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州(성주) 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 태실)

소재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 8
국가지정 사적 444호

DSC07511[태실로 올라가는 솔숲 계단길]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 胎峰(태봉) 정상에 있다.

嫡庶(적서)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조성시기는 조선 세종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다.

DSC07510a[안내판 글 내용]

ptsa2[안내도와 안내판]

DSC07513a[가봉비문 안내판 글 내용]

DSC07514a[태실구조도]

DSC07515a[태실 분포도]

원래는 세종20년(1438~1442) 세워진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세종의 적서 18왕자와 단종 등 20여 기의 태실이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축출한 뒤 이를 반대한 수양의 동복동생 금성대군,
배다른 한남군, 영풍군, 그사건에 무고로 연좌된 화의군 및 계유정란에 죽은
동복동생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등은 세조3년(1457) 산아래로 파던져 졌으나,
1975년 흩어진 기단석을 찾아 복원했다.

화강암으로 깎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儀軌(의궤)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胎壺(태호)를 넣었다.

태호 속에는 胎缸(태항)과 胎主(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誌石(지석)을 넣고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전열에 11기, 후열에 8기가 서 있다.

DSC07522[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태실의 옥개 높이는 25㎝, 지름 1.6m, 둘레 3.2m이며
신석은 높이 60㎝, 지름 1.2m, 둘레 2.4m이다.

기단은 높이 45㎝, 지름 2.2m, 둘레 8.8m이고
태비의 높이는 90㎝, 너비는 35㎝이다.

이 태실에서 출토된 태호로 분청인화문 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 뚜껑 1벌,
銘記(명기)가 있는 지석 2점이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밖의 것은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갔다한다.

DSC07516[加封碑(가봉비)]

세조가 왕위에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윤성은 세조의
胎(태)가 이곳에 묻혀 있음을 알리고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洪允成(홍윤성)이 글을 지어 加封碑(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웠으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碑文(비문)의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단종을 흠모하는 충신이 세조와 홍윤성의 이름을 지웠다는 설이 있으며…
세조의 잘못을 미워한 백성들이 비석에 오물을 퍼붓고 돌로 찍고 갈아서
닳아 글자는 거의 알아볼 수 없다고도 한다.

DSC07520[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2]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슴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있지 않다.

대석 중앙에 고인 물은 하늘과 구름을 품고 바람에 여유자적
이러나 저러나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도 하지만,
여기서도 역사의 비극이…마음을 아프게 한다.

DSC07518[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3]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中始祖(중시조) 李長庚(이장경)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왕자들의 胎(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DSC07523[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4]

사열하듯 늘어선 세종대왕자태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이장경의 葬地(장지)에 노승이 나타나

“태봉 위의 나무를 벤 뒤 12개의 관을 깊이 묻어 묘를 쓰면 더 없는
길지이나, 묘각을 지으면 뒷날 소유가 바뀌지 않을까 두렵다”
하였다.

마침 그 때 이장경의 묘지를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산 위의
나무를 베었는데, 거기서 나온 큰 벌에 쏘여 노승은 죽고 말았다.

그 후 후손들이 11개의 관으로 묘를 더 쓰고 묘각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결국 길지의 주인이
바뀌었으니 마침내 노승의 예언은 적중하였던 것이다.

DSC07517[世宗大王子胎室(세종대왕자태실) 5]

태실의 보존에도 권력의 영향력이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權不十年(권불십년)’이라고 했거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욕망은
죽은이의 태실까지도 곱게 놔둘 수 없었는가보다.

DSC07524[加封碑(가봉비) 전경]

문종실록에 보면,

風水學(풍수학)에서 말하기를 胎藏經(태장경)에 하늘이
萬物(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써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胎(태)로 인하여 長成(장성)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賢愚(현우)와 盛衰(성쇠)가
모두 胎(태)에 매여 있으니 태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되어있다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면당을 가리고 때를 맞춰 태를 묻어야
복을 받고 후손에게 복이 온다는 풍수적 믿음을 굳게 지녔던 것이며,
어머니 자궁 속 태아의 생명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인 것인것 같다.

DSC07519[단종의 태실]

조선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아들 8대군
10군의 태실18기(원래는 29기였다고함)와 세손(단종)의
태실1기가 안장되어 있었다.

단종의 태실은 이곳에서도 한 귀퉁이에
세워져 그 서러웠던 세월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아들이 아닌 손주였기에 한쪽에 세워졌지나 않았는지…

DSC07512[내려오며 담아 본 태실앞쪽 마을 전경]

태를 이같이 소중하게 묻는 것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세상에서
생명이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켜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한가지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좋은자리가 마음에 드는 자리가 탐이 난다고해서…
기존의 있던 무덤자리를 다른곳으로 이장하라고 하고 묻었다는 것에대한…
예전이나 현제나 권력과 부의 실력행사에 마음이 찹착할 뿐이였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12월 2일 at 8:28 오전

    그 멀리까지 태실을 마련한걸 보면 명당은
    명당인가 봐요.
    성주쪽은 가본적이 없어요.
    지나치기만 했지.

    오늘도 공부 많이 했습니다.

    • 초아

      2016년 12월 2일 at 10:32 오후

      좋다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나봅니다.
      여러곳을 다니다보면, 명당에 얽힌 얘기들이 많아요.
      재밋기도하고 때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생각도 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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