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16곳을1박2일로다니기는너무무리였다.
길을찾는것도쉽지않았고순례길의어려움때문에구한네비게이션은
말을잘듣지않았다.
깊은골짜기로가면아무도안가보던길이라자주멍청해지는기계.
처음에간다산초당은산길이너무한적하여순례가아니라산책하는기분이었다.
성지순례는떠남이요,만남이요,돌아옴이라는.초남이성지순교자의진주,
동정부부루갈다가살던곳에걸린문귀이다.
80여개국을여행하면서도떠남,만남,돌아옴을무수히되뇌었거늘
카미노를택하고절절히느끼는위세단어…떠남,만남,돌아옴.
과연갈등을놓을수있으며,순교자,하느님을만나서기쁨을느끼고
제자리에돌아와우뚝설수있겠는가?
자꾸만흔들리는나를두고무수히채찍질을한다.
떠남,만남,돌아옴!!!
2008년9월20일
1.다산초당
새벽6시길을떠났다.
우선강진의다산초당으로갔다.
국토의끝,월출산아래전라남도강진은남도문화의일번지.
당대최고의실학자였던다산정약용(1762-1836년)이무려18년간이나유배됐던곳이다.
다산은이곳에서500여권의명저(名著)를저술했기에정약전·약종·형제의고향이자
한국천주교회의요람인마재못지않은중요한사적지로손꼽힌다.
많은시설이새로들어섰다.
공사를하는중장비소리가시끄럽다.
길도새로나고전시실,회관,전통차마시는곳.
다산이고향생각을하며바다를바라보았던천일각에서쉬었다.
소나무의굽은선을따라먼바다가,먼산이다보였다.
다산이10여년간매일걸었다는산길은풋풋하게살아있다.
정말오랫만에두꺼비를보았다.
초당옆에마음을모아돌을쪼았던정석바위.
마당앞의차를끓였던다조바위,
연못속에바위산을만든그분의손길이정해오는듯했다.
해풍암의바람도상큼했다.
해월루에서먼바다가보이고간척을한논들이푸르다.
다산이자주대화를하던백련암까지는너무멀었다.
전시실에서다산에대한비디오를틀어주었다.
모든성지에서이런시설이있으면좋겠다는생각
정재원(丁載遠)의넷째아들로이승훈의처남이기도한
다산은경기도양근마재에서태어나성호이익의학풍을이어받아
실학을집대성한인물로평가된다.
그가천주교와관계를맺기시작한것은이미1770년대후반.
천주교서적을접하면서그오묘한진리에매료되기시작한그는
1783년에는형약전과함께서울로올라가는배안에서이벽(李壁)과
천주교에관해토론을벌이고1784년수표교에있는이벽의집에서세례를받았다.
하지만그이듬해을사추조적발사건이일어나자
그는척사(斥邪)의태도를취한다.1791년진산사건이발생하여윤지충과권상연이죽음을당하고
박해가거세지자그는배교의뜻을명백히한다.
더군다나1797년그는다시금자신이서학도(西學徒)로지목받자
자명소(自明疎)까지올려가며신앙을부인했고
1799년에는척사방략(斥邪方略)을저술해천주교에대한배격의입장을분명히했다.
하지만1801년신유박해로정약용은체포되었고이과정에서
그는천주교를철저히부인하고권철신,황사영등자신이알고있던
교회지도자들을고발하기도했다.
그러나결국그는강진으로유배의길을떠나게된다.
강진에서18년간의유배생활을시작하면서그는자신의호를여유당(與猶堂)이라고칭한다.
이는아마도자신의형약종과매부이승훈이서소문밖네거리에서
순교의길을택한데비해자신은이러지도저러지도못한다는뜻의
‘여유당’이라는자호(自號)로써그부끄러움을표현한것이리라.
산천이두번변하는세월을쓸쓸하게지내고난뒤유배가풀려서울로돌아온다산은
이전과비교할수없는굳건한신앙을보여준다.
자신의배교를크게반성한다산은대재를지키며고신극기(苦身克己)의생활을하면서
외부와의연락을끊고묵상과기도로살아갔다.그는이런참회와기도의생활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저술했고박해로순교한동지들의유고를"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정리하기도했다.특히만천유고에는이벽의"천주공경가"와"성교요지"와같은
주옥같은글들이담겨있다.
인간적인나약함으로배교한뒤말년을회개와참회로참된진리에자신을바친다산은
죽기직전중국인파치피코유방제(劉方濟)신부로부터병자성사를받고숨을거둔다.
