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KOREA를 자랑하다.2002 FIFA 월드컵.(연재 소설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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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릴 때 백인은 무조건 미국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코 크고 머리 노랗고 피부가 하얀 외국인을 보면 그냥 미국사람이라 생각했다셨다.

나는 엄마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도 한국에 살 때는 외국인을 보면 그냥 미국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민와서 보니 정말 백인도 참으로 다양한  민족들임을 알 수 있었다.

더구나 너무 재미 있는 것은 백인은 다 영어를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영어를 못하는 백인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모습은 완전 백인인데 영어를 잘 못하고 발음도 너무 이상했다.

한국 사람들 발음이 훨씬 좋았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정말 꾸~린 발음이었다.

백인이 영어를 못하고 발음조차 이상한 것이 나는 처음에 너무도 신기했다.

캐나다와서 보니 우리가  그러했듯이 이곳 사람들 역시

동양 사람은 무조건 중국 사람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 사람이냐?고 물으면 나는 괜히 기분이 좋지 않고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꼭 코리안이란 것을 분명히 말하곤 했다.

 

우리 가게에도 손님들이 처음 왔을 땐 아빠,엄마를 중국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한 번만이라도 와서 아빠 엄마랑 이야기 나눠 보신 분들은 중국 사람이 아니고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봐주시고 좋아하셨다.

어떤 분은 정말 코리아가 어디 있는 줄도 전혀 모르시는 좀 무식(?)한 분들도 계셨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2002년에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되었다.

우리나라와 일본이 함께 월드컵을 역사상 처음으로 공동 개최한 17회 FIFA 월드컵이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열렸다.

 

‘새 천년,새 만남,새 출발’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각각 10곳,총 20개의 도시에서 

31일간 64경기가 치뤄졌다.

월드컵이 열리는 한 달동안 우리는 정말 너무도 신났다.

우리 가게 앞에 아빠는 태극기를 매일 커다랗게 걸어 두셨다.

그것을 보고 그 사이 몰랐던 손님들도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보고 일부러 들어오셔서 우리 가게 물건을 사 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월드컵도 신났고,그로인해 우리가 한국 사람임을 더 좋게 보아주는

캐나다 사람들로 인해 즐거웠다.

 

우리 태극기를 캐나다에서 휘날리는 기쁨은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매일 손님들과 대화 중에 축구 이야기가 항상 더해졌다.

손님들이 우리나라를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 참 감사했다.

나는 영어로 어려움 없이 우리나라 자랑을 잘 하시는 아빠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엄마 역시도 그러하셨다.내가 보기에 우리 아빠,엄마는 정말 대단해 보였다.

 

이 때 브라질이 우승을 하였고 독일이 준우승을 했다.

브라질 출신은 별로 없었지만 한 두분 브라질 출신이 왔을 때 아빠는 진심으로 축하를 해 주셨다.

독일 손님 역시 축구를 가지고 준우승을 축하해주며 많은 대화를 아빠는 즐겁게 하셨다.

개최국인 우리나라가 이 대회에서 4강을 해서 신이났다.한인회관에는 우리나라 경기가 있을 때마다

합동 응원도 연이었다.

일본은 16강 진출의 성과를 달성하기도했다.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월드컵이 골든골 제도가 시행된 마지막 경기였는 기록을 남겼고 이 대회를

끝으로 골든골제도가 없어졌다.

 

나는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룰도 잘 몰랐지만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축구가 이렇게 재미있는 스포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우리 집은 텔레비젼을 잘 안보고 또 한국에서 중계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가까이 사시는 장로님댁에 가서 함께 보기도했다.

 

공식 주제가를 그리스의 작곡가 반젤리스(Vanaelis)가 공식 음악의 작곡을 맡았다고한다.그리고 타이틀 송 Boom은 미국의 가수 아나스타샤가 불렀다고한다.로컬 타이틀 송은 양국이 개최한 것에 걸맞게 한국과 일본의 대표 가수가 참여했는데 우리나라 가수는 남성듀오 브라운아이즈의 나얼과 윤건 그리고 여가수 박정현이었고 일본은 남성듀어 케미스트리와 여가수 소웰루가 참여했다고한다.로컬 타이틀 노래는 Let’s Get Together Now였는데 나도 피아노로 쳐보면서 따라 부르기도 했다.

