원단으로신비한의상을만드는”복식디자이너자격이다.조직위원장에게미색물을들인도포를입히고,만다라를본뜬대형조각보를선보였다.그리고세계작가들앞에서한국전통염색기법강연도했다.

    그녀의옷감창고에서촬영을했다.팔하나빼고모든걸가진여자가눈앞에서웃는다.사방에옷감과한복과갓물들인천이가득하다.명예도얻었고,돈까지벌었으니원이없겠다고했더니대답이이랬다.“내가좋아서하는거지,돈은못벌었다.한벌만들어100만원에팔면뭐하나,재료비랑작업실식구들공임이더나가는데.”

    (조선일보2009년3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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