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 늘 덕이 부족하였던 모양입니다. 작정하고 명산을 찾으면 일기가 심술을 부립니다.
벼르고 별러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면 온통 잿빛 세상이질 않나, 지난 봄엔 휴가까지 내어 한라산에 올랐다가 비바람 만나 덜덜 떨며 생쥐꼴로 내려서기도 했지요. 산우들이 SNS에 자랑질(?)하는 그림 보면 지리산과 한라산은 늘 환상적이던데… 그래서 마음 비우기로 했습니다. 즉 길 나설 때 기대를 않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욕심을 내려놓고 나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얼마 전 합천 가야산 무박산행에서 별빛 총총한 밤하늘과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을 만났지요. 이번 정선 함백산에서도 가시거리가 뛰어나 장쾌한 강원 산군의 속살을 원없이 탐할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새털처럼 가벼웠지요.
산꾼들에게 함백산은 늘 ‘겨울산’이다. 상고대 뒤덮힌 능선을 딛고 서면 솜털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을 만끽 할 수 있어 그러하고, 빼곡한 산호초와 말미잘이 지천인 깊은 바닷 속을 유영하는 착각에 깊이 몰입할 수 있기에 그러하고, 은빛찬란한 품에 안겨 세속에 찌들어 덤덤해진 가슴에 감성의 불을 지필 수 있기에 그러하다. 6월 초, 모 산악회로부터 함백산 산행공지 문자가 날아들었다. 여름의 함백산을 찾는 산악회는 드물다. 그러나 요며칠 미세먼지 없는 날이 이어지면서 하늘빛이 고와 강원 고봉이 눈에 삼삼하던 참이었다.
함백산은 강원 태백시와 정선군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2.9m의 산으로 우리나라에서 여섯번째로 높은 백두대간의 대표적 고봉 중 하나다.
백두대간 만항재에서 걸음을 시작해 함백산 올라 대간 능선을 따라 중함백 거쳐 은대봉 찍고 두문동재로 내려서는 코스다. 만항재(1,330m)는 우리나라에서 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마루다. 만항재에서 고도를 243m만 높이면 정상이다. 고봉을 그냥 날(生)로 접수하는 기분이라 찝찝하긴 하다.
구불구불 산길을 힘겹게 오른 버스가 ‘만항재’를 그냥 지나쳤다. “어라? 여기서부터 걸음 시작인데…” 산대장 왈, “버스로 2km 더 가면 태백선수촌 고갯마루가 나옵니다. 거기서부터 산행 시작합니다.” 이 모든게 여름이라 가능했다. 겨울엔 도로가 얼어붙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저나 만항재에서 걸어도 거저먹는 기분인데, 1,572.9m 고봉을 1km만 걸어 올라 선다니 산꾼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거짓말처럼 정상 통신탑이 코앞이다. 가벼운 복장으로 정상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여럿 눈에 띈다. 이 고갯마루에서 1km만 발품 팔면 그지없이 장쾌한 강원 山群을 발아래 둘 수 있기 때문이다.
너덜길과 돌계단 그리고 된비알을 올라서자, 나무들이 키를 낮췄다. 철쭉은 이미 끝물이다.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달궜으나 서늘한 바람에 오히려 한기가 느껴졌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한가롭다. 백두대간 함백산의 유래가 적힌 동그란 안내석 앞에 섰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이 저술한 산경표에 대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백, 대박, 함백은 모두 크게 밝다는 뜻이다. 함백산엔 상함백, 중함백, 하함백의 세 봉우리가 있는데, 상함백은 은대봉, 중함백은 은적암 뒷봉우리, 하함백은 지금의 정상부이다”
그러고보니 상, 중, 하함백 봉우리가 오늘 걷는 능선 상에 다 있다.
판판한 돌기단에 올려진 둥글넓적한 정상표시석 뒤에 멋들어진 돌탑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곳, 함백산 정상(1,572.9m)이다. 끝 간데 없이 펼쳐진 첩첩산군은 푸른 기운이 넘실대는 초록빛 바다 그 자체다. 오늘처럼 가시거리가 긴 날이 일년에 몇 번이나 될까? 미세먼지에 하도 휘둘리다보니 청정자연의 소중함이 절로 느껴진다.
중함백과 은대봉을 품은 북쪽 대간 능선이 소잔등처럼 펑퍼짐하다. 그러나 결코 만만찮은 두 봉우리가 기다리고 있다. 헬리포트로 내려섰다. 헬리포트 바로 아래, 함백산의 트렌드이기도 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주목이 매혹적 자태를 뽐내며 발길을 잡는다.
