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먹는자리, 많은것을 말해준다.

사회학자들은 인간을 ‘사회적동물’ 이라고 정의한다.
사회(社會)는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조직화된 접단생활의 총칭이다.
즉 사람은 혼자 사는게 아니라 수많은 다른사람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맺으며
살고있다는 뜻이다.
입산수도하는게 아니라면 혼자 살수도 없다.
아무리 익명성이 활개치는 정보화시대라 해도 우리 모두는 크고작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가장 작게는 가정, 그리고 이웃과 동네, 같은아파트가 그러하며 학교, 직장, 군대와
같은 조직과 집단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동아리도 있고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회도 있으며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종교적 공동체도 있다.
결국 인간은 그게 누구든 혼자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가지
관계를 가지면서 공동체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는 앞으로 사회가 아무리 발전,발달해도 방법으로서의 차이는 있어도
인간관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접속과 접촉은 함께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있는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아는 일 이지만 인간관계는
누구에게나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대인관계는 그 결과에서 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사람 잘 만나는것과 잘못 만나는 경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기도 하다.
상사도 잘 만나야 하지만 부하도 잘 만나야 한다는게 바로 그 얘기다.
문제는 내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일이다.
사람은 그 누구든 겉모습만 봐서는 그 속내를 알수가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알수없다는 격언이 있는게 그렇다.
물론 오래 사귀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여러 가지를 알게 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상대를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비지니스의 세계에서는 더 그렇다.
그렇다면 가장 짧은시간에 상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제부터 오랜 사회생활을 통해 터득한 노하우를 설명해 보기로 한다.

작고하신 엄친께서 한신 말씀이 있다.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같이 밥을 먹어보라’
젊었을 때에는 이 말씀의 뜻을 잘 몰랐다.
그러나 80평생을 살면서 경험한 바로는 이 말씀이 정곡을 찌르고 있다는 진실이다.
짧은 시간안에 상대를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으로는 ‘같이 밥먹어보는 것’ 보다
더 좋은게 없다.
정말 놀라운 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밥먹는 자리, 식탁에서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찰만 잘 하면 정말 많은 정보를 얻을수 있다.
너나 할것없이 밥먹는 자리는 가장 즐거운 자리다.
긴장을 풀고,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대와 그것을 먹을려는 욕망으로 아주 솔직해
지고 평범해 진다.
명함속에 숨어있던 인간이 그것들을 벗어버리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 식탁이야말로 한 인간의 가장 정직한, 솔직한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식탁의 긍정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제일먼저 눈여겨봐야 할것이 법먹는 자세다.
자세는 사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태도다.
음식을 앞에두고 감사하는 마음과 진지한 자세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사람이나 자기의 업무-일, 더많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진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며 신뢰가 가는 사람이다.
반대로 식탁에서 산만한 사람들이 있다.
집중해서 식사하기 보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옆테이블에 시선을 주는등, 같이
식사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만하다는것은 질서나 통일성이 없이 어수선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여러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며 무질서한 분위기를 만든다.
함께 어떤일을 도모하기가 어렵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다음은 숟가락과 젓가락을 쥐는 모양새다.
수저는 음식을 먹는 가장 직접적인 도구다.
이 도구를 어떻게 쥐고있는가 하는 것은 효율과 관계가 있다.
그건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뜻밖에 수저를 제대로 쥘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밥상머리교육-가정교육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일반적으로 차려진 식탁에는 상대적으로 더 맛있는 반찬이 있다.
순식간에 그 맛있는 반찬을 혼자 해치우는 얌체족이 있다.
좀 덜하다해도 다른사람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가져다먹는 사람도 있다.
욕심이 크고, 독점욕이 강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무슨일이든 함께 도모할수 없는 부류이기도 하다.
다음이 밥먹는 속도다.
함께 식사 한다는 것은 교제의 시간이며 사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찍이 임어당은,
‘식탁은 최고의 외교’ 라고 갈파한바 있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후다닥 식사를 끝내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를 배려할줄 모르는 독선적인 사람들이다.
특히 여자와 식사할 때 속도의 조절은 기본예의에 속한다.
남을 배려할줄 모르는 사람은 그 나쁜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기피하는게 상책이다.
어느날인가는 물벼락을 맞을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어렵다.

