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여우목 교우촌에 달린 붉은 감홍시

2008.11.21금요일

여우목교우촌:문경시중평동(054-572-0531문경성당)

일기예보는따뜻할거라했고오전내내따뜻했던날씨였다.

가장깊은산골이예상되는안동교구순례는어려운숙제였다.

갑자기상주의신앙고백비에서부터불던바람은진안리에서거칠어졌다.

진안리의칼바람을맞고차를돌려출발했다.3시반쯤.

상주옥산신부님께서알려주신<동로>가는길로계속갔다.

너무나후미진산골…

약30분쯤차를달렸는데도여우목은커녕아무것도없다.

길에돌로된표지석이있다고가르쳐주셨기에그걸살피며갔다.

그러나가늠할수없어서길가에서있는택시기사에게물어보았다.

"네,아직도한5킬로미터를더가면오른쪽에주막이하나있습니다.

그곳에서왼쪽으로올라가면거기에길이잘만들어져있을겁니다."

기사는매우친절했다.

길에서저런사람을만나면종일기분이좋지..

아마도크리스토폴성인이보내셨을지..

순례자의주보성인.

얼마안가서왼쪽에<내고향중평리>란표지석이커다랗게서있었다.

아무래도이상해서표지석가까이가보았다.

가장아랫쪽에잘보이지도않게’여우목1.5킬로미터’더가라고

씌어있었다.반가운안내.

<여우목주막>,아무도없는빈주막에가랑잎이구르고있었다.

왼쪽으로약300미터쯤걸었을까?

월악산국립공원관리인이써둔팻말이입구에붙어져있는곳,

사람의눈을피해살았던옛교우촌엔사람은아무도없지만사람살던흔적은남아있었다.

빠알간감이늦가을찬바람에도하늘높이달려영롱한빛을발하며

달랑달랑달려있었다.

숨어살면서얼마나가슴졸이며서로를위한따뜻한정으로

서로를감추며더큰사랑을주고받으며살있던것일까?

늙은감나무,모과나무..그리고높이달린십자가.

안동교구에서최근에사들인300평으로꾸며진곳이다.

순교자들의고통을생각하게하는14처의조각상들.

박치보와그아들의동그만두묘소.

순례자를위한자연친화적인화장실.

늙은감나무아래정답게놓여있는돌의자들….

그들의숨결을느낄수있는것은,슬픈신앙의조상들을느낄수있는것은

쓸쓸한가랑잎깔린호젓한길과

주인없이붉고맛있는감을매달고섰는늙은감나무들과

아직도이윤일요한님,하고외치면왜,하고대답할것같은

그분들의숭고한죽음을상상할수밖에없었다.

시간이아무리없더래도십자가의길을묵상하지않을수없었다.

웅얼웅얼

‘어머니께청하오니내맘속에주님상처깊이새겨주소서’

사르륵사르륵가랑잎이대답을하는것같았다.

"너무늦었으니얼른가봐.지금은추우니까,더따뜻해지면

많은사람들을데리고오게나.

감나무밑에서두런두런이야기나나누시게

아픈이야기도,사는이야기도.그대소망도기도하면다들어주실걸세

저기저하느님께서…"

우리는다음해를기약하고그호젓한교우촌을나섰다.

여우의울음인지"꺼억꺼억"짐승소리가들렸다.

여우목성지는103위성인인이윤일요한성인(대구관덕정,대구대교구제2의주보성인,

당시여우목공소회장)과서치보요셉가정에의하여이루어진교우촌이다.

충청도홍주태생의요한성인은1866년병인박해때11월18일30명의신자들과함께체포되어상주감영으로,

다시대구감영으로,1867년1월21일관덕정에서참수순교했다.

미리내묘역에있던그는120년되던1987년1월21일대구관덕정순교기념관에옮겨모셨다.

여우목은부근에교우촌인‘건학’과‘부럭이’(부락이)가산길로불과20-30리내에있다한다.

이들세교우촌은처음부터서로빈번한접촉을하면서이웃집드나들듯이

서로긴밀하게연락하고서로도와가며열심한교우촌을이루어살고있었다.

여우목성지는소백산맥이높고험준한대미산(1,115m)을경계로하여

충북단양과경계를이루는문경지방의최동북단에위치해있다.

대미산중턱에잡리잡고있어서옛날부터경상도동쪽지방의사람들이서울로가기위해서는

이여우목고개를넘어문경읍내와새재로넘어갔던교통의요충지였다.

이곳에처음사람들이살기시작한것은1,600년경현재이곳에살고있는

장원의10대조부인장기풍이단양에서이곳으로이주해와서움막을짓고

다래덤불을걷고산지를개간하며살았다고한다.

천주교신자들이이곳에살기시작한것은1839년기해박해를전후해서이다.

충청도홍주가고향인성이윤일요한가정이상주갈골에서이곳으로이사를왔고,

그무렵에경상도초대교우서광수의손자인서치보요셉가정이충북정원에서

이곳으로피난옴으로써신자들이살기시작했다

(1815년을해박해,1827년정해박해때순교한박경화바오로와

아들박사의안드레아의가정이몇곳으로피난을다니다가이곳으로우거해살았다.

또한경상도첫신자가정중의한가정인서광수의후손들이

1839년기해박해쯤이곳여우목으로피난와서살았다).

서치보요셉(1791-1840)은가족들과함께이곳에서열심히신앙생활을하다가

1840년9월19일(음)에하느님품으로돌아가셨다.그때나이49세였다.

그후선산(현여우목마을이있는뒷산)에묻혀있던그의유해는

1999년9월18일이곳에새로이산소를마련하여아들서인순시몬과함께이장하여모셨다.

한편이곳에살다가상주경산등지로피난갔던서치보의아들들인

서인순시몬과서익순요한,서태순베드로는병인박해때순교하였다.

서인순시몬은경산모개골에살다가포졸들에게체포되어대구의경상감영에서문초를받고감옥에서옥사했다.서익순요한은대구에서서울로이송되어가서서울절두산에서백지사형을받고치명하였다.

서태순베드로는박해를만나대구에서문경한실로피난갔다가

문경포졸들에게체포되어문초를받고상주진영으로이송되어다시혹독한심문을받은후

상주감옥에서옥사했다.

한편베로니카라는노파는이곳에서신자들과함께체포되어가는도중에마을앞노상에서순교하였다.

(출처:안동교구청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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