2.나주무학당
3.나주성당
4.곡성옥터성당
2008년9월21일
1.전동성당
2.풍남문
3.초록바위
4.서천교
5.전주숲정이
6.치명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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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수류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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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류성당은신부님과스님이지도하는두메산골어린이축구팀의이야기를그린
가족영화’보리울의여름’촬영지가되면서일반인들에게최근많이알려졌다.
영화에나오는화율초등학교는수류본당이1909년개교해
해방때까지운영해왔던인명학교의후신이다.
좁은논길을따라멀리서성당의건물이보인다.
미사중이어서기다렸더니한패의수녀님들이성지순례를오셨단다.
신부님의안내로100퍼센트신자인마을뒷길에있는수영장에도가보고
캠파이어장소에도가보았다.
수류본당은전주전동본당과함께1889년에설립된유서깊은본당이다.
신앙의힘으로뿌리내리고친교로새순을내밀어사랑으로복음의열매를맺어온지난
세월의경륜을웅변하듯성당맞은편에는족히100년은넘어보이는
아름드리느티나무한그루서있었다.
수녀님들은기념촬영을하시고우리는사무실에들러옛날성당사진을보았다.
숙식제공이가능한순례길.
수영장까지갖췄으니참으로좋은성지크스란생각.신부님께서다음코스를
상세히알려주셔서편했다.
8.초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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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남이는1794년최초로조선에입국한외국인선교사인중국인주문모신부가
유항검의초청으로전라도에서는처음으로방문한곳이기도하다.
주신부는그의집에머물며성사를집전하고강론을하는한편
유항검과함께여러가지교리를진지하게토론했다.
이때그의아들유중철은첫영성체를하게된다.
주문모신부의주선으로1797년에는초남리에서전대미문의혼례식이거행된다.
류중철요한과이순이누갈다가’평생을오누이처럼살면서동정을지키겠다’는
동정서원을하면서혼례를올린것이다.
바로이들이한국천주교회최초의동정부부였다.
이들동정부부는1797년혼배후1801년치명할때까지4년간이곳에서동정생활을했다.
당시와같은크기의집,같은크기의방이재현되어수녀님께서보여주셨다.
초남이와동정부부의이야기가들어있는책두권도주셨다.
유항검은전주초남이에서높은덕망과많은재산을소유한가문의아들로태어났다.
"술주고밥주고,떡을주면서"후덕한인품으로인근의백성들로부터존경의대상이됐던
그는과거급제를목표로학업에정진했다.
대부분양반의길이그러하듯이유항검역시입신양명을꿈꾸었으나
천주교의교리를접하면서그모든걸끊었다.
1784년늦은가을유항검은양근의권철신집을찾아가
그집에서천주교서적과천주상등을목격하고권철신의아우일신에게서교리를듣는다.
천주교교리의오묘한진리를들어받아들인그는마침내권일신을대부로하고
이승훈으로부터세례를받게된다.
고향에서암암리에전교활동에힘쓰던그는1786년봄,
조선천주교회의창설주역이자가성직제도를설정한이승훈에의해
권일신,홍낙민,최창현,이존창등과함께신부로임명된다.
그러던중1787년그는가성직제도의부당성을깨닫고이승훈에게그시정을요청하는한편
북경에밀사를보내어오류를범한가성직제도에대해정죄(淨罪)하고
선교사들의지시를받도록촉구했다.그리하여윤유일이밀사로파견됐고
유항검은그의후견인역할을담당하게된다.
1801년신유박해의회오리는.
외국인신부의입국을도와내통했고사교를믿었을뿐만아니라
청나라에청원서를냈다는죄목으로대역부도(大逆不道)의죄를적용해머리를자르고
사지를자르는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언도받는다.
3대가벌을받은초남리생가는파서연못이되어있던것을
지금은아담하게성지로꾸며두었다.
주일이라늦게당도하신수녀님에게들은이야기중가장안타까운일은
폐문이된집을본후라몇년이넘은세월인데도그동네에는신자가없다는것이었다.
동정부부에대한책자한권을얻고떨어진감홍시몇알을주워먹으며
점심도못먹은허기를달랬다.
시골깊이순례를하다보면먹을곳이마땅하지않고시간을넘기기가일쑤일것같다.
다음엔코펠을가지고다니자고결정한다.
가을뙤약볕을쪼이며450m걸어가서주문모신부님이집전했던기념관을보고
순례객이머물수있는공간,물도나오고방도있고..
쫄랑쫄랑따라다닐흰둥이강아지도한마리…
이런곳에서는며칠묵상하며지내도좋을것같다
9.천호성지
10.여산숲정이
11.여산동헌
12.고산성당
각성지마다얽힌이야기는차차풀어서하겠습니다.
너무나애달픈사연을가볍게다룰순없어서
우선이미지만보여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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