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언제나 시작page15: 유년의기억 속으로/하약국집 막내 딸

하약국집막내딸

누가뭐래도나는하약국집귀한막내딸이었다.

누구에게나고집을꺾지않으시는아버지께서나에게만은매우너그러우셨다.

오빠는잡비가쓰고싶으면나를중간에넣어아버지에게돈을타내곤했다.

아버지께서나의정직성은믿으셨기때문이다.

치렁치렁엉덩이까지땋고다녔던나의긴머리채,

아침마다뒤꼭지가따갑도록쫑쫑머리를땋으시는어머니에게

나의머리를맡기고있는것은정말고역이었다.

그래서,여섯살쯤되는어느날,

혼자서이발소에갔다.

자매가없는나는,그당시미장원이있다는걸몰랐었다.

오빠들은머리를깎으러이발소로갔다는생각에찾아나섰던것이다.

무겁게드리워졌던머리채는순식간에싹둑잘려져나갔다.

돈도없이간것같은데돈은받지않았다.

아마도그당시에는가발을만드느라고머리카락(달비)값이

꽤비쌌기때문이라한다.

갑자기말도없이혼자나가머리를자르고온나를

아버지께서는노발대발하시며쫓아내셨다.

그러나나는아버지에게야단맞는두려움보다는,

긴머리채가없어져머리통이가볍게된것만신이났다.

이미없어져버린머리채를아버지께서화를내신다고도로붙지않을테니

고소하고시원한느낌은이루다말할수가없었다.

그래서쫓겨나와이웃에있는고종오빠네집에서몰래먹고자고

편하게놀았다.

사람들이앙큼하고당돌한데가있다고혀를내둘렀다.

새벽이면언제나깨어글을읽으시는아버지께서한바탕성독이끝나면

우리를깨우셨다.

나는별일도없이일찍일어나서이방저방기웃거리며

수준에도안맞는오빠들의책을주워다읽고

아버지께서읽으시는고전들을,뜻도모르면서따라외우기도했다.

서당개3년에풍월을읊는다고발음도틀리게외웠던구절들이,

원전이무엇이며어떤내용인줄도모르면서

지금도운을떼면줄줄쏟아져나온다.

경원기미동선생,문공작서집전선생몰후십년시극성편(서경서문)

대학지도는재명명덕하고,재신민하고,재지어지선이니라(대학경문)

별쓸모도없는24절후도아버지를따라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곡우….

하며따라외웠다.

자식은내리사랑이라고머리채를마음대로자른것외에는

특별히드러나게거역을하지않았고,

시키는일을꼬박꼬박잘하며열심히책을읽는나를

아버지께서는무척귀여워해주셨던것같았다.

오빠들몰레커다란눈깔사탕을하나씩꺼내주시기도했고,

석두로약을자르는법,약을고르는방법등을설명해주셨다.

밤은건율,잣은해송자하며우리가흔히보는

음식의한약명도가르쳐주셨다.

누구에게나엄하셨고원리원칙을따지셨던분이셨지만,

나에게만은유독유연하게대하셨으므로

나는고집도부리고더러떼도썼었다.

내가쓰는용어는또래들보다한자용어들이많았고겉늙은이같아서

정말내가싫었다.

그러나너무나쁘지만은않았던게,일부러낱말뜻을외우지않아도

저절로알게되는낱말들이많았다.

죽자고아이들이외울때,나는자연적으로받아들인

한자문화의분위기로좋은영향을받았었지만

당시의나는,언어에서부터몸에점점배어드는노인냄새를느끼며

그것을떨어버리려안간힘을썼었다.

사람은싫어하면서도그것을닮고그것에젖어들어간다고했던가?

이런것도훈습이라고해야할지모르겠지만

나는영락없는하약국집막내딸로고리타분하게훈습되어지고있었다.

그분위기에벗어나려고무진애를쓰면서도….

<이어지는글은’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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