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이상의 “4강 신화”를 현실로 낚아 챈 대한건아들 덕택에 월드컵이 막을 내린 지 벌써 2년이 지났어도 TV에서는 틈만 나면 특집으로 하이라이트나 뒷 얘기를 담은 방송을 재방영 한다. 이번 추석도 예외는 아니어서 태극전사의 활동을 개그맨들이 현장중계하는 모습이 재방영되었지만 다시 보아도 싫지는 않은 장면들이었다. 지난 번 인천광역시 국제교류사업의 하나로 인천시청의 요청으로 치과의료지원단장을 맡아 자매도시인 베트남 하이퐁시를 방문하였을 때에도 공식, 비공식 회의를 불구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월드컵 4강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주어 꺼질 줄 모르는 월드컵여파를 이역만리에서도 느낄 수도 있었다.
지난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국민들한테 잠시 잊혀진 과거사를 새삼 일깨워 준 것은 터어키팀의 활약이었다. 터어키팀은 반세기 전 한국동란 때에 참전한 기억을 되살려 가면서 우리나라를 짝사랑하여 왔었는데 막상 도움을 받았던 우리나라는 이를 아득히 잊어버리고, 큰 기대를 하고 한국을 찾아 온 터어키 축구대표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었다. 이런 마당에 터어키의 예선 첫 경기가 주심의 판정시비에 휩쓸리면서 터어키에서는 한국에 대한 감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한국에 대하여 섭섭해하는 이유를 대다수 국민들은 물론 축구에 관하여는 달인인 “붉은 악마”들 조차 잘 몰랐을 것이다. 때마침 방송에서 한국동란 때에 참전한 터어키 노병들을 월드컵경기에 초청하여 그들이 피를 흘린 옛 전적지를 방문하고, 함께 참전하여 전사한 사촌형제의 묘를 부산의 유엔군묘지에서 발견하고 감격한 노병들의 모습을 그린 코끝이 찡한 장면을 방영하고, 터어키와 한국이 동반 3-4위전에 오르자 급기야는 천년지기 친구와 같은 우정을 연출하는 드라마를 펼친 것이었다.
터어키는 그 위치가 참 애매한 나라이다. 아시아라고 하면서도 유럽에 속한 독특한 위치에 있다. 한때는 훈족, 흉노족, 돌궐족 등의 이름으로 중국고대사에 나오기도 한 그들은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역사를 지니면서도 서양역사의 큰 흐름을 이끌어 온 기독교가 로마로 전해지게 된 길목에 있었고 그 후 동로마제국의 중심지로서, 이어서 오스만터어키제국의 등장으로 유럽역사의 한 축을 이루기도 한 나라이다.
터어키의 수도 이스탄불도 시내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러스해협을 중심으로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 땅이 되는 것이다. 터어키 전체 국토를 따지고 보면 아시아쪽 영토가 유럽쪽 영토보다는 월등히 넓다. 한때는 유럽역사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지만 지금은 다른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한참 뒤쳐지는 국가 경제력 때문에 유럽인들은 터어키를 아시아국가로 분류되었으면 하는 눈치인 반면 터어키는 기를 쓰고 유럽으로 남고 싶어하는 것 같다.
정말로 그 동안 터어키를 여행하면서 (1993년,1996년,2000년) 가장 곤혹스런 점은 어지러울 정도로 심한 통화인플레였다. 2000년 공정환율이 1 USD = 1,600,000 터어키리라, 즉 USD.100 지폐 한 장만 환전하여도 무려 1억6천만 리라가 호주머니에 들어오게 되어 갑자기 부자가 된 기분이지만 금새 택시요금으로 2천만리라를 지불하고 콜라 한 병에 백만리라를 내고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숙박비로 3천만리라를 지불하고 나면 화폐규모에 적응하지 못하여 돈을 주고받는데 화폐의 동그라미숫자의 개수를 세는 것이 여간 신경이 쓰이질 않게 된다. 터어키의 고궁이나 박물관등의 입장료도 인플레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여 아예 새 입장권의 인쇄를 포기한 것인지 이미 인쇄된 여러 종류의 입장권을 그때그때 변동된 입장료의 총액수만 맞추어 여러 장 건네고 있는 실정이다.
터어키의 수도 이스탄불은 매우 매혹적인 도시이다. 동로마제국시절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던 시절의 비잔틴문화로부터 오스만터어키의 화려했던 시절을 거치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혼재된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도시로서 스파이영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 짓는 경계선도 바로 이스탄불 시내를 반으로 가르는 보스포러스해협 이다.
