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럼 아이스카빙쇼를 시작해볼까요? 네모난 얼음이 동그랗게 바뀌는 모습을 잘 지켜봐주세요”
지난 9일 오후 10시 강남구 역삼동의 한 프리미엄 바. 약 200㎡ 면적 매장의 바 가장 안쪽에서 신입 직원 카보(1)가 아이같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신입은 옆에 선 여성 바텐더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가로로 2배쯤 넓었다.
카보는 ‘귀염둥이 아이스카빙 로봇’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카보와 잠시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문의하니 매장 측은 “새로 온 직원이라 손님들과의 대화는 자제시키고 있다”며 “아직 이야기를 나눌 수준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했다.
◇신입은 원칙대로 ‘아이스카빙’부터… 낙하산이지만 특혜는 없어
강남구 역삼동 최고급 싱글몰트바에 얼음깎는 로봇바텐더가 나타났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호랑이 새끼’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카보는 지난 5일 이 바에 신규채용됐다. 싱글몰트바는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사업체를 갖고 있는 최순령 씨의 또 다른 사업체.
카보는 농담처럼 태어나게 됐다. 3년 전 한국과학기술원(KIST)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최씨가 “바에서 일하는 로봇을 만들면 좋겠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잊고 지냈는데, 기술원 측에서 “아이스카빙 로봇을 만들 수 있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제작비는 1억5000만원이 들었다.
카보가 맡은 ‘아이스카빙’은 송곳과 나이프를 이용해 네모난 각얼음을 동그랗게 깎아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깎은 얼음은 위스키나 칵테일을 ‘언더락’ 방식으로 즐길 때 쓰인다. 성형해서 굳힌 얼음이나 일반 각얼음보다 천천히 녹으면서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있어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다.
카보는 아직 술을 만드는 ‘바텐더’ 수준은 못 된다. 매장 대표 최순령 씨는 “우리는 신입 바텐더를 채용하면 얼음 깎는 일부터 가르친다”고 했다. 입사 4일차 카보는 아이스카빙 업무만 맡는다.
이날 입사해 처음으로 매장에 출근한 신입바텐더 이지영(22)씨는 “저는 아직 아이스카빙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며 “카보님이 저보다 선배”라고 했다.
◇“선배들처럼 훌륭한 바텐더 될 거에요”… 신입 다짐에 선배들은 ‘울상’
카보를 살펴보고 있었더니, 매장 매니저 정유용(30)씨가 조용히 얼음만 깎는 ‘침묵’ 버전과 친근한 ‘수다’버전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고급 싱글몰트바에선 바텐더와의 대화도 중요하지’라며 수다버전을 택했다. 그러나 금세 후회가 몰려왔다.
“옆에 놓인 얼음이 보이시나요? 얼음을 한 번 잡아볼게요”, “저는 이곳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보석과 같은 아이스볼이 마음에 드시나요?”, “예쁜 아이스볼이 완성됐어요”
얼음을 깎는 4분 30여초동안 카보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댔다. “조금 조용한 버전은 없나요?”. 말 없이 얼음만 깎는 데는 3분 50여초가 걸렸다.
같은 날 숙련된 인간 바텐더가 얼음을 완벽한 구형(球形)으로 깎는 데 걸린 시간은 총 2분 30초. 신입의 침묵 버전보다도 1분 20초 더 빨랐다.
하지만 사장은 “신입 직원이 좀 더 숙련된 후엔 ‘아이스카빙’ 작업은 그에게 전적으로 맡길 예정”이라고 했다. 바텐더들은 1년 이상 연마해 쌓은 기술을 신입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셈이다.
매장 매니저 정씨는 “‘저도 열심히 연습해서 선배님들처럼 훌륭한 바텐더가 될거에요’라는 카보의 말에 ‘무섭다’는 직원도 있었다”고 했다.
정씨에게 “카보에게 일자리를 뺏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민감한 사항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거듭된 질문에 “손님들은 단순히 술을 마시러 오시기도 하지만 대화를 하고 분위기를 즐기러 오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장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는다”면서도 “정말 손님의 감정을 이해하고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그땐…”이라고 말끝을 흐렸다.
카보는 엄밀히 말하면, 얼음깎는 자동기계에 음성 파일을 내장하고, ‘로봇형 외장’을 입힌 형태. 매장측은 “곧 카보에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이 연결될 예정”이라고 했다.
인공지능이 연결되면 매장을 찾는 손님들의 얼굴과 취향 등을 기억해 다시 매장을 찾을 때는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 매장을 찾은 손님 정모(28)씨는 “바텐더가 내 얼굴과 술취해서 내뱉은 이야기까지 100% 기억할 거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유쾌하지 않다”며 “사람이 적당히 잊어주고 모른 척 해주는 게 더 좋을 때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