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實利)와 명분(名分)

또 개가 사람을 물어 죽였단다. 소위 반려견이라며 주인으로부터 온갖 호사(豪奢)를 받아가며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개/새/끼가 주인이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여린 문틈을 비집고 뛰어나가 승강기에 막 내리는 피해자를 물어뜯었고, 피해자가 즉사를 하진 않았지만 치료도중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른 것인데,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도 가해자도 정말 누구나 알만한(알 보다 좀 더 클 수도…)집안이다. 한쪽(가해)은 유명 가수이자 배우이고, 다른 한쪽(피해)은 종로 한복판에서 한 때 3대에 걸쳐 장안에서 가장 큰 대형 요식업을 경영하던 집안이다.

 

소위 이곳 논장에서 논객(난 사실 이 단어를 싫어하지만, 그냥 네티즌으로 하면 될 걸 굳이‘논객’은 무슨…그러나 만인 그렇게 칭하니 대세에 따를 수밖에)중에 정말 존경해 오던 세 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은 수년 째 아니 보이시니 연로하셔서…아니면 많이 불편하신가 보다. 그러나 아직 두 분이 남아 계시기에 그 분들의 글은 꼬박꼬박 챙겨 읽는다. 한 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촌철살인의 대가(大家:이 정도로도 부족한…)로서 그 분의 글 속에 우주의 삼라만상의 참 뜻이 터질 듯 박혀있다. 다른 한 분은 유려(流麗)한 글인 듯 하지만 그 속에 날카롭기가 이를 데 없는 논리로 무장 되어 있다.

 

어제 후자의 주인공께서 좋은 글을 하나 올리셨기에 정독을 해 보니 나 자신에 반하는 의미가 가득하기에 외람되지만 정중히 여쭈며 그 물음에 가르침을 구해 보았다. 저녁 늦게 컴 앞에 앉아본즉 그분의 정성스런 별도의 가르침이 계신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논리 정연한 가르침을 내리셨다. 그러나 머리가 아둔한 나로선 천하에 없는 명문은 될지언정 구하고자 하는 답은 아니다.

 

서로 의미가 통하면 부처와 가섭이 주고받은 염화미중의 미소로 난국을 적당히 헤쳐 나갈 수 있겠지만, 이런 경우 소인들은 콩이니 팥이니 따지며 자기주장이 옳다고 싸운다. 정답은 아니지만 그 분의 내심을 알게 되었고 굳이 여태까지의 돈독했던 관계를 글(名文) vs 썰(허접)로 대항하기엔 역부족이라 응대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이 새벽 토론마당에 들어와 보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정말 진심을 가지고 존경하는 또 다른 한 분이 글을 올리셨는데 역시 내 생각과는 많이 차이가 나는 글을 올리셨다. 두 분이 짜셨나? 설마 이 허접한 놈을…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한마디 변명을 아니 드릴 수가 없다.

 

나 역시 집에 개 두 마리를 기른다. 한 마리는 진돗개이고 다른 한 마리는 잉글리쉬 코카스페니얼(이 논장의 논객 한 분으로부터 분양 받은 것이다.) 진돗개는 실외견임에도 실내에서 기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물어 죽게 했다는 보도를 불과 며칠 전 보았다. 개를 개답지 않게 키운 주인의 탓이다. 반면 잉글리쉬 코카스페니얼은 실내견이다. 처음 그 놈을 만났을 때 얼마나 앙증맞고 귀여웠는지 산골의 적적함을 메우려 실내로 들여 놓을까도 생각했으나 그 해에 친. 외손녀(쌍둥이)가 셋씩이나 한 달 사이에 태어나며 어린 것들 보호차원에 결국 실외로 밀려나고 말았다.

 

개를 기르는 목적이 뭘까? 어떤 사람은 몸보신을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반려 견으로 나 같은 놈은 산골의 적막함과 혹시라도 내 집까지 내려올 유해(有害) 조수(鳥獸) 나아가 도둑이 오면 짖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기르는 것이다.

 

우리 집 개를 돌아보면 비록 사슬에 매여서 풍찬노숙(風餐露宿)을 하지만 짖을 때 짖어주고, 때론 우체부 아저씨의 오토바이만 보면 물어뜯고 말기라도 할 듯 과유불급 하지만 나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꼬리를 흔들며 충성을 맹세하는 걸 볼 때 아! 개를 기르는 목적과 수단에 비추어 나는 실리(實利)와 명분(名分)을 다 얻은 것이다.