이스탄불의 오랜 역사와 그 변천과정은 구도시에 있는 성소피아사원에서 잘 나타난다. 6세기에 유스티니안황제에 의해 교회로 세워진 소피아사원은 그 후 오스만터어키시절에는 이슬람사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지만 내부의 천장에는 아직도 아랍어로 문구와 함께 벽에는 지운 흔적이 남은 기독교교회로 사용될 당시의 성화가 모자이크벽화로 흐릿하게 남아 있어서 그 변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성소피아사원과 마주보고 있는 술탄아흐멧모스크(SULTAN AHMET MOSQUE)는 성소피아사원과 함께 이스탄불을 상징하는 건물로서 블루모스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성소피아사원보다 약 1000년 후에 세워졌지만 블루모스크는 교회로 세워진 성소피아사원을 의식한 듯 규모에서부터 이를 압도하고 있다.
터어키의 모스크는 페르시아의 모스크와는 다른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스크들은 사방형의 긴 회랑을 가진 건물 가운데 넓은 공터를 유지하여 예배공간이 실외가 중심을 이루지만 터어키의 모스크들은 거대한 돔을 지닌 건물 내부가 예배공간이 되고 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미나렛(이슬람사원의 첨탑)은 한 때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던 오스만터어키제국시절의 자존심을 보는 듯 하며 하루 다섯 번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이 이곳 저곳의 미나렛에서 울려 퍼져 나오면 이방인도 그들의 분위기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블루모스크와 함께 화려한 오스만터어키의 영화를 보여주는 곳은 톱카푸궁전이다. 성소피아사원의 뒤에 있는 보스포러스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세워진 이 궁전은 오스만터어키시절의 술탄들의 권력과 화려한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5세기에 등장하여 꾸준히 증축을 하였으며 궁전 자체가 상주 인구나 크기로 보아 하나의 도시로서의 역할을 한 것이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4단계의 정원으로 나뉘어지며 마지막 제4정원에서 내려다 본 보스포러스해협의 전경은 일품이다. 톱카푸궁전에서 가장 눈여겨볼 곳은 하렘과 제3정원에 있는 보물박물관 Imperial Treasury 이다.
술탄의 궁전이었던 톱카푸궁전에서 하렘은 술탄의 후궁들을 위한 또 하나의 작은 궁전이다. 자유롭게 돌아 볼 수 있는 톱카푸궁전에서도 하렘만은 시간에 맞추어 별도의 입장료를 내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서만 단체관람이 허용될 정도로 출입이 제한되는 곳인데 항상 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어 괜히 관광객들의 궁금증을 유발시키기도 하여 무엇인지도 모르고 들어 왔다는 관람객들의 푸념도 간혹 듣게 된다. 술탄들의 거처뿐 만 아니라 남녀가 유별한 이슬람사회에서는 일반 가정에서도 가정의 내실로서, 금단의 장소라는 뜻의 아랍어 하림에서 유래된 하렘은 존재한다. 톱카푸궁전의 하렘은 공개되지 않아야 할 후궁만을 위한 금남의 집으로 그 내부가 금도금이 된 수도꼭지며 화려한 타일 등의 장식이 남아 있어 오랜 동안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되어 낡은 것을 감안하면 당시의 호화로움이 어렵지 않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있다. 술탄만을 위하여 사는 후궁들이지만 이들의 시중을 드는 신관이 별도로 존재하였다는 설명도 찾는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제3정원에 있는 보물박물관은 오스만터어키의 전성기의 세력이 어느 정도이었는지를 가늠 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 각국으로부터 건네 받은 화려하고 값비싼 보물들과 외교를 하면서 주고 받은 훈장 및 휘장 등의 기념품의 규모에 저절로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톱카푸궁전에서 조금 내려오면 이스탄불고고학박물관이 있다. 로마의 바티칸박물관이나 파리의 루블박물관 처럼 대형박물관은 아니지만 오히려 너무 폭 넓은 전시물을 진열한 그들 보다는 알렉산더대왕의 석관등 고대그리이스와 오리엔트문명을 접목시킨 헬레니즘문명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어 관람 후에도 강한 인상을 남겨 주는 박물관이다.
