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양인의 생각의 차이

Brain

나는 가끔 미국에서 나서 자란 우리 아이들과 의견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서로 생각하는 게 달라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오늘도 어른이 된 아이들과 외식을 하다가 한바탕 웃은 일이 있다.
나는 오른 손바닥을 가슴에 대면서 “친구는 마음으로 사귀어야지 머리로 사귀어서는
안 된다“ 했다. 진심이 통하는 친구여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는다.
마음은 가슴에 있는 게 아니라 뇌에 있다고 하면서 이마를 짚는다.
마음이 어째서 뇌에 있는가? 마음은 당연히 가슴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물론 마음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곧 생각이다.
생각이야 머리가 하는 거지만 마음 씀씀이라든가, 마음가짐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옳지 머리를 굴려 가며 행동하는 게 옳겠는가?
마음은 심정을 의미하고 심정은 정으로 통하는 거다.
미국인들의 정머리 없는 행동은 마음은 쓰지 않고 머리만 굴려 대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껏 살아야 한다.” 했더니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어댄다.
양심(Conscience)은 가슴에 있는 게 아니라 뇌에 있다면서 역시 이마를 짚는다.
양심이란 의미는 ‘어질 良자, 마음 心자’ 어진 마음이란 뜻인데 양심이 어떻게 뇌에서
나온다는 말인가.
과학사회라는 게 양심은 말라가고 머리로만 모든 걸 생각하다 보니 계속해서 법규만
만들어가고 그와 비례해서 범죄만 늘어나는 것 같아 안타 갚다.
뇌가 작용하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사는 미국인들보다 마음 따로, 양심 따로 그리고
생각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는 느끼는 게 더 많아 더 행복한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슴과 뇌, 두 군데로 생각할 수 있는 나는 역시 행복하게 지내라고 선택받은 국민이
분명하다.

여기서 동서양의 의학을 살펴보자.
한의학에서는 심장이 정신 즉 뇌의 역할을 했다.
언뜻 듣기에 생소하지만, 자고로 한의학에서는 뇌라는 기능에 대해서 잘 몰랐다.
뇌는 그냥 눈물이나 콧물을 생산하는 기능 정도로 인식했다.
뇌의 기능은 심장이 한다고 보았다.
그 대신 서양의학에 없는 경락이 있다.
인간의 생각과 기능을 통합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경락이라고 보았다.
경락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람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는 있다.
우리는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바람을 감지한다. 경락도 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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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에서는 심장을 무형의 심장과 유형의 심장으로 나눴다.
무형의 심장이 고차원적인 정신세계로서 뇌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무형의 심장 곧 마음이 생각한다고 보았다.
유형의 심장은 연꽃같이 생겼으며 중앙에 구멍이 7개 있는데 지식이 많은 사람은
구멍이 7개에 털이 3개, 보통 사람은 구멍 5개에 털이 2개, 아둔한 사람은 구멍이
3개에 털이 1개로 보았다.
이런 황당한 이론이 어디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으나 심장이 곧 뇌라고 보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혼동이라고 보면 이해가 된다.
도교나 유교에서의 정신세계는 좀 다르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발전시킨 성리학에서 보았던 심장 구조이다.
동양에서는 유교 사상 때문에 해부학이 발달할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성리학에서 마음의 구조를 보면 중앙에 영(靈)이 있는데 영은 순수하고 귀한 것이어서
변하지 않는 존귀한 존재이다. 영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것이 혼(魂:넋)이다.
혼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 있다. 영과 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백(魄)이다.
백은 혼백 하면 가장 원초적인 정신 능력으로서 예를 들면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는 식으로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기본적인 정신 능력을 말한다.
사망하면 정신이 분리되어 영과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음양(陰陽) 논리에 의해서 백은 음에 해당하고 영혼은 양에 해당한다.
영혼은 없고 백(魄)만 남아 있는 현상을 좀비라고 부른다. 생각 없이 행동하는 걸
일컫는다.
동양에서는 백(魄)만 가지고 있는 것을 강시(僵屍: 중국의 흡혈귀 겸 존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해부학을 통해서 뇌의 기능이 일찍부터 밝혀졌다.
그리스의 플라톤은 뇌로 생각한다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이 인지한다고 보았다.
영혼이라는 말은 희랍어의 “프쉬케”에서 온 말이다. 영어로는 psyche이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또한 생각하는 존재이다.
아구스트는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해 주는 사다리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기억의 심오함과 신의 목소리를 발견한다고 보았다.
서구의 중세는 기독교 사회였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관한다고 믿고 있었다.
헬러니 즘은 눈으로 보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헤브라이즘은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러면서 신은 볼 수 없는 존재다. 신을 보는 순간 죽는다.
오직 목소리로 들을 수만 있다고 보았다.

17세기 신에 얽매여 있던 인간을 데카르트의 주체 철학이 해방시켜 주었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인간은 몸과 마음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 한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데카르트 이전의 중세 사람들은 미처 스스로 생각한다고 깨닫지 못했다.
신이 내게 이러이러한 생각을 하도록 해 준다고 믿었다.
이것을 데카르트가 인간의 의식을 깨우치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생각 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말이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이유이다.
영혼은 몸으로서 지각하기 때문에 이미 몸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몸으로서 지각된 세계는 체험으로서 감지된 대상이다.
19세기 불란서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몸의 철학에서 영혼과 몸은 분리된 게 아니라
영혼은 항상 “육화(embodied)되어있다고 보았다.
세상과 영혼이 겹치는 부분이 몸이라고 했다.

다시 마음과 양심, 정신으로 돌아가서 현대는 문화 중심주의 즉 사회중심주의로
발전해 왔다. 그러므로 서양 중심주의 교육 속에서 살아왔다.
동양 중심주의 DNA가 몸속에 잠재해 있으면서 서양 중심주의 교육을 받아온
우리 세대는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알고 보면 동양철학이 더 심오한 면이 많이 있고 한의학이 더 조리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서양의학에서는 병균이 침범했기 때문에 발병한다고 보지만, 한의학에서는
질병 때문에 균형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에 질병이
찾아오는 것으로 본다.
오늘날 암이나 성인병은 균형이 무너져서 발생한 질병이 아니더냐?

그리고 우리 조상의 기본 철학인 성리학에서 마음은 성정(性情: 성질과 마음)과
칠정(七情: 일곱 가지 감정)으로 구분되어 있다.
성정 중앙에 성(性)이 존재하는데 성(性)은 영(靈)에 해당되며 이는 하늘에서 내린
기본적인 자아(自我)다.
또한, 性은 理로서 좋은 감정에 속하며 네 가지 정(情)이 있는데 인(仁) 예(禮)
의(義) 지(智)가 그것이다.
仁은 불쌍한 것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생기고, 禮는 예의를 지키는 마음,
義는 의를 지키는 마음, 智는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성정에 속한다.
칠정은 희(喜:기쁠 희) 노(怒:성낼 노) 애(哀:슬플 애) 구(懼:두려워할 구)
애(愛:사랑 애) 오(惡:미워할 오) 욕(慾:욕심 욕)이 그것이다.
성정이 자아로 이어지면 선한 행동이 되고, 칠정이 자아에 영향을 미쳐서
칠정과 성정이 혼합되면서 자아가 악행으로 향할 수 있다.
이렇게 성리학에서 마음을 연구 분석한 부분은 서양에는 없는 매우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심오한 성리학을 알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이 뇌의 기능만 내세워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보면서 대부분의 서양인들 사고가 이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동서양을 다 알고 있는 유리한 고지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인만이 갖춘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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