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開南(김개남) 將軍(장군) 墓(묘)

소재지 :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20190329_134913[김개남 장군 묘소 전경]

116여년전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3거두 지도자 중
한분이셨던 전라북도 태인 출생 김개남장군의 묘소에들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20190329_134856[안내판 글 내용]

20190329_134856-2[안내판 영문 글 내용]

20190329_134444[김개남장군 묘 옆쪽 묘]

안내판을 담는 사이에 남편이 묘소에 올라 폐철을 보고 있기에
난 옆쪽의 후손묘인지 아담한 묘소가 있기에 그곳부터 들려 묘와
묘주변의 풍경을 담았다.

20190329_134547[묘비]

居士道康金公再鍊之墓(거사도강김공재련지묘)라 묘비에 새겨져 있다.
居士(거사) : 숨어살면서 벼슬을 하지 않는 선비.

page-2[묘앞 석물]

문인석도 무인석도 아닌 석물이 세워져 있었다.
석물의 모양이 신기해서 담아왔습니다.

page-3[좌우 望柱石(망주석)]

望柱石(망주석) 역시 다른곳과 달리 특이해서 담아왔습니다.

page[망주석 아랫쪽 4면의 조각]

20190329_134955[제비꽃]

20190329_135031[민들레]

20190329_135104[민들레꽃과 민들레씨방]

느지막하게 온 봄은 겨우 기지개를 켜는데,
이르게 온 봄은 씨앗으로 부풀어올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0190329_134846[우측에서 담은 김개남 장군 묘소 전경]

아직도… 뭔가 연구(?)하고 있나봅니다. ㅎ
들꽃을 담으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남편이 자리를 비키자…
곧장 김개남 장군의 묘소를 담기 시작하였지요.

20190329_134414[안내판과 김개남 장군 묘소 전경]

동학농민운동. 녹두장군 하면, 우리는
교과서에 배운대로 전봉준을 먼저 떠올린다.

동학농민운동의 실세이자, 봉기의 주역인 金開南(김개남).
고부군수 조병갑에 의해, 의제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의 억울함 죽음이
봉기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봉기의 명분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낮춰
전봉준을 앞세우신 분이라 합니다.

20190329_135216[金開南(김개남) 장군 묘 전경]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전봉준과 달리 강경파였다.
휘하의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청주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싸워 패전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후일을 도모하다 임병찬의 밀고로 관군에게 붙잡혔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김개남을 한양으로 압송하지 않고 1895년 1월 8일
전주 장대에서 목을 베었다.

20190329_135253[金開南(김개남) 장군 묘]

잘린 목은 한양으로 이송되어 서소문 밖에
효수되었다가 전주로 보내져 다시 효수되었다.
이곳 동곡리에 있는 金開南(김개남) 장군의 묘는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이라 합니다.

20190329_134610[開南丈(개남장) 시비 앞면]

開南丈(개남장)

새야새야 파랑새야
綠豆밭에 앉지마라
綠豆꽃이 떨어지면
開南丈이 울고간다.

南녘부터 改革하려
開南으로 改名하고
外勢侵奪 막으려고
東學革命 主導했다

東學軍의 連戰連勝
開南丈의 作戰이고
모든功은 同志에게
모든禍는 開南에게

數萬軍事 어데두고
짚둥우리 웬말이냐
草綠바위 斬首된몸
死後에도 抑鬱하네

愛國愛族 깊은마음
어느누가 알아줄까
앞으로는 千年萬年
開南丈을 알아주세

德山 金白基 詩
雲谷 鄭判基 書

20190329_134804[開南丈(개남장) 시비 뒷면]

개남장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개남장이 울고간다

남녘부터 개혁하려
개남으로 개명하고
외세침탈 막으려고
동학혁명 주도했다

동학군의 연전연승
개남장의 작전이고
모든공은 동지에게
모든화는 개남에게

수만군사 어데두고
짚둥우리 웬말이냐
초록바위 참수된몸
사후에도 억울하네

애국애족 깊은마음
어느누가 알아줄까
앞으로는 천년만년
개남장을 추모하세

덕산 김백기 시
운곡 정판기 서

20190329_134649[金開南(김개남) 장군 묘비]

20190329_135445[金開南(김개남) 장군 묘비 뒷면]

20190329_135450[묘비 뒷면 새겨진 글]

page-1[金開南(김개남) 장군 묘앞 좌우 무인석]

20190329_134647[金開南(김개남) 장군 묘]

金開南(김개남, 1853~95) 은 불꽃같은 삶을 산 혁명의 지도자요,
열혈남아로서 숱한 이야기를 남겼다. 그런 탓인지 박경리의 ‘토지’에도
농민군 지도자의 모델로 등장했다 합니다.

각종 집회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으며 그럴 적마다 강경파로 부상했다.
이런 탓으로 1894년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
그는 대장 전봉준 다음의 총관령이 되었다.

20190329_134719[金開南(김개남) 장군 묘 뒤에서 담은 안산 전경]

그의 근거지인 태인에서 농민군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고 그중에는
도강 김씨들이 많았는데 이것이 모두 김개남 때문이라는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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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이곳에서도 노오란 산수유꽃을 피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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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뻗어 남먼저 봄맞이 하려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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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옆 산수유는 해마다 철따라 피지만,
한번 가신 개남 장군은 다시 올줄 모르네요.

우리네 인생 허무한것 같아도…
이렇게 장군을 기리며 생각하는 후손들이 있는 한
한 많았던 삶은 쌓인 한 만큼 빛나는 충정으로 우리의 가슴에 새겨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9년 4월 23일 at 9:20 오전

    김개남, 소설속에도 많이 등장하지요.
    특히 용맹하셨나 봅니다.
    먼곳 까지 잘 다니시니 건강회복이 순조로우신것 같아
    좋습니다.

    • 초아

      2019년 4월 23일 at 8:56 오후

      예,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전봉준장군보다는 덜 알려져서 아는 분들이 적어요.
      아직은 조심스러운 걸음입니다.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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