다음은 밥먹으면서 얘기를 나룰때의 목소리의 크기다.
둘이서 얘기를 나누되 상대가 알아들을수 있는 적당한 크기면 된다.
그 목소리가 커서 먼 테이블에까지 들릴정도라면 그건 무례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자주 식당에서 목소리가 유난히 큰 사람들 때문에 불쾌해진 경우가 많다.
목소리가 큰 것은 자기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며 남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은 정직하기도 하지만 허풍이 센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조심해야 한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도 그걸 모른다는 것은 일종의 정신병
이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유난히 큰 사람들은 세밀하지도, 치밀하지도 못하며 디테일에 약하다.
더불어 어떤일을 도모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큰 사람들이다.
목소리가 크다는 것은 그 안이 부실하기 때문에 생기는 반사적인 기능일수 있다.
빈 깡통이 더 요란한게 그런 이치다.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것은 밥먹고 난 자리다.
사람떠난 자리는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말이있다.
밥먹은자리, 그건 정말 중요한 현장이다.
목불인견, 차마 눈뜨고 봐줄수 없는, 개판이 있는가 하면 깨끗이 정돈된, 훌륭한
자리도 있다.
사실 우리들 식당의 밥먹고난 자리는 거의가 개판이다.
자기가 떠난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나 업무에서 마무리가 약하다.
마무리가 약하면 그 이전의 모든 과정이 무위가 될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책임자’ 의 자리에 앉으면 안된다.
중책을 맡아도 안되며 여럿을 위한 일에는 관여하면 안된다.
처음과 중간이 아무리 견고해도 뒷마무리가 약하면 다 풀어지고 만다.
밥먹고 난 자리,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그 인간성을 평가받는 현장임을 잊으면 안된다.
밥먹고 난 자리는 하늘이 내려다 보고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밥을 같이 먹어보면 부수적으로 알아지는 것도 많다.
그리고 그건 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우선 그 사람이 어느지역 사람인지 알 수 있다.
더 선호하는 반찬이 단서가 된다.
또하나는 그 사람의 경제력이다.
선호하는 음식-메뉴의 수준이 그걸 말해준다.
라면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만원짜리 한정식만 먹는 사람도 있다.
말하자면 같이 밥을 먹어보면 그 생활수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화를 나눠보면 학력과 함께 문화생활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할수 있다.
정치적 성향, 취미, 가치관까지도 알게된다.
함께 밥먹는 시간은 길어봐야 몇시간이지만 이 짧은시간안에 한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을 파악할수 있다.
물론 상당한 관찰력이 있어야 하며 한 인간을 평가할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다른사람에 대한 평가도 자기의 수준이 기준이 된다.
그래서 먼저 자기를 다듬을 필요가 있다.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뷔페식당얘기를 할차례다.
이땅에 뷔페식당이 처음 생겼을 때 식당벽에는 ‘먹을만큼만 가져가라’ 는 커다란
글귀가 걸려있었으며 종업원들은 ‘드실만큼만 가져가시라’ 고 외치기도 했다.
접시에 담아온 음식을 반도 먹지못하는 일이 흔했다.
뷔페를 ‘공짜음식’ 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일은 없다.
그런데도 자주, 음식의 절반을 남겨놓은 접시를 밀어놓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떠난 자리에 남은 음식이 엄청난 식탁도 있다.
왜 먹을만큼만 덜어오지 못하는가.
거기에는 자기과시의 허영심과 함께 뷔페식당에 대한 오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음식이 버려지면 그건 죄악이다.
음식은 언제나 소중한 것이며 아껴먹는게 기본 자세다.
음식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일부를 버리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사람도 못쓰게 된다.

지금은 밥상머리교육-가정교육이 실종된 시대다.
따라서 기본이 안된, 바탕이 없는 맹물들이 흘러넘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런 사회가 온전할 리가 없다.
하나의 예로,
지금은 ‘세상의 모든것이 조롱받는 시대’ 다.
참된 권위와 잘못된 권위주의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별을 못한다는 것은 ‘판단력’ 이 없다는 뜻이며 동서남북을 모른다는 의미다.
우리사회가 더 건전해지고 발전하려면 밥상머리교육이 살아나야 한다.
그게 가장중요한 기초학습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기초가 부족하면 그 공동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살기가 그만큼 어려워지고 힘들어진다.
기초가 단단하면 그 위에 어떤집을 짓든 기울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밥상머리교육-가정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가장 중요한 인간교육이다.
우리조상들은 조손(祖孫-할아버지와 손자)이 밥상을 함께하는 지혜가 있었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는 그렇게 기초교육을 시켰다.
우리모두의 소중한 자산이 아닐수 없다.

이해의 첫걸음은 차이를 아는 것이다.-yor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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