 

원래 개회를 희망한 나라가 멕시코까지 3개국이었는데 우리나라가 참여하게 됨으로서 판세가 바귀었고 일본과 함께 개최하게 되었다.맥시코가 유치를 포기하게 됨으로 자연스럽게 두 이웃 나라가 함께 개회한 것도 의미 있는 월드컵이었다.

 

 

우리나라는  1994년 11월 2002년 월드컵 유치의사 표명했고 1996년 6월 1일 FIFA 이사회 2002년 월드컵 대한민국, 일본 공동개최 결정이 났다고한다.당초 관심을 표명한 멕시코는 유치를 포기하였기에 일본은 일찌감치 월드컵 유치를 준비하면서 아시아권 최초 개최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뒤늦게 유치를 표명하면서 판세가 양자구도로 재편되었던 것이라한다.

1994년 아시아권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정몽준님이 승리하면서 판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고하니

참 반가운 일이었다.일본은 요코하마 스타디움 등 개최지 결정 이전에 경기장 공사를 시작하고,

 최첨단 버추얼 스크린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월드컵 유치를 위해 배수진을 쳤다고한다.

 유치전이 과열되면서 일각에서 공동개최 여론이 형성되었지만 나가누마 겐 당시 일본 축구 협회 회장은 

단독 개최 실패시 사임을 밝히는 등 일본의 단독개최 의지는 강했다.

주앙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은 공개적으로 일본 지지를 표명하였는데 아벨란제의 연임을 막기 위해 

유럽은 자연스레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판국이 되었다. 

양국의 유치전이 과열양상을 띄게되고, 표대결에서 일본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면서

 아벨란제 회장은 공동개최를 제안하고, 투표권을 가진 FIFA 이사들 사이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2002년 월드컵은 공동개최로 결정되었다고한다.

 

경제력에서 앞서고 오랜 준비를 해온 일본의 단독 개최가 타당해 보였지만 

일본은 월드컵 본선진출 경험이 없었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컸다고한다.

(일본은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가 결정된 후 199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고하지만). 

또한 우리나라는  FIFA  정몽준부회장님을 앞세워 적극적인 로비와 범국가적 유치전에 나서면서

 상대적으로 축구계 중심의 일본에 비해 유치전의 무게감에서 앞섰다고 볼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결과적으로 공동개최는 세계 축구계를 양분하고 있던 남미와 유럽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부정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월드컵을 열은 것 자체만으로도 참 의미가 있고

더구나 우리 가정처럼 외국에 이민와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를 더욱 자랑하고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기에 우리 가족은 모두 2002년 월드컵이 조국에서 열린 것을 너무도 자랑스러워하고 감사했다.

월드컵이 열린 이후 우리 단골들은 우리 가족이 한국 사람인 것을 확실히 잘 알게 되었고

한국에 관한 뉴스만 있어도 우리보다 먼저 알고 와서 알려 주곤했다.

조국의 반갑고 기쁜 소식은 함께 기뻐하고

슬프고 아픈 소식들은 함께 아파해주는 손님들이 너무도 귀하고 감사했다.

 

 

낯선 땅에서 이제 조금씩 뿌리를 내려 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기에 너무도 감사했다.

이곳 캐나다 사람들이 

우리 가족이 한국 사람임을 알아주고 좋아해주고 단골이 되어 

우리 아빠,엄마가 운영하시는 가게를 늘 찾아 주시는 것을 보면서 점점 그렇게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알리고 자랑할 수 있는 확실한 기회가 된 

2002년 FIFA 월드컵이 참 고마웠다.

우리 가족이 축구 경기를 재미있어하고 좋아하게 된 계기도 되었기에 감사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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