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전의 지하요새 베트남 구찌터널

아직은 이른 아침인데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젯밤 늦게 하노이에서 비행기로 호치민(옛 사이공)에 도착하여 호치민에서의 첫날인 셈이다. 내가 베트남에 대해 알게 된 것은 60년대 초등학교시절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할 때이니 호치민시는 나한테는 사이공이란 지명이 더 편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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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치민시 인민위원회(시청)건물 – 불어로 de Hotel 로 되어서 호텔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

 

호텔에서 내려다 본 이른 아침의 호치민의 중심가인 구엔후에 NGUYEN HUE거리는 어제의 하노이와는 다른 모습 이어서 또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휴일 아침이라 그런지 넓은 대로에서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고 동네축구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차분하면서 억제 된 듯한 하노이의 분위기와는 달리 호치민의 첫 인상은 통일이전의 베트남의 수도로서의 사이공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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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 이른 아침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대로에서 축구를 하는 시민들 >

 

역시 통일이 된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베트남의 남쪽과 북쪽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진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베트남의 양끝에 있는 도시답게 지역상의 특징도 있겠지만, 아마 단지 사회주의정권에 오래 있었던 북쪽과 한 때나마 미국의 영향력아래 자본주의사회에 몸담았던 사람들이란 차이가 아직도 남아 있으리란 생각도 든다. 길거리에서 인력거나 택시기사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흥정하는 수법도 확실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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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전기념물이라 할 수 있는 월남전때 사용된 미군의 F-5 전폭기 >

 

베트남이 통일을 이룬 후에 경제적인 여건은 나아지지는 않았을 망정 통일베트남에서는 혁명전쟁의 승리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할 수밖에 없다. 호치민에서 약 60KM 떨어진 구치터널은 혁명전쟁의 영웅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월남전 당시 월남군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미군이 월맹군에게 손을 든 이유 중 하나는 베트콩의 게릴라 전법에 당할 수 없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이 게릴라전법의 대표적인 것이 구치터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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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터널이 있는 마을의 전원풍경 >

 

구치터널이 있는 곳은 하천을 끼고 있는 조용한 시골마을이다. 구찌터널을 방문하는 사람은 우선 입구에 마련한 브리핑실에서 간단한 영화와 설명을 듣고 개인이건 단체건 간에 언어별로 군복차림의 안내인의 안내로 터널 안을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 내가 도착하였을 때에는 일본인과 불어권 관광객만 있어서 나는 영어담당 안내인으로부터 자세하게 개별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브리핑실 건너편의 전시관에는 부비트랩 등 베트콩이 게릴라전법으로 정글 속에 설치하였던 각종 장애물이 실물과 똑같이 만들어 놓여 있으며 자작한 무기들과 폭탄 등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의 공터에서 안내인은 나뭇잎으로 덮힌 개인참호를 찾아내어 뚜껑을 열고 어깨를 움츠리며 그 속에 숨는 시범을 보여주는데 정말로 누구든지 깜쪽같이 속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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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안내인이 자기 앞에 파여진 조그만 웅덩이로 몸을 숨길 수 있을까 ? >

 

< 마치 안내인이 컴퓨터그래픽처리된 영화를 보는것 같이 땅속에 판 웅덩이로 몸을 숨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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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서 뚜껑을 덮어 위장한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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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터널 옥외전시장 – 전쟁당시 사용되었던 탄피들과 부비트랩등의 인명살상 장애물들을 볼 수 있다. >

 

땅굴의 크기는 비교적 체구가 작은 베트남사람들에 맞게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일부는 서구의 관광객을 위하여 폭과 높이를 두 배로 넓혀 공개를 하고 있다. 약 30미터 지나니 도저히 힘들어 돌아가자고 하였더니 이미 뒤에 다른 관광객이 들어와서 안 된다는 바람에 겨우 빠져 나왔지만 온 몸은 완전히 흙투성이가 되었고 그 날은 하루종일 온 몸이 쑤셨다. 땅굴 안에 있는 넓은 공간은 휴식장소로도 사용되는데 밖으로 나있는 조그만 창구는 환기를 위한 것이기도 총격전을 벌일 때에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땅굴의 총 길이는 무려 200km에 이른다고 하며 미군이나 월남정부군 부대까지 침투 할 수 있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는 반 지하형태의 벙커도 있었으며 야전의무실이나 회의실, 식당 등으로 사용된 것 같은데 자세히 둘러보면 다른 땅굴과 연결하는 통로가 있어서 비상시에는 안전하게 숨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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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일부를 관광객들이 직접 돌아 볼 수 있도록 폭과 높이를 넓힌 관광코스를 둘러보고 있다. >

 

숲 속에 내버려진 미군탱크에서는 치열했던 월남전의 전흔을 찾아 볼 수 있었지만 이를 설명하는 안내인 청년의 얘기는 먼 옛날 역사책에 있는 얘기를 하듯 하였으며 지금 이 시점에서는 먹고 살아나가는 일 외에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자조 섞인 이야기도 덧붙였다. 안내하는 청년은 영어를 매우 유창하게 하는데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지만 마땅히 일자리를 못 찾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청년은 아버지로부터 통일전의 월남사정에 대하여 최근에야 얘기를 들었다는데 아버지는 당시 어렵게 살았지만 통일이 되어도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는 말에 자신도 놀랐다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었다. 하노이사람들이야 사는 것은 나아진 것이 없다해도 세계최강의 미군을 이겼다는 자부심이야 있겠지만 같은 베트남사람이라도 내전에서 패배한 월남인들이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숲 속에 만들어 놓은 실물크기의 월맹군 인형으로부터 전송인사를 받고 구치터널에서 빠져 나오면 다시 오리들이 꽥꽥 노래부르며 헤엄치는 평화스러운 시골의 정경이 우리를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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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찌터널의 출구에 서 있는 베트콩의 실물크기의 인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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