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각들.
나는모태신앙의크리스챤이다.
그리고우리는지금5대째정통장로교집안이다.
여기서정통이라는표현을쓰는것은,
1885년언더우드선교사가제물포에발을디디면서가지고온그장로교회라는
뜻이다.
신학적입장의차이로1953년기독교장로회가분리돼나갔고,
1959년합동측이분리해나간후정통장로교는‘통합측장로교’로불린다.
합동측도결국은1979년다시분열됐다.
이상의대표적인분열을제외하면신학노선때문에생긴분열은거의없다.
그런데도지금한국개신교에서장로교라는간판을달고있는교단은100개가
넘는다.
가장큰이유는‘감투’때문이다.
인간의명예욕,그탐욕이그리스도의몸된교회를갈기갈기찢어낸것이다.
그들이3류로분류되어멸시받는것은당연하다.
그리고지금은4류로진행하는중이다.
지금한국의교회는크게봐서사회일반의수준에못미친다.
때문에사회를계도하지못하고있으며이는고등종교로서의기능이없다는뜻이다.

기독교인인내게평소가장큰영향력을끼치는분은,
학승(學僧)이신법정(法頂)스님이시다.
김수환추기경께서선종하신이후기독교에는그자리를메울수있는지도자가없다.
당분간은나타나기어려울것이다.
워낙기반,바탕이허약하기때문이다.
법정스님은‘참’을말씀하신다.
그리고그분은그렇게일상을사는분이다.
그의말씀이힘이있고무게가실리는것은사바세계와분명한선을긋기때문이다.
화사하고값비싼가사를걸치고보좌에높이앉아정부관료를알현하는‘정치중’과는
그차원을달리하는분이다.
20세기최고의종교학자인루마니아태생의‘엘리아데-Eliade’는,
‘종교란속된(profane)공간에성스러움(Thesacred)이침투하는사건’이라고
정의한다.
법정의말씀이그렇다.
그분은‘참’을살기때문에‘참’을말할수있고그건사바세계에울려퍼지는
‘참된말씀’이되는것이다.
크게보면모든종교의근본적인가르침은같은것이다.
아무리그형식이서로다르다해도핵심적인내용은다를수가없기때문이다.
대자대비라고하든,아가페라고하든,그핵심은서로다르지않다.
나와다른종교를존중해야하는이유가거기에있다.

이세상에행복을추구하지않는사람은없다.
그게누구든모든사람은행복할권리가있다.
더구나지금처럼모든것이빠르게진행되는‘속도사회’에서는더그렇다.
몸과마음이쉴곳이있어야하고긴장과압박에서이완될수있는방편이있어야
하는것이다.
인간,사람은기계의부품이아니기때문이다.
나는최근출판된법정의책을읽으면서‘행복’에대한그분의가르침에서크게
감명받은바있다.
제일처음의말씀이.
‘행복은목표가아니다’라는내용이다.
행복은목표를정하고이루어내는대상이아니라는말씀이다.
행복을목표로하면결국은도달하지못한다.
한걸음을나가면한걸음만큼더멀어지는게행복이다.
많은사람들이행복하지못한것은행복을내일이나모레에이룰수있는표적으로
생각하기때문이다.
행복이다음에이루어야할목표가아니라면행복은‘지금’이라는뜻이다.
그렇게가까이에있다는의미다.

‘행복은지금이순간여기에존재하는것이다.’
스님의말씀이다.
‘매화를찾아세상을헤매다돌아오니제집마당에피어있더라’는옛얘기가바로
그것이다.
행복은내일,모레에있는게아니라바로지금내주변에있다는뜻이다.
순간순간,바로여기에와있는행복은‘오늘’에찾아야만날수있는것이다.
‘행복은문을두드리며찾아오는것이아니라바로내안에서우러나오고꽃향기
처럼은은하게스며나오는것이다.‘
행복은지극히주관적인정서다.
기준이내안에있고,그것을행복으로느끼는것도내마음이다.
내가행복하다고느끼면행복인것이다.
밖에서나를찾아오는객관적대상이아닌것이다.
우리모두는자꾸행복을밖에서찾고있다.
어디에선가내게로오는것이라고생각한다.
그러나스님은,행복은우리안에있다고말씀하신다.
내안에있는행복이라면내가발견하면되는것이다.

그렇다면행복한삶을위한조건은어떤것일까.
우리들이어떤태도로살아야행복할수있는것일까.
그첫째조건이‘남과비교하지말라’다.
상대적박탈감은비교의나쁜산물이다.
상대적빈곤감도마찬가지다.
행복은철저히주관적이다.
남과비교하지말라는것은다른것들과비교하지말라는뜻이다.
비교는이미상대적이다.
이세상에상대적인행복은없다.
내가좋고,행복하면그게다다.
‘움켜잡기보다는쓰다듬으라.’
움켜잡는다는것은‘탐욕’이다.
쓰다듬는다는것은감상이고느낌이다.
소유하고저하는인간의집착은목숨까지도거는정도다.
탐욕은온전히충족될수없기때문에만족을앗아간다.
꽃을보고즐기는것과그꽃을자기집으로가져가기위해꺾는것이바로그차이다.
꺾인꽃은결국죽고만다.
움켜잡으려는마음,탐욕이있는한행복은설자리가없다.
행복을알아보는안목도가질수없다.

