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화가 4 :겸재 정선2- 돌아온 겸재 그림 21점
겸재정선의위상이더욱드러나는유익한뉴스한건을발견하여
여기그대로수록합니다
겸재정선국보급그림21점돌아왔다.
<!–뉴스본문시작–>
[중앙일보송의호.박지영] 겸재화첩그림21점의여정은드라마틱했다. 조선의대표적인화가의작품수십점이독일땅에있다는사실을 처음알게된것은유준영(전이화여대미대교수)씨였다.

1974년독일에서유학하던유씨는 당시성오틸리엔수도원장인노베르트베버의저서인 금강산여행기’를읽다베버가갖고있다는겸재그림사진석장을접했다. 그는무작정오틸리엔수도원으로달려갔다. 선교문물을전시해놓은수도원내박물관한켠에서 한국의고무신.곰방대와나란히놓여있는겸재의화첩을발견했다. 유씨는 "이국땅에서조선시대최고화가의작품을봤을때의감격은이루말할수없다"며 "박물관측의양해를얻어작품사진을찍는등기록으로남겼다"고말했다. 유씨는이를바탕으로’독일에있는겸재의회화, 오틸리엔수도원에있는수장화첩의첫공개'(77년)라는글로 화첩의존재를세상에알렸다.

유씨의연구에따르면겸재의그림은 베버원장이독일로돌아갈때함께가져간것으로알려졌다. 25년한국에가톨릭교구를시찰하러온베버원장은금강산여행길에 지인들이구입한겸재그림21점을선물로받았고, 이후오틸리엔수도원에기증했다.

그림은수도원의작은박물관에전시됐다. 본래는하나씩분리돼있었으나독일에서화첩형태로만들어졌다고한다. 그때부터오틸리엔수도원을방문한한국인들이 수도원관계자에게"한국의국보급문화재"라며 "저렇게둘물건이아니다"는말을되풀이했다고전해진다.

수도원측은그이후허술한보안을우려해 겸재화첩을박물관캐비닛속에깊숙이넣어두었다. 그리고20년이지났다. 왜관성베네딕도회수도원의선지훈신부는 그무렵7년간독일오틸리엔수도원에서수행생활을하게된다. 왜관수도원과독일오틸리엔수도원은본부와지부관계는아니지만 서로수행자를교환하는등특별한관계를유지해오고있다.

그는오틸리엔이소장한방대한한국관련필름자료와 문화재등을접한뒤한국으로가져갈방법을생각하게되었다고한다. 기회가왔다.그 가오틸리엔수도원에서수행할당시동료이자절친한친구이던 예레미야스슈뢰더가오틸리엔수도원의아빠스(대수도원장)가된것이다.

수도원관계자는 "선신부는2009년이면오틸리엔수도원이한국에진출한지 100년이되는특별한해임을강조하며 특별행사로한국문화재의반환보다더의미있는일은없다고 그를설득하기시작했다"고전했다. 선신부는"설득과정이참으로힘들어때로는압박성발언을하기도했다"며 "해외에반출된문화재를의미있게반환한선례가될것같다"고말했다.

이와관련,오틸리엔수도원관계자는 "반환을결정한직접적계기는미술품경매업체인크리스티와소더비화첩에눈독을들이고팔것을여러차례집요하게권유했기때문"이라고설명했다. 당시"아무리가격을올려도 경매업체에넘길생각은추호도없다"고거부했다는것. 이후수도원에선오히려 "한국인에게중요한의미를갖는문화재를이기회에돌려주자"는 공감대가형성됐다고한다. 크리스티경매측은화첩에50억원이란가상경매가를매기기도했다고한다.

◆오틸리엔수도원과한국의인연=한국에서베네딕도회는 1909년독일베네딕도회오틸리엔수도원의수도자들이 서울에파견되면서시작됐다. 27년에는당시교회의필요성때문에수도원을 원산지역덕원으로옮기게되었고34년에는중국옌지에도수도원을세웠다.

그러나한국전쟁을전후해모두폐쇄됐다. 52년뿔뿔이흩어진수도자들이다시모여 베네딕도회수도회생활을시작한곳이 지금의왜관수도원이다. 한국최초의남자수도원이기도하다.

대구=송의호기자,서울=박지영기자

겸재정선의‘야수소서’
겸재정선의‘야수소서’ 나무밑에앉아있는선비는중국진나라의병법가황석공이며동자는장량이다. 겸재는중국고사를바탕으로인물화를그렸지만 인물의얼굴이나배경의나무등은한국적양식으로표현했다 독일베네딕도회오틸리엔수도원에있던 조선시대화가겸재정선(1676-1759)의21점을합친화첩이 영구임대형식으로한국에돌아왔다. 사진은수록작품중함흥본궁송(咸興本宮松)라는제목이붙어있다./연합뉴스

사진은수록작품중부자묘노회(夫子廟老檜)라는제목이붙어있다./연합뉴스

사진은수록작품중낙조장류(落照藏柳)라는제목이붙어있다./연합뉴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