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어지나오얼 염호- 광개토왕비문’에 나오는 ‘염수’(鹽水)

‘광개토왕비문’에나오는‘염수’(鹽水)로추정되는어지나오얼(額吉?爾)염호

글:정수일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www.kice.ac>사진:천종욱

우리야스타이에서시원한초원의아침공기를가르며서남방향으로무연한초원길을35㎞쯤달리니

‘염장’(鹽場,소금밭)이란표지판이나타난다.

여기서길을우측으로꺾어12㎞더가니드디어어지나오얼이란염호가나타난다.

멀리서부터벌써염기가햇빛에반사되어반짝거린다.

염호인근에는몇개의작은마을이널려있으며,염호가에는소금가공공장의굴뚝이우뚝우뚝솟아있다.

소금이산더미처럼쌓여있는하적장에서는대형트럭들이분주히오간다.

면적이25㎢에달하는염호는몽땅염전으로이용되어연간8만여t의소금을생산한다고한다.

대부분식용으로쓰이고일부만공업용으로사용된다.

주로인근마을에서채용하는500여명의노동자가일한다고하니염전치고는꽤큰규모다.

갓물을댄논밭처럼물결이찰랑거리는소금밭은눈이모자라도록아득한수평을이루고있다.

군데군데논도랑같은물길이가로·세로로깊숙이파여있다.

맛을보니혓바닥이짜릿할정도로염도가높다.

신기하게도그짠물속에서이름모를불그스레한식물이자라고있다.

짜면짠대로자연에순응해서살아가는식물의강한순화력(馴化力)을말해주는일례다.

이곳말고도내몽골일원에는여러개의염호가널려있다.이것은그옛날이곳이바다였음을말해준다.

‘광개토왕비문’에나오는‘염수’가이염호일개연성은있지만,그연구는아직껏오리무중이다.

이비문은크게추모왕에서광개토왕까지의세보(世譜)와대왕의대외정복사업,

그리고왕릉을지키는수묘인들의역할등세가지내용으로구성되어있다.

고구려의독창적인천하관을담고있는이비문과관련해서는

끊어읽기와문자서법,빈글자의복원,본문의판독과주석,비문의진위,탁본의유전등많은문제에서

논란이분분하며불확실하거나해명되지못한점도적잖다.

이글과관련된내용은둘째부분,즉대왕의혁혁한정복사업에관한무훈기사인데,

주목되는것은그중에서도중국에대한서정(西征)을맨먼저언급했다는사실이다.

그만큼이서정을무훈의첫자리에놓을정도로중시했다는뜻이되겠다.

그내용은영락(永樂)5년(을미년,395년)에비려(碑麗)가○○○하지않음으로군사를거느리고정토에나섰는바,부산(富山)과부산(負山)을지나염수(鹽水)에이르러3부락,600~700영(營)을쳐부수고

헤아릴수없이많은소와말,양떼를얻었다는것이다.

이내용에서‘비려’는다른중국사서에나오는‘비리(裨離)’나‘비리(?離)’‘필려이(匹黎爾)’‘패려(稗麗)’와같이거란부족이나고려에복속되지않은다른예맥집단을지칭하는것인데,

이비문에서굳이‘비려(碑麗)’라고쓴것은그들을비하하기위함이라고한다.

즉여기서‘비’는비석이고,‘려’는잡아맨다는뜻으로서

상대방비석에짐승을잡아매놓는다는것은그에대한비하이고모욕이된다.일리가있음직한풀이다.‘

부산(富山)’은요동환인(桓因)의서변에있는우모대산(牛毛大山)이고,‘

부산(負山)’에관해서는보통산이름이라는설과‘산을따라서’라는단문이라는다른설이있다.

전자의경우는“부산과부산두산을지나서”로해석되고,

후자의경우는끊어읽기로“부산(富山)을지나서그산을따라…”로해석된다.‘

부산(負山)’이어딘지가미상인상황에서후자의해석에신빙성이간다.

‘염수’는오늘의요동번시(本溪)를관류하는타이쯔허(太子河)인데,

이강의옛이름이‘연수(衍水)’로서‘염’자와‘연’자는동음이의어다.

이상은대체로중국학자들의해석이다.

종합하면,대왕의서정은요동반도의범위를크게벗어나지못한것으로,

그서경은랴오허(遼河)서쪽랴오닝성베이전현(北鎭縣)경내의이우뤄산(醫巫閭山)까지라는것이다.

염호가에서니그옛날이드넓은몽골초원을누비던고구려기마군단의말발굽소리가

마냥귓전을울리는것같다.

이염호가어딘가에그들이짓부수어버린그숱한영자리가있으련만,지금은그흔적을찾아볼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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