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비밀

어제 외신에 의하면 고대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 CT촬영을 한다는 기사가 소개 되었다. 이미 죽은지 3300년이 지난 사람의 사인을 밝힌다는 것 부터가 그의 삶이 신권과 동일한 절대권력을 가졌던 파라오 답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집트역사에서 미스테리로 남아있는 이야기 중 하이라이트는 바로 제18왕조의 비운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Tutankhamen)의 비밀이라 하겠다. 투탕카멘이 태어날 때는 아메노피스4세(Amenophis)가 기존의 종교체제를 뒤 흔드는 큰 변혁을 시도하여 혼란에 빠진 시기였다.  그는 당시까지 섬겨온 여러 이집트의 신들을 다 버리고 오직 태양의 신 아텐(Aten)만 섬기고 자신의 이름도 아크나텐(Akhnaten)으로 바꿨다. 그러나 기존의 실력자였던 제사장들과의 대립에서 결국은 아크나텐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9살의 투탕카멘이 대를 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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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은 그 출생 자체도 미스테리 투성이다. 투탕카멘의 선왕인 아크나텐의 두 번째 부인의 소생이란 얘기도 있지만 아크나텐은 딸만 두었다는 설도 있어 아크나텐의 조카라는 설과 아크나텐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 3세의 또 다른 아들이란 얘기도 있다. 이런 혼란은 당시 왕족들 사이에서 근친결혼이 성행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한편 인척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이 애매하기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요즘의 혈연관계와 당시의 혈연관계를 설명하는 어휘가 일대 일로 대응이 되지 않기에 생긴 혼란이 아닐까 싶다. 하기야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의 할아버지뻘 친척의 족보를 가지고 의성김씨냐 안동김씨냐를 따지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무려 3500 년 전의 일을 명쾌하게 밝히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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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룩소 나일강 서쪽 왕들의 계곡에 있는 투탕카멘 무덤 입구, 1994년 9월 촬영 >


투탕카멘은 요즘 족보로 치자면 이복동생뻘 되는 안케세나문(Ankhesenamun)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투탕카멘의 원래 이름은 산왕인 아크나텐의 영향을 받아 파라오에 오를 때의 이름은 아텐 신의 이름을 따서 투탕카텐(Tutankhaten)이었다.  9 세의 어린 나이에 파라오로 즉위한 소년 투탕카멘은 신과 동등한 막강한 절대 권력자로서의 권력은 노련한 제사장들에 의해 누려보지도 못한것 같다. 아크나텐이 파라오에 즉위하기 전부터 권력을 누리고 있었던 제사장들은 아텐 만을 섬기던 아크나텐이 죽자 나이 어린 투탕카텐을 파라오에 앉히고 유일신으로 받들던 아텐 신을 포기하고 기존의 모든 신들을 다시 섬기도록 하고 투탕카텐의 이름도 투탕카멘(Tutankhamen)으로 바꿨다. 이렇게 제사장들 한테 눌려 살 수 밖에 없었던 소년 파라오는 급기야 즉위한 지 9년 만에 의문을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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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카이로박물관) >




투탕카멘이 오늘날 고대이집트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른 것은 그가 비운의 파라오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대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영생을 믿고 死後 세계에 대한 대비를 완벽하게 하여 자신의 시신을 ?지 않도록 미이라로 만들고 엄청난 재물을 함께 묻어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피라미드형태의 무덤을 만들었지만 도굴꾼들에 의한 무덤의 훼손 때문에 파라오들의 무덤은 사막의 계곡 지하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다.

 

< 비행기에서 본 나일강 – 강 오른쪽 東岸 은 산자의 도시, 왼쪽 西岸은 죽은자의 도시로 불린다. >

 

이집트는 남북으로 뻗은  나일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산자의 도시, 서쪽은 죽은자의 도시로 구분 된다. 아마 태양이 지는 것을 죽음과 연관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피라미드를 비롯하여 파라오들의 무덤은 모두 나일강 서쪽에 있다. 고대이집트의 중심도시였던 룩소는 강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카르나크신전, 룩소신전들이 있지만 강 건너 서안에는 죽음과 관련된 장제전들과 사막 계곡의 지하에는 파라오들과 왕, 그리고 귀족들의 무덤이 숨겨져 있다.

 

<  Luxor 서쪽 – 왕들의 계곡 >

 

투탕카멘의 무덤을 처음 발견한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경은 처음부터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아니었다. 카터는 어릴때 그림에 재주가 있었던 불우한 소년이었지만 한 귀족을 따라 이집트여행을 하였을 때에 탁본재주가 눈에 띄여 고분발굴사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의 카나몬경의 후원으로 독자적인 발굴프로젝트를 벌이고 있었는데, 투탕카멘의 무덤은 다른 고분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 사진 –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관 (카이로박물관) >

 

사실 투탕카멘은 고대이집트 역사상 어찌보면 가장 불우한 파라오로서의 일생을 지냈기에 그의 무덤에 대한 관심은 적을 수밖에 없었지만 1922년 우연히 찾아낸 투탕카멘의 무덤은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파라오의 무덤이란 것과  권력을 제대로 누려 보지도 못했던 파라오였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물이 발굴되어 전 세계가 놀라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중요한 것들은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의 특별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황금으로 된 마스크와 무려 110kg에 달하는 황금관등 2500여점에 달한다고 한다.

 

< 투탕카멘의 황금옥좌 >

투탕카멘의 발굴에 관여한 발굴팀 중에서 카터경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카나몬경이 다음 해에 모기에 물려 죽었다. 뒤이어 그의 동생 허버트 대령도, 카나몬경의 간호를 담당했던 간호원도, 카터의 비서도 연이어 20명이나 원인 모를 병이나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이를 가리켜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의 저주’라고 부른다는 영화속의 이야기같은 그럴듯한 얘기가 나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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