‘오래된것들을아름답게여기라.’
오래된것들은과거가누적돼있다.
그안에는세월의얘기들이쌓여있다.
그래서값이아니라가치가들어있는것이다.
우리는너무나오래동안수많은옛것들을허물어버렸다.
개발이라는원시적인이름으로오래된것들을불도져로밀어버렸다.
보이는것뿐만아니라보이지않는것도그렇게했다.
오늘의우리사회가‘도덕적’이지못한게그런것이다.
사람사이의기본인‘예의’가불도져에밀려사라졌다.
그래서모두가고통스럽게살고있다.
‘때때로기도하고명상하라.’
속도와소음속에서‘정신의자리’는없다.
행복을느낄수있는마음은기도와명상으로준비할수있다.
최근템플스테이가유행하는것도현대인들이무엇을원하는가를잘보여주는
사례라고할수있다.
온갖쏠림에서잠시비켜서서자기의영역을구축하는작업없이행복은발견되지
않는다.
비록그것이바로옆에있다고해도그렇다.

내게있어행복은조각들이다.
그건모두가일상안에평범하게존재하고있다.
느끼지못하면지나가고만다.
놓치는것도있겠지만향유하는행복도많다.
나는,
어떤방해도받지않고조용히책을읽을때가가장행복하다.
몰랐던것을알게되고,새로운깨달음을얻을때그기쁨은곧행복이다.
사람을정신적으로키우는데는책만한게없다.
독서는운명도바꾼다고한다.
그리고독서는일상을윤택(潤澤)하게해준다.
내게있어책은행복을알게해주는영원한스승이자친구다.

나는음악을들으면서행복하다.
정말음악은‘영혼이거니는뜰’이다.
음악은우리들을쓰다듬어주고정화하며,선한것과아름다운것을느끼게해준다.
인류의문화사에서음악은늘동반자였다.
인간에게음악은필요한것이었기때문이다.
음악을사랑하는모든사람들에게그것은행복의원천이자끝까지함께가는
동반자이기도하다.
악기를다룰수있다면금상첨화다.
그건너무나놀라운세계다.

나는글을쓰면서행복하다.
공부할수있기때문이다.
수많은책들을읽어야하고컴퓨터앞에앉아온갖사이트를뒤지는작업이힘든것
만큼보람도있는것이기때문이다.
배움에는정말끝이없다.
학문의길은,그게자기가좋아하는길이라면아주행복한길이다.
학문의즐거움은정말독특한것이다.

나는내가좋아하는영화를보면서행복하다.
영화한편,한편에대해공부하는재미도행복이다.
알면,더크게보이고그만큼더재미있다.
나는아주다양한방법으로영화를본다.
때문에같은영화를여러번봐도그각도가다르기때문에새즐거움이있다.
그기법을개발하는데도상당한세월이필요했다.
좋아하는영화를수집하는재미도큰행복이다.
원하는것을입수했을때의만족감은다른것과비교할수없다.
어려서부터지금까지나의영화사랑은변함이없다.

나는걷기운동을하면서행복하다.
수로를따라매일걷는양쪽에는논과밭이있어사계절을읽을수있다.
파종에서추수까지의모든과정은물론,
철따라가고오는철새들을구경하는것도큰행복이다.
사계절의변화는곧섭리다.
걷는운동은가장간단하면서도그효과는아주큰,기본적인운동이다.
거의매일60여분동안5키로정도를빠른걸음으로걷는다.
내게는벌써수십년된운동이다.
지금내가건강한것은걷기운동의덕이클것이다.
오래동안걷기운동을하면침착해지고지구력이생긴다.
인간이대지를닮는것이다.
나는아내와함께자동차여행을할때행복하다.
국내에서든,외국에서든운전은거의아내가하고지도와나침반은내몫이다.
나는그만큼지도를잘읽는다.
우리는섬진강도,한계령도아침에떠나저녁이면돌아온다.
휴게소에서음식을사먹고,커피마시고,간식을사서먹는즐거움도행복이다.
자동차여행은부부의사이를튼실하게해주는기능도있다.
그건즐거움도어려움도(특히외국에서)함께하기때문이다.
아내와함께외식할때도똑같이즐겁다.
평범한보통의일상이지만그게행복이라고마음먹으면정말행복인것이다.

나는하루의일과를마치고,
따뜻한잠자리에들때늘감사한다.
특히악천후로비바람이심한밤,자기집에서따뜻한잠자리에들수있다는사실에
깊이감사한다.
그래서행복하다.
체험적으로알게된것은,
행복은감사없이는찾아지지않는다는점이다.
일찌기바울은데살노니카교인들에게보낸편지에서
‘enpantieukaristeite’라는간곡한당부를한다.
이원문을직역하면‘(일상의)모든일에감사하라’는뜻이다.
‘불만’은행복을몰아내는악이다.
만족하고,감사하는인간에게만행복은자기를드러내보여준다.
그래서감사없이행복은없다.
행복,복(福)에대한대표적인성경말씀은구약의시편제1편이다.
그런데거기엔행복의조건으로서의‘소유’에대해서는한마디도없다.
소유를통해행복해지려고한다면그건도달할수없는목표가된다.
행복은지금,여기에서내안에있다는법정의말씀은그래서‘참’이다.
그리고행복의이작은조각들을꿰매면커다란행복의보자기가된다.
그보자기는행복의‘조각’을많이가진자들이받는하늘의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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