 

어쩌면 나는 행운아다. 모든 사람들이 특히 개를 기르는 주인들이 실리와 명분을 다 얻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같이할 반려 견을 애지중지 키웠는데 주인 딸을 물어 죽이거나 이웃을 물어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면 실리 명분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달리 오해들은 말았으면 한다. 실리와 명분이라는 의미를 찾자는 것이지 개가 주제는 아니다. 오늘의 화두 홍준표 vs 박근혜 얘기가 그렇다. 처음부터 지각이 있는 인물이라면 스스로 탈당하며 보수의 길을 열어 주었어야 한다.

 

박근혜는 죄 하나 없이 빵에 처박혀 있다. 법리(法理)로는 죄가 없다고 투쟁하고 있고 나도 인정 한다. 가련하고, 안타깝고, 불쌍한 우리 박근혜. 그런데 도리(道理)로 따지면 어마 무시한 큰 죄를 짓고 있다. 자신에게 충성할 개를 잘못 기른 것이다. 평생을 같이할 반려 견이 자신을 물고 뜯은 것이다. 그 정도에 그쳤으면 그런대로 따끔한 충고로 끝날 수 있었지만 물어뜯고 밖으로 토낀 뒤 주인을 향해 짖는 것이다. 결국 그 소란 통에 이웃주민이 들고 일어나 본인의 집에 살 수 없고 빵에 처박힌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집구석에 남아 있던 개/새/끼들이라도 주인이 없는 빈 집에 도둑이 몰려들면 죽어라 짖어야 될 것 아닌가? 그 빈집을 도둑놈들이 차지하도록 수수방관(袖手傍觀) 오불관언(吾不關焉)했으니, 고급 사료에 때론 먹다 남은 갈비뼈를 식당주인 눈치 봐가며 가져다 먹이고 간식으로 도그 껌까지 공급하며 쥐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노심초사(勞心焦思)로 키워 놨더니 아가리 꽉 닫고 한 번을 안 짖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있나?

 

자! 박근혜가 도둑들에게 점령당한 집을 그냥 방치할 것인가? 개 잘못 기른 죄로 빵에 처박혀 있으니 방법이 없잖은가. 그 대신 우리가 찾아오자는 것이다.

 

어떤 지방엔 오십 또는 육십령(嶺)이라는 지명이 있다. 호환(虎患)을 피하기 위해 50 또는 60명의 사람이 모여야 그 고개를 넘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꼭 호환 때문만은 아니다. 도둑떼 화적떼 아니면 노상강도를 물리치기 위한 수단도 되는 것이다.

 

현금 도둑놈이 많을 때 80을 넘어 90에 육박한 경우도 있고 좀 줄었다고 하지만 70여 명이 박근혜의 빈집에 자리하고 있다. 저 도둑놈들을 무슨 수로 쫓아내고 잃어버린 집구석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속담에‘열 포졸 도둑 한 놈 못 지킨다.’라는 게 있다. 안타깝게도 현금 우리의 시국이 도둑놈 잡을 포졸도 한 통속이다. 그렇다면 도둑놈 몰아내기를 포기해야 할까? 이대로 영원히 도둑놈들의 횡포를 견디며 살아가야 할까? 힘을 합치자. 그리고 나 홀로 집이 아닌 잃어버린 집을 찾자.

 

현대는 아니 민주국가는 쪽수와 찬반으로 국가정책도 민심의 향배도 모든 의사(意思)가 결정이 된다. 쪽수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 주인을 물고 나갔던 개라도 불러 들여야 한다. 이것이 집을 돌려받기 위한 명분(名分)으로 삼아야 한다. 실외견이든 실내견이든 다 불러 들여야 한다. 뼈 빼고 살 빼고 광박(狂朴)무리로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다.

 

어제 정말 틀딱 무리들 3천이 모여 태극기집회를 했단다. 한마디로 웃기는 짜장면에 어리석은 곰탕이다. 도둑놈들이 어떤 놈들인데 외눈 하나 깜짝 할까? 썰이 너무 길었다.

 

홍준표를 두둔하자는 게 아니다. 또 하는 얘기지만, 그가 쪽수로 선출된 당 대표이기에 그가 그 자리에 있는 한 그의 지도력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그동안 박근혜를 믿어 온 것처럼…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명분도 명분이지만 실리(實利)를 구하자는 것이다. 나는 단지 그것에 공감하고 찬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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