이슬람사회인 터어키사람들의 생활모습은 유럽 보다는 아랍사회의 영향을 받아 중동지방등 아랍사람들의 생활습관을 많이 따르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모습을 가까이 지켜 볼 수 있는 곳은 아랍어로 수크라고 불리는 재래시장인 바자르이다. 그랜드바자르는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이스탄불 서민들의 모습은 이집트바자에서 오히려 잘 찾아 볼 수 있다. 바자르에는 열심히 차를 나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 터어키뿐 만 아니라 중동지방의 사람들은 이슬람 규율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차와 커피를 유난히 즐긴다. 커피는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으로 애용되는 음료이기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음료수로 자리를 잡은 것은 13세기이며, 음주가 금지되었던 이슬람사회에서 시작된 음료인데 미국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슬람문화를 멋모르고 즐기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터어키의 커피는 향기가 매우 강렬하지만 맛은 매우 쓴 편이어서 코밑에 잔을 들이 댈 때까지만 그 향에 매혹되고 막상 마실 때에는 마치 한약을 먹는 맛이 들 정도이다. 중동지방에서 커피와 함께 주요 기호품으로 애용되는 것은 “나르길레”라고 부르는 물담배이다. 아랍어로는 쉬샤라고도 하는데 여러 가지 향료를 섞은 물을 대롱을 통하여 거품을 내어 그 향을 마시는 것이다.
터어키를 설명하면서 터키탕을 빼놓을 수도 없겠다. 터어키탕은 함맘 HAMAM 이라고도 부르는 아랍사회의 목욕시설이 오스만터어키시절에 지금의 형태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는 음란한 목욕장소로 탈바꿈 한 것이다. 터어키의 원조 터키탕은 우리나라와는 전혀 구조부터가 다르다. 목욕만을 위한 시설만 아니라 남자들이 사교를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함만의 구조는 조그만 개인용 탈의실이 대기실의 사방으로 둘러 쌓여져 있으며 목욕객들의 차림도 알몸은 허용되지 않으며 허리에 수건을 두르게 된다. 아마 우리나라처럼 대중목욕탕이지만 알몸을 거리낌없이 남한테 노출시키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아도 흔치 않은 것 같다. 대기실에는 항상 따뜻한 차가 준비되어 있으며 목욕 전이나 후에 손님들은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다.
욕탕도 그저 가운데가 투명하게 뚫린 커다란 돔 형태의 지붕 밑에 벽을 따라 수도꼭지와 겨우 세수를 할 수 있을 정도의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장식된 수조만 있을 뿐이고 중간 기둥들 뒤로 여럿이 모여 담화를 나눌 수 있는 반 개방된 장소가 있을 뿐이다. 욕탕 한가운데는 무릎 높이 정도의 따끈한 대리석바닥이 권투장의 링처럼 바닥에서 올라 와 있어 여기에 누워 휴식을 취하던지 맛사지를 받게 된다. 열기가 어디에서 나오는 지는 몰라도 실내공기는 뜨거운 열기에 익숙해진 우리들한테는 오히려 한기를 느낄 정도다.
우리나라처럼 여탕과 남탕의 구별은 없고 다만 사용 날자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유명한 터어키탕은 300년의 역사를 지닌 성소피아사원 근처에 있는 자알오을루함맘 Ca alo lu Hamam 으로 이제는 워낙 유명해져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 그들의 전통적인 분위기는 많이 흐려졌다고 한다. 터키탕에는 전통적인 맛사지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지구촌을 여행하다보면 맛사지가 왜 그리 많은지, 사지를 주물러대는 방법이 그리 뭐 차이가 있다고 저마다 Traditional Massage를 내세운다. 이스탄불의 터키탕에서 맛사지를 요청하였을 때에 헤비급 레슬링선수처럼 건장한 체격의 맛사지사가 등장하여 잠시 놀라기는 했어도 흘러간 명화 “벤허”에서 전차기사들이 맛사지 받는 장면에서 보듯, 근육을 툴툴 털 듯이 주물러대는 터어키식 맛사지는, 레슬링하듯 팔다리를 꼬는 태국식 맛사지와 비교하면 싱거운 기분도 든다. 이 외에도 관광객을 위한 Oriental Special Package 가 등장하여 우리나라 목욕탕의 때밀이처럼 손님은 손에 비누 한 방울, 샴푸 한 방울 손에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로마제국시대의 귀족들이나 대접받았을법한 서비스를 즐길 수도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비용을 치뤄야 하는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관광객 뿐이다.
이스탄불 Sirkeci 기차역에서 저녁에 열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문화의 하나인 Sufi춤 공연도 터키에서 볼 만한 곳이다. Sufi 댄스는 이슬람문화에서 보편적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슬람원리주의자들한테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Sufi 춤은 터키의 콘야 지방의 이슬람 신비주의의 한 종파인 메블라나 종파에서 수도승이 추는 것으로 긴 치마와 같은 옷을 입고 계속 돌기만 하는 단순한 듯한 춤이지만 아닌게 아니라 신비스런 분위기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