겨울 함백산에 올랐을 때 존재감을 자랑하던 바로 그 주목이다. 만고풍상 겪으면서도 꼿꼿하고 의연하다. 그래서 귀한 대접을 받는 주목이다. 주목군락지를 지나 길은 숲속으로 이어진다. 완만하던 숲길은 다시 고도를 높이더니 중함백 봉우리를 솟구쳐 올렸다.
‘중함백 1505m’라 쓰인 길다란 널빤지와 이정표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몇해 전 겨울에 찾았을 때는 없던 이정표다. 작년 8월 함백산을 포함한 태백산 주변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등로도 새로이 정비하고 낯익은 국립공원 라벨이 붙은 새 이정표도 등장했다.
중함백에서 한발짝 내려서면 고한읍이 내려다 보이는 조망터다. 산자락 군데군데 내려앉은 뭉게구름 그림자가 더없이 한가롭다. 바위턱에 걸터앉아 산줄기를 타고 넘는 구름 그림자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끊임없이 흩어졌다가도 다시 하나되는 모습이 세상사를 닮았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다시 숲길로 들어 갈림길 쉼터에 자리를 폈다. 쉴때는 바람막이를 걸쳐야 할만큼 숲속 공기는 서늘했다.
일행 중 하나가 배낭에서 커다란 통(?)을 꺼내 쉼터 평상 위에 올렸다. 누군가 소리쳤다.”으아~ 5000cc 생맥주다!” 생맥주 5리터를 짊어지고 예까지 온 것이다. 줄지어 컵을 들이댔다. 산상에서 잠시 생맥주파티(?)를 즐길 수 있어 일행들은 엄지를 치켜 세워 환호했다. 생각과 실행이 가상할 따름이다.
샘터 사거리를 지나 은대봉 비탈에 올라붙었다. 함백산 등로 중 땀 좀 빼야하는 구간이다. 숨이 턱끝까지 차 오를 즈음, 은대봉 표시석이 눈에 들어왔다. 은대봉 정상(1,442.3m)은 마치 폐교된 시골학교 운동장 같다. 평평한 바닥엔 들꽃이 지천이다. 들꽃은 다소곳하고 소박하다. 그래서 좋다. 늙수그레한 ‘아재’들이 샛노란 ‘미나리아재비꽃’에 홀려 인증샷 삼매경에 푹 빠져 있다.
은대봉에서 두문동재로 내려서는 길은 경사가 제법이다. 앙상한 가지를 늘어뜨린 고사목이 이따금씩 눈에 들어온다. 고사목은 제 명을 다하고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두문동재가 가까워지자, 봉긋한 금대봉이 바짝 다가섰다. 마음 같아선 은대봉의 짝궁인 금대봉까지 걸음하고 싶은데…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두문동재(싸리재)에 닿았다. 정선군 고한과 태백시 경계선인 이 재를 두고 태백에서는 싸리재, 고한에서는 두문동재라 부른다.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풀은 내마음~
그랬다. 이선희의 ‘아름다운 강산’이 절로 흥얼거려질만큼 너무나 아름다운 여름의 함백산, 은빛찬란한 겨울 함백과는 또다른 풍광으로 기억될 듯 싶다.
데레사
2017년 6월 14일 at 7:23 오후
세상에 생맥주통을 그 높은 함백산으로
지고 오다니요?
대단한 분입니다.
부산산악회의 시민안내 등반때 늘 선발대로
뽑혀 시민들께 나누어줄 선물을 잔뜩지고
오르면서도 즐거웠던 생각이 납니다.
아마 그분도 그 맥주를 마실분들의 즐거움을
상상하며 힘들지 않았을 겁니다.
카스톱
2017년 6월 16일 at 9:09 오전
맞습니다, 그 분은 산길을 오가는 낯선 산객에게도 생맥을 한 컵씩 선사했지요 ㅎ
koyang4283
2017년 6월 15일 at 1:17 오후
대단한 산행기입니다. 30여년 전 함백산을 올랐던 추억이 있습니다. 작취미성 상태에서 새벽에 올랐기에, 힘 들었다는 것 외에 특별히 기억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산 후 들린 정암사의 추억은 남아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카스톱
2017년 6월 16일 at 9:08 오전
졸고를 보며 오래 전 함백산의 추억을 떠올리